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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5 캠핑이 좋아서 27 | 박찬은
해발 810m 위에서 자본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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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살아 보니, 사는 게 참 쉽습니다.
고마우면 고맙다 하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되더라고요.
사랑하면 '사랑해'라고 하면 되고요.
그런데 살아 보니, 또 이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아요.
새해에는 쉬운 일은 조금 어렵게, 어려운 일은 조금 쉽게 하며 살려고 합니다.
올 한 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론 앤 어라운드〉를 사랑해 주신 구독자분들,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노르웨이에서는 고래의 꼬리를 보면 행운이 온다고 합니다.
내년엔 더 행복할 거예요.
_ 〈얼론 앤 어라운드〉 최갑수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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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박찬은 작가의 '캠핑이 좋아서'를 보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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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핑이 좋아서 27 | 박찬은
해발 810m 위에서 자본 적 있습니까
‘나 지금 등산 중!’ 오십이 훌쩍 넘은 큰 언니가 캐나다 엄홍길이 되어 가고 있다. 퇴직 후 등산 클럽에 가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불과 3개월 전인데 메신저 프로필에 하나둘, 등산 사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산악 스키까지 착용하고 설산 위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지 뭐. 캐나다에 이렇게 좋은 데가 많은데 모르고 살았잖니.” 스위스를 100개 합쳐 놓은 듯하다는 캐나다 로키산맥 앞에 선 그녀의 사진을 보니 내 생애 첫 등산 백패킹이 떠올랐다.
“야, 등산 캠핑? 못해, 못해.” 등산도 힘들고 백패킹도 힘든데 그걸 합친 건 끔찍한 혼종 같았다. 게다가 10킬로그램이 넘는 박배낭을 메고 해발 800미터 겨울 산을 오르다니. 당시 캠핑 메이트였던 최 대장이 전남 화순 백아산 백패킹으로 초대를 했지만 보드를 타다 다친 무릎의 통증과 상습적으로 접질리던 발목이 생각났다. “살면서 사지는 다 늘어나겠지만 벽에 똥칠하실 때까지 사실 거예요”라던 한의사의 말처럼 내게 그간 큰 병은 없었지만 인대만큼은 착실히도 늘어났다. 등산화 끈을 묶다가도, 쉘터 팩을 뽑다가도, 구이바다를 들다가도 ‘이 느낌 익숙하지?’라며 비웃듯. 게다가 백아산은 빨치산이 숨어들 정도로 산세가 깊고 험하다는데 과연 이 하찮은 몸뚱이로? 침대에서 편히 자도 아플 나이에 말이다. 최 대장은 그런 내게 연거푸 달콤한 제안을 날렸다. “에이, 누나! 2시간이면 가요. 스틱 짚고 천천히 가면 돼요. 짐 좀 나눠 들던가, 힘들면 내가 뒤에서 밀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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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최대한 배낭을 가볍게 꾸려보기로 한다. 동계 캠핑에선 침낭이든 옷이든 매트든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30퍼센트 이상은 늘어나는 법. 게다가 난 배낭이 커지면 그 크기에 맞춰 장비를 늘리는 쭉쭉이 스타일이라, 동계 배낭은 언제나 돌덩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의 최애템이라 해도, 등산 백패킹에선 결국 그걸 빼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몇 번이나 장바구니에 넣었다 빼다 하던 떡볶이 대신 동결 건조 라면으로 식량을 대체하고, 무거운 맥주와 와인 대신 오늘은 플라스크에 위스키만 소량 담았다. 그럼에도 동계침낭과 에어매트, 텐트 등을 넣은 배낭 무게는 하계의 2배인 16킬로그램에 달했다. 등산객들이 하산할 때쯤, 발목 테이핑과 무릎 보호대를 한 채 결연한 마음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 두자/오랫동안 못 볼 지 몰라’(정인 ‘오르막길’) 키에르케고르는 “걸으면서 떨쳐버릴 수 없는 무거운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무거운 배낭은 오히려 생각 회로 자체를 차단했다. 