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나무와 흑연의 향기, 종이 위에 스치는 서걱거림, 공들인 시간만큼 조금씩 닳아가는 그 감각. 그러나 연필에게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쉽게 뭉툭해진다는 것.
끝까지 샤프할 수 없다는 것.
이름처럼 샤프한 샤프의 등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샤프의 선택권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누군가 인생 샤프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제도 샤프’를 떠올린다. 까맣고 가벼운 바디, 얇고 정밀한 파이프. 그 시절 제도 샤프는 필통 속을 점령한 국민 필기구였다. 사실 제도 샤프는 일본 펜텔사 P205의 복제품이었지만, 나는 진품을 써본 적이 없었다. 비교대상이 없었기에 배신감도 없었다. 국산 제도 샤프 한 자루가 전부였다.
그런데 왜 하필 ‘제도’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제도 샤프, 그러니까 제도용 샤프란 자를 대고 정밀한 선을 그어야 하는 설계사나 건축가를 위해 촉을 길게 만든 샤프를 말한다. 정밀함을 강조하려는 마케팅의 한수였을까. 의도가 무엇이든 천 원으로 건축가의 정밀함을 살 수 있음에 홀렸다. 나는 그 가짜 도구를 쥐고 진짜 미래를 꿈꾸었다. 제도 샤프로 수많은 깜지를 써내려갔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도 샤프는 깜지 쓰기에 최적화된 도구다.
연필처럼 금세 뭉툭해져서 경계가 흐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