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몬? 칼몬이 뭐지? 여기 채소 이름인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시키자. 그릭 플래터니까 대충 그리스식 백반 나오겠지.’ 짐작과 달리 칼몬은 살몬이었다. S가 들어갈 자리에 C를 넣은 초라 레스토랑은 우붓 중심가에서 살짝 떨어진 뒷골목, 비수마 거리에서 보기 드문 지중해식 다이닝으로 메뉴판에 저런 오타가 있으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고급스러움이 넘치는)를 자랑하는 곳이다.
연어를 못 먹는데 칼몬이 살몬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배고픈’ 나는… 아주 잠깐 그 연어를 손으로 짚어서 식당 주인이 정원 안에 풀어놓은 거위 떼에게 던져버리는 상상을 했다. 매니저를 소환해서 “지금 나랑 장난하니? 음식 핵심 재료 설명에 이런 오타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 연어 알레르기라도 있었으면 어쩔 거야. 무슨 일 생기면 너희가 책임질 거야?” 하는 상상도. 그렇게 따질 수 있는 성질머리가 유전자 정보에 깊숙이 새겨진 다혈질 집안의 장손이지만, 평소의 나답지 않게, 정말 놀랍게도 조용히, 접시를 비웠다. 그냥 주는 대로 먹자. 연어는 슬쩍 걷어내고 채소와 빵 쪼가리에 밴 냄새는 모히토에 꽂힌 라임으로 덮지 뭐. 이런 건 정말이지 흔치 않은 일이다. 나, 발리에서 너그러운 인간으로 갱생했나?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음식 가격에 거기에 붙는 세금까지- 만만치 않은 숫자였기 때문에 부아는 났지만, 돌을 던지고 싶진 않았다. 모처럼 분보단 흥이, 짜증보단 온유한 마음이 더 많은 나날. ‘칼몬’이 뭐냐고 물어보지도 않은 내 잘못이지, 뭐. 오타는 나도 내잖아?
발리에서 거의 매사 이런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계획했던 일이 종종 어그러지는데, 이 레스토랑도 14분 거리에 있는 ‘싸고 맛 좋은’ 발리식 백반집을 가려다 머리 가죽을 태울 기세로 내리쬐는 햇볕을 이기지 못하고 피신해 들어온 곳이다. 분명히 A를 시켰는데 천연덕스럽게 B가 나오고, 가격을 뻔히 아는 채로 물어본 물건에 4배나 더 붙여 파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애쓰지 않아도 절로 풀이 꺾인다. 여기가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인도(알다시피 여행자의 성한 멘탈을 제대로 털어버리는 악명 높은 나라다.)인가? 하면서, 그냥 너털웃음 한 번 짓고 마는 게 제일 속 편하다.
서울에선 싸움닭처럼 벼슬을 바짝 세우던 인간이, 총명함 바깥에 어리바리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던 종자가 너털웃음 어쩌구 거리는 건 나도 딱히 잘하는 게 없어서. 발리에서 아주 자주 ‘내가 이렇게까지 야무진 틈 하나 없는 허술한 인간이었나를 절감하고 있는데, 그냥 항복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혼자 와서 그런 거지 뭐. 나이도 잔뜩 먹었는데 뇌가 예전처럼 굴러가겠어? 나도 이 동네가 처음이잖아.’
‘비효율은 곧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고 여기는 세계에 있다가 효율, 가성비와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더 편하다. 아무도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느슨한 하루를 보내는지 알 방법이 없는 것에 뜻밖의 해방감도 느낀다. 누군가에겐 ‘무신경하고 성의 없이 보내는 멍청한 하루’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힘 잔뜩 들어간 몸과 마음에서 검은 피를 쑥, 뽑아내는 시간. 그래서 한 번도 자발적으로 해본 적 없는 온유하고 넉살 좋은 말들을 스스로 성수처럼 퍼붓고 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나한텐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