분명 내 살림살이는 배낭 하나에 불과한데, 왜 때문에 자루에 아파트를 집어넣은 채 올라가는 것 같지? 허벅지는 터질 듯하고, 들리는 건 내 숨소리뿐이다. 한 개씩 오를 때마다 수명이 1분씩 단축되는 듯한, 도착점이 보이지 않는 악마의 돌계단은 겨우 모은 가냘픈 사기를 빠른 속도로 떨어뜨렸다. 다 왔나 싶을 때쯤 다시 등장하는 오르막길은 영원히 고통받는 시지프스의 바위를 연상시켰다. 침착하게 등산 스틱을 위쪽 바위에 올리고 그 힘을 뒷무릎에 실어 배낭과 몸을 끌어 올린다. 최 대장은 앞뒤에서 함께 걸으며 페이스를 조절해 주었고, 눈치 보지 않고 쉬자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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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배낭을 메고 오르는 겨울 산은 1시간 반의 산행을 3시간으로 늘렸지만, 어쨌든 난 백아산 마당바위에 도착했다. 등반을 했다기보다, 중력에 충실한 16킬로그램의 배낭을 땅으로부터 힘겹게 떼어내며 구르듯 올라갔던 것 같다. 알베르 까뮈의 ‘실존’을 떠올리며. 신에게 도전한 인간에 대한 무한 형벌이 아니라 도전 자체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 충분하다는 자각. 정상에 오르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시지프스의 돌덩이와는 다르게, 나의 배낭은 마당바위에 무사히 안착, 운해가 펼쳐진 산군 앞에서 좋은 촬영 오브제가 되어 주었다. 희끗희끗한 바위들이 마치 흰 거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백아산(白鵝山)은 눈이 아직 녹지 않아 그 이름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당바위에 올라서니 멀리 무등산과 모후산이 보였다. 북서쪽으로는 바위 무리가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백아산자연휴양림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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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에 텐트를 친 후 내 행복 버튼 중 하나인 ‘면 먹방’을 시작해본다. 등산 후 야외에서 먹는 라면만큼 빠른 멘탈 케어는 없다. 라면 스프는 다른 부 재료들을 윽박지르는 법 없이 골고루 MSG 층을 코팅했고, 해발 800m 위의 매서운 추위는 버번위스키의 알싸함으로 달랠 수 있었다. 일몰을 배경으로 역광 사진을 찍어본다. 커플은 지는 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싱글들은 서로에게 똥침 장풍을 쏜다. 저녁에는 둘러앉아 한층 가까워진 사람들과 함께 지상에서보다 한층 가까워진 별을 보았다. 침낭 안에 핫팩을 터뜨리고, 끓인 물을 넣은 물통을 끌어안은 채 꿀잠을 잤다. 동이 터오는 새벽, 텐트 문만 열었을 때, 운해가 내 발밑에 닿을 듯 넘실대자 어제의 등반 피로는 잊은 채 주절댄다. ‘아 오길 잘했다’. 16킬로그램 박배낭 메고 오르는 캠핑은 쉽진 않았지만 이겨낼 만했고, 건강하고 밝은 일행들이 전해주는 기분 좋은 안정감은 늘 다치던 무릎과 발목 부상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내 주었다.
작은 성취 신호들이 모이면 몸과 마음이 부대끼는 상황에 놓였을 때 회복 탄력성을 높여준다. 백아산 백패킹은 그 뒤로 이어진 민둥산 갈대밭 캠핑, 선자령 눈꽃 캠핑, 울릉도 나리분지 캠핑 등 등반이 필요한 백패킹에 어려움 없이 도전하게 만든 첫 스타트가 되어 줬다. 물론 박배낭 등산은 여전히 할 때마다 ‘안녕, 고마웠고 다신 보지 말자’라고 하고 싶지만. 고급 글램핑장에서의 캠핑이 돈 많고 옷도 잘 입었지만 재미는 없는 대기업 소개팅남 같다면, 겨울 산 백패킹은 마라맛 데이트 코스를 짜오는 운동선수와의 다이내믹한 데이트 같았다. 자, 다음 백패킹은 어디로 가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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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은은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캠핑과 스쿠버다이빙, 술을 사랑한다. 삐걱대는 무릎으로 오늘도 엎치락뒤치락 캠핑과 씨름하며 퇴사 욕구를 잠재우는 중이다. 그의 캠핑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camping_cs을 따라가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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