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뇌심혈관계질환의 업무상질병 인정기준부터 짚고 넘어가보죠
장시간노동이 뇌심혈관계질환의 발생위험을 증가시킨다는 역학적 증거는 충분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업무상질병을 판단하기 위한 과로의 노동시간기준도 이미 확립되었죠.
숫자로 말한다면..
64시간, 60시간, 52시간, 30%
뇌심혈관계질환이 발생하였을 때 다음 4가지 조건 중 하나를 만족하면 업무상질병으로 봅니다.
발병전 4주간 평균 64시간 초과
발병전 12주간 평균 60시간 초과
발병전 12주간 평균 52시간 초과하면서, 가중요인이 있었을 때
발병전 1주간 노동시간 또는 업무량이 그 이전 12주간 평균보다 30%이상 증가하였을 때
가중요인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면..
주 52시간제는 어디서 나온 건가요?
근로기준법 제50조에서는 근로시간을 1주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고, 1일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휴게시간은 근로시간이 아니며(X), 대기시간은 근로시간이다(O)라는 원칙이 제시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3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1. 탄력적 근로시간제(제51조): 평균 주 40시간을 유지하면서, 특정한 시기에 일 12시간, 주 52시간까지 근무
2. 선택적 근로시간제(제52조): 출퇴근 시간을 근로자가 선택하도록 함
3. 연장근로의 제한(제53조): 연장근로를 할 수 있지만, 일 12시간, 주 52시간까지로 제한
*취업규칙,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 당사자합의와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2021년 7월에 5인 이상 사업장에서도 전면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기존 68시간에서 주당 52시간으로 연장근로시간을 제한하여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동시에 노동시간 유연화 패키지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문제점을 보완한 것입니다.
'주 69시간'은 어떻게 나온건가요?
윤석열 정부에서는 노동개혁의 과제로 이 '52시간'을 개편하겠다고 선언했죠. 어떤 의도였을까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탄력근로와 연장근로의 단위를 기존의 '주'단위에서 '월'이나 '반기' 같은 더 큰 단위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노동시간 유연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죠. 그러자 노동계에서 반발이 나옵니다. '월단위로 유연근무제를 도입하여 월 최대 연장근로 52시간을 한 주에 몰아서 쓴다면, 주당 주 92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다'고 예를 들어 비판했죠.
이에 대해 정부는 근로기준법에 나온 3가지 휴식, 휴게, 휴가 규정은 지켜질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1) 퇴근 후 다음 출근까지 11시간의 휴식시간
2) 근무시간 4시간당 30분씩 휴게시간
3) 1주일마다 1일의 유급휴가
이제 어떻게 69시간이 되는지 계산해볼까요?
11.5시간* X 6 = 69 시간
(*24시간에서 연속휴식 11시간을 빼고, 법정 휴게시간 1시간 30분을 제외)
그래서 69시간은 유연화로 초래되는 연장근로의 상한선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주 69시간'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부정적인 여론이 우세했습니다. 연장근로는 근로자보다는 사업주가 원해서 하는 경우가 많죠. 근로자는 함께 일하는 처지에 회사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겁니다. 연차휴가의 자율적 선택권을 누리기 어렵게 만드는 외부 조건도 많습니다. 아마 고용노동부 공무원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가운데 '주 69시간 노동 적극 찬성하며 우리가 먼저 도입하겠다'고 나선 단체가 있었습니다. 어디였나고요? 대한전공의협의회였습니다. 전공의는 전공의법에 따라 주 80시간(교육목적 8시간 추가가능)의 장시간 근로가 허용된 직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로기준법 상 근로시간 기준을 적용받지 못하는 특례업종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5번째로 보건업도 있군요
근로기준법 제59조(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의 특례업종
1.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 운송업 (노선여객자동차운송사업은 제외) 2. 수상운송업 3. 항공운송업 4. 기타 운송관련 서비스업 5. 보건업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노동의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심화되고 있는데, '노동조합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에 관한 논쟁이 얼마나 한가한 소리인가?'라며 한탄합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법정근로시간(1일 8시간, 1주 40시간)의 제한과 연장근로시간(1주 12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죠, 노동시간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노동의 양극화였습니다.
그렇다면, 정부의 안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원래 근로기준법 상 노동시간을 이해하는 것은 그 복잡성 때문에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의 노동시간 개혁안은 더 복잡합니다. 그래서 '노동시간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라는 말이 나옵니다. 큰 틀에서 보면 고용노동부의 노동시간 개혁안은 '노동시간단축'과 '노동유연화'라는 기존 정책의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이번 개편안도 탄력근로의 단위를 월, 3개월, 반기, 년으로 다양화하여 노동을 유연화하는 대신, 단위기간이 길수록 연장근로의 한계를 줄여서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그런데, 아직 디테일이 확정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연장근로시간 한도, 건강권 보호를 위한 방안, 당사자의 선택권, 휴가보장을 위한 대책 등을 확정하지 못한 채 의견수렴 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격언을 알고 있죠. "The devil is in the detail"
이 혼란, 누구의 책임입니까?
'노동유연화'는 노-사간의 다양한 이해와 얽혀 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중요합니다. 과로사와 같은 비극이 증가하지 않도록 건강권 차원에서의 고려도 필요합니다. 노동유연화는 잘 설계된다면 기업과 근로자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기업은 단기적 인력난을 개선할 수 있고, 근로자에게는 가정-직장 균형에도 도움이 될 수 있죠. 반면, 건강권의 악화, 실질소득감소, 과로와 삶이 균형 파괴에 대한 우려도 큽니다. 산업별, 성별, 연령별 효과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다룰 때 디테일한 정책설계와 이해당사자간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십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적 태도를 보여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무너뜨렸고, 급하게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디테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분간 답답한 상황이 지속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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