내게 책은 작은 구원이었다. 지금도 책을 사는 이유는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24년 5월 넷째 주: 20호

안녕하세요. 정민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있으신가요? 저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했던 말을 반복할 때 자신이 했던 말도, 제가 그 말을 들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이 민망해서 그런 다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끔 이럴 때도 있어요. 여자친구에게 무슨 말을 꺼내는 순간, 여자친구가 제가 하려고 했던 뒷이야기를 줄줄 읊는 겁니다. 그 얘기가 지겹다고 하면서요. 그렇게 다짐했던 제게도, 저도 모르게 반복되는 레파토리가 있었던 겁니다. (혹시 제가 여기에 했던 말을 반복해서 또 하면 말씀해주세요. 그런 일은 없기를….)


글을 쓸 때는 이런 생각이 좀 달라지기도 합니다. 새로운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완성도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반복된 얘기를 하더라도 재밌게 말하고 싶다, 하면서요. 평소 여러 번 반복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레파토리가 필요한 순간이 오는 거죠.


요즘은 누군가 쓴 글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건 누구에게 얼마나 반복해서 말했던 이야기일까? 누구를 떠올리며 남긴 이야기일까? 그러면 금세, 어디선가 신나게 말하고 써졌을 그만의 이야기를 본다는 게 재밌어지죠.


오늘은 박명준 대표님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책을 접했던 이야기, 그리고 조희선 목사님의 아는 것과 삶의 거리를 돌아보게 했던 독서 이야기를 보내드립니다. 오늘도 여러분을 진솔한 서사 앞으로 데려갑니다. 준비되셨나요?



나의 책장이 채워지던 날

박명준

  

어릴 적 집에는 책이 없었다. 누구나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방 한 칸에 가족 넷이 살던 때였다. 마루가 있었고 거기에 책장 겸 장식장이 있었다. 그 장에 십여 권에 달하는 일본 소설 양장본 시리즈가 꽂혀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그것을 읽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에는 드물지만 당시에는 양장본에 꼭 맞는 종이 케이스에 책이 끼워져 있었다. 이따금 종이 케이스에서 책을 꺼내 펼쳐 보았다. 하지만 읽지는 않았다. 작은 글씨로 촘촘히 인쇄된 양장본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고는 책을 덮어 케이스에 넣어 장식장에 다시 올려 두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 유일했던 그 책은 아마도 부모님이 어디선가 받거나 가져온 전집류의 일부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까지 방학이 되면 온 가족이 이모네 집에 가서 한 주를 지냈다. 이모는 서울에 살았고 잘살았다. 음대생이던 사촌 누나가 나를 예뻐했고, 그 덕에 나는 누나 방 베란다에 들어가 거기 있는 책을 읽곤 했다. 또래가 없는 이모네서의 한 주가 심심했던 터라 그 베란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무서운, 익살스러운 등의 이야기 시리즈는 나중에 우리 집으로 왔고, 나는 몇 번을 읽고 동생과 동네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 전집에서 ‘익살스럽다는 단어를 처음 알았고, “세상에서 가장 기상천외한 이야기"에서는 그 유명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읽었다.


계절에 한 번씩 우리 집을 들리던 계몽사 아저씨가 있었다. 정장을 입고 가죽으로 된 서류 가방을 손에 들고 검게 탄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찾아오던 아저씨는 마루에 걸터앉아 엄마가 내준 물 한 잔을 마시고는 내가 계속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물었고 이내 가죽 가방에서 전단지를 꺼내 엄마 앞에 내놓으며 세계문학 전집 한 질을 내게 사주면 좋을 거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세계문학 전집. 나는 심정적으로 아저씨 편이 되어 전단지를 보고 또 보는 것으로 마음을 표시하려 했지만, 엄마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다음에 또 들르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떠난 아저씨는 몇 개월 뒤에 (그리고 그 후로도 여러 번) 우리 집을 방문했지만 끝내 우리 집에 책을 팔지는 못했다. 


중학생이 되어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서너 명뿐인 남자 동기 중에 장로님 아들이 있었다. 그의 집에 처음 놀러 간 날, 그의 책장에 계몽사 아저씨가 우리 집에 그토록 팔려고 했던 세계문학 전집, 한국문학 전집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얇게는 200쪽에서 두껍게는 500쪽에 달하는 전집 중 한 권을 빌렸다. 《여자의 일생》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중고등학교 시절 수년간 나는 친구 책장의 전집을 하나하나 빌려 읽었다. 수백 쪽의 장편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쿠오바디스》, 춘희》, 좁은 문》, 《삼대, 《금삼의 피…. 그러다가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이 싫어져 어떤 시위를 하고 싶었던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 말에 귀를 닫고 책상 아래 책을 두고 두 학기 내내 읽었다. 한편,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던 《영웅문》에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학교 도서관 서가를 누비다가 우연히 발견해 빠져든 책은 그 무협지와 같은 ‘고려원’(지금의 민음사에 비견할 만한)에서 나온 야훼의 밤 연작 소설이었다.

‘고려원’에서 출간된 《소설 영웅문 제1부 - 몽고의 별1》,  《야훼의 밤 - 제1부 갈대바다 저편》

재수 학원에서는 학교와 마찬가지로 7교시 수업을 했고, 그러고나면 저녁 자율학습을 하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저녁을 먹으러 노량진역을 오가는 길에 중형 서점이 하나 있었다. 서점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펼쳐져 있는 넓은 매대에 수많은 책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햇살이 비추었다. 한 권 한 권 눈으로 살피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 들었고, 그러다가 한 권을 사기로 했다. 재수 생활은 학교생활과 비슷하여 적당히 즐거웠지만, 때로 외롭고 슬펐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외롭거나 슬플 때면 서점을 찾았고, 그때마다 책을 한 권씩 샀다. 서점 매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소설, 시, 철학, 역사, 사회, 인문…. 표지를 보고 책을 펼쳐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잔잔해졌고, 고르고 고른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서점을 나설 때면 재수 생활을 견딜 만한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 책장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의 책장은 빠른 속도로 채워져 갔다. 호기심이 없으면 학생이 아니라 생각하던 대학 시절에는 세상을 알고 싶어 마음 가는 대로 책을 골랐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읽는 책을 읽고, 그들이 권하는 책을 찾고, 그들이 선물해준 책을 넘기며 길을 찾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러면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책이 책장에 더해졌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중년이 되었다. 이제 장년이 머지않다. 


급 결론을 말하자면, 결핍이든 그리움이든, 즐거움이든 외로움이든, 호기심이든 필요든 어떤 동기에서 책을 집어 들었든, 내 책장에 들어온 책은 그때마다 작은 기쁨과 만족을 주었고, 설렘과 기대를 일으켰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마음에 깨달음과 용기를 주었다. 내게 책은 작은 구원이었다. 지금도 책을 사는 이유는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은 구원을 바라는 마음인 게다. 여전히 설레고 기대감이 이는 이유다. 하루가 짧다. 붙들어 두고 싶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간다. 캐시백이나 어바웃 타임 같은 영화에서처럼 시간을 멈추게 하거나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하는 방법은 하나 안다. 책 한 권을 펼쳐(가급적 소설이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면 좋겠다) 읽는 시간만큼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세계가 잠잠해지다가 서서히 멈춘다. 그런 비밀한 경험이 없다면 혹 너무 아련하다면, 한번 해 보시길. 앞으로 내 책장에 들어올 책은 남은 중년과 장년의 삶에 또 어떤 구원을 선사할지, 기대된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말이다. 


박명준
책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미몽에 사로잡힌 편집자.


앎에서 삶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다시 책이 메운다
조희선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비록 답은 다르다 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단다. 함께 물으며 단 한 가지 답을 요구하지 않는 장소라면, 그곳에는 아집은 없으리라. 서로 주체성으로 타자적 주체성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서사의 서사 16회 글 말미에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적은 글이다. 그랬건만 나는 다시 모인 독서 모임에서 독선적인 언행을 내뿜었다. 


스페인 14세기의 민중 생활과 기독교 신앙을 그린 8부작 드라마 아르나우의 성전을 시청한 뒤였다. 귀족 영주의 횡포와 농노들의 피폐한 삶, 기독교의 유대인 핍박과 엄격하고 무지한 규율과 폭력에 한껏 화가 나 있었다. “사실, 예수 운동이 기독교라는 종교로 집단화되며 권력을 거머쥐고 걸어온 길이란, 그야말로 집단적 무지, 폭력, 음모, 그리고 학살과 점령의 길을 걸어온 것 아닌가요?” “오늘 일부 교회와 개인들을 제외한 기독교회의 배타와 혐오, 교단들의 횡포는 그와 같은 기독교의 역사와 이어진 것이지 않은가요?” “계속해서 기독교를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 종교라 칭해도 되는 건가요?” “누군가는 좋은 것만 생각하고 말하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반성 없이 좋게 나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요?” 매우 강한 표현을 써서 말했을 뿐 아니라, 모두가 같은 답을 갖고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서사의 서사에 글을 보낸 나와 다른 나였다. 


잠시 침묵! 나는 다시 물었다. “왜요? 아닌가요?” 차분한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만은 없지요. 왜냐면 기독교에는 그야말로 다른 흐름이 있었고, 그런 개인들도 많았으니까요.” 순간 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의 앎, 거기에서 나온 말과 글, 그리고 삶의 불일치를 마주했다. 


내가 말한 기독교 안에 있고, 내가 말한 기독교와는 다른 결을 갖고 목회를 하는 분들이 내 앞에 있었다. 교회를 떠나있는 내가 구체적으로 마주하지 않는 막연한 대상인 교우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게, 현재 목회를 하면서 늘 마주하는 구체적인 대상 교우를 향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어떻게든 함께 생각을 바꿔가려는 분들의 마음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리고 만일 지금 내가 목회를 하고 있다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의 나와 같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나도 지금과는 달리 생각했을 것이다. “앎이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날 읽은 책을 나누고 한 분이 던진 이 물음이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다시 묻는다. “삶까지의 시간과 거리는 얼마나 되는 걸까?”


과연 집에 돌아와 아르나우의 성전 속편 땅의 상속자들 8부작을 시청하니, 모임에서 나눴던 이야기 때문인지 다시 보이는 게 있었다. 학살과 점령이라는 기독교 세계 안에 오직 사랑과 선한 양심의 아름다운 기독교 정신으로 모진 삶을 이어가며 살아간 사람들! 그렇게 거대한 물결 안에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가슴 시리게 고통스러우며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들! 드라마는 어쩌면 내가 분노한 기독교의 폭력성이 아닌, 그 안의 드러나지 않는 고통스럽게 아름다운 사랑의 여정을 밟아나가는 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독서 모임에서는 읽은 책에서 언급된, 앎에서 삶으로 간 사람들, 믿음의 모범이 되었던 전태일과 유물론자로서 예수의 길을 걸어가기로 한 서준식 이야기와 그들이 남긴 책 이야기가 있었다. 책이 책을 부르고 여전히 앎에 머물러 있는 나는 다시 책으로 간다. 전태일의 일기와 수기, 편지를 모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와 인권운동가 서준식의 《서준식 옥중서한이다.

전태일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이유에서일지 모르겠으나 그의 삶의 동기가 된 기독교 신앙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전태일 평전만 읽더라도 그의 신앙은 충분히 드러나는데, 그의 신앙이 은폐될 수 있다는 사실은 좀 의아하다. 그의 삶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절판이다. 중고책으로 네 권 정도 있었다. 1988년 돌베개에서 발행한 중고책이 23,000원에서 108,000원까지 네 권 올라와 있었다. 23,000원에 배송비 3,000원을 얹어 26,000원으로 제일 저렴한 책으로 결제를 마쳤다. 그리고 읽지 않은 채 책상에 모셔진 서준식의 《서준식 옥중서한(야간비행)을 찾아냈다. 얼마 동안 이 두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두 책이 나를 어느 만큼 삶으로 데려가줄 수 있을지. 


앎에서 삶까지의 거리가 시간이 멀지만, 여전히 책의 힘을 믿는다. 책은 나를 무지에서 앎으로 이끌어왔고, 아주 더딜지라도 삶으로 이끌어주리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앎이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누군가는 읽고 알려야 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기록하고, 누군가는 그 기록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알리고 변하든지, 변하고 알릴 것이다.


서사의 서사〉를 읽으며 알게 된 전후 민주주의자이면서 장애인의 아버지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개인적인 체험(을유문화사)을 빌려온 게 4월 27일.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일주일 넘겼을 때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기로부터 도망치다가 마침내 받아들이기까지의 청년 아빠의 갈등과 고뇌, 그리고 탈선,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자신의 자리.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작품이다. 자녀의 장애, 가족의 장애, 그리고 본인의 장애. 혹은 선천적인 장애, 후천적 장애를 회피할 수밖에 없지만, 마침내 정면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철저한 고립무원의 시간과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할 수 있겠지만) 이해하려는, 이해할 수 있는 게, 그래서 길가에 이미 죽어있는 작디작은 참새조차 밟지 않으려고 차를 돌리며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게 ‘사람다움’이라고 책을 읽으며 확인한다.


막심 고리끼가 그의 작품 《어머니에서 어머니를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해석했다면, 어쩌면 오에 겐자부로 역시 독자가 모든 장애인의 아버지로 재해석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렇게 책을 읽음으로, 내가 몰랐던 세계를 만나며, 과거 《전태일 평전을 읽고, 또는 《의자놀이(휴머니스트) 등을 읽고,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읽으며 노동자의 어머니에게로 내 삶(아직은 정신과 마음)의 방향을 바꿔왔듯, 또 이제까지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혹은 유쾌한 장애인의 삶을 그린 책들을, 혹은 인간중심주의를 살아가는 시대에 비인간들의 편이 되어가는 중일지 모른다.

여전히 어떤 누군가는 사건을 사고로 만들어 철저히 기억을 지우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울한 주검을 지우고 덧칠하는 노력에 맞서, 진실을 기록하고, 책을 만들고, 읽는 이들이 있는 , 책이 우리의 무지를 앎으로 이끌고, 아직은 앎에 서성거리는 같은 사람들을 조금씩 삶으로 인도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읽는다. 앎이 삶이 되는 날까지!


조희선

은퇴  《이 정도면 충분한》과 《몸을 돌아보는 시간》을 썼고, 책과 영화 드라마로 세상을 보며 나와 우리들의 삶을 일기로 쓰면서 지낸다. 아내로, 엄마로, 할머니로 살며 누군가의 이웃이   있기를 원하지만, ~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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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강동석 | 일러스트 이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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