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15일, 보름달이 뜨는 날 책편지가 도착합니다.
님은 제목 때문에 책을 산 적이 있나요. (저는 자주 그럽니다.) 책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고민과 선택의 연속입니다만, 제목은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기본이자 최우선의 마케팅이라 매우 신중해져요. 책의 내용과 의미를 대변하면서도 독자가 모르고 있던 니즈를 일깨워주고, 트렌디하면서도 참신해서 눈길이 머무는 제목...! 적고 보니 우리는 신기루를 쫓는 건가 싶어졌습니다만...! 이렇듯 마음의 부담이 크다 보니 제목의 늪에 빠져 후보들을 늘어놓고 사내 투표도 해보고, 회사 밖에서 '오염되지 않은 눈'을 찾아 물어보기도 합니다. 제목을 짓는 스타일은 분야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져요. 책을 스윽- 한 바퀴 돌려보기만 해도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표 1234에 제목, 부제, 추천사, 프롤로그, 카피 등 핵심을 모두 압축하여 담아야 하는 책이 있고, 긴 말보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한 줄이 필요한 책이 있지요. 종이책이라는 물성만 동일할 뿐이지, 늘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답니다.
물론, 비교적 수월하게 결정되는 책도 있습니다. 이화여대 인기 교양강좌 '여성과 미술'을 책으로 엮은 《불편한 시선》은 초고의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남들 다 좋다는 그림 앞에서 어째서 왜 내 마음이 불편했는지, 위화감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조목조목 요소요소 들여다보는 책이라 이견이 없었지요. 그런데! 위기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등장했습니다. 제목 '불편한 시선'과 부제의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불편한 진실'에서 '불편한'이 반복되더라고요. 아, 동어 반복은 되도록이면 피하거늘. 디자인 의뢰를 앞두고 '불편한' 대신 '알지 못했던', '외면해왔던' 꽤 많은 유의어들이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이만한 제목과 부제가 없다!는 편집자와 작가님의 확신으로 님이 보고 계신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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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선뜻 떠오르지 않을까?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누드라면 왜 미술관에는 여성의 누드 작품만이 이렇게 많을까? 신화와 종교 이야기, 역사 속에서 남성을 유혹해서 파멸시키는 여성들이 어느 시대에 한꺼번에 소환되어 나온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심지어 영웅적인 여성조차도 이런 파멸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인이 자연스럽게 그려져 온 역사를 우리는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 중략 …)
명백히 소아 성애를 담은 작품들을 우리가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은 정당한가? 남성 노인은 기품 있게 그려지는 반면, 늙은 여성의 모습이 추악하고 사악하게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질문들을 한 줄 한 줄 읽어보세요. 왜 나는 이런 의문을 가지지 못했을까. 어쩌면 '내가 오버했다' 싶어서 감정조차 서둘러 지워버렸던 것 같아요. 이건 교양이니까요. 남성 화가에 비해 회자되는 위대한 여성 화가가 없다는 것이 진짜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닐 겁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꾸준히 돌을 던진 여성화가들, 수잔 발라동, 프리다 칼로,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박영숙 작가의 미친년 프로젝트까지 캔버스를 찢고 화가들 덕분에 조금씩 우리의 출발선은 조금씩 맞춰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듭니다. 우리에겐 '불편한 시선'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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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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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두 작품은 프랑스 국가공모전인 '살롱전' 출품작입니다. 한 작품은 대상의 영예를 거머쥐고, 나폴레옹 3세의 컬렉션이 되었으며 국립 미술학교의 교수 타이틀까지 얻었지요. 네, 대상은 바로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이었습니다. 반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상은 커녕 오히려 (남성)(부르주아) 관객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아름답지도 않은, 장신구*를 잔뜩 달고 있는 여성이 눈을 똑바로 뜨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요. 기존의 누드 작품들은 수줍은 듯, 정면이 아닌 곳을 응시하거나 앞을 보더라도 유혹하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전시 내내 나를 쫓아다니는 듯한 저 심드렁한 시선. 당시만 해도 여성은 자유롭게 외출이 가능하지도 않은 시기라** 관람의 주체였던 남성들은 은밀한 관음증에 찬물을 끼얹는 <올랭피아>를 보고 반감을 가졌습니다.***
<올랭피아>의 실제 모델은 화가, 빅토린 뫼랑입니다. 외간 남성 앞에서 옷을 벗기도 하고 애인 노릇도 해주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당시 화가의 모델들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는데요, 빅토린 뫼랑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어요. 다만, 뫼랑은 살롱전에서 수차례 입선한 경력이 있는 전문 화가이기도 했고, 마네가 낙선한 때에도 뫼랑은 당선되어 작품을 전시한 적도 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어요. 지금은 화가로서의 뫼랑은 없어지고 '올랭피아'만 남았지만, 불문율처럼 이어지던 시선의 역전을 이루고 현대 미술의 흐름을 뒤바꾸는 계기가 된 작품으로서 소개해 봅니다.
* 특히 목에 두른 벨벳 초크는 당시에 몸을 파는 매춘 여성이나 무희가 즐겨 사용하는 액세서리였다고 해요.
** 동물 그림의 대가 로자 보뇌르가 마시장이나 우시장에 스케치를 가기 위해 바지를 입는 것도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기였으니 말 다 했지요.
*** 들고 있던 지팡이, 우산으로 작품을 훼손하려고 했다고 전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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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세기의 명작이 태어나기까지, 남성 캔버스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 |
📚 그림 속 별자리 신화
선과 악, 성과 사랑, 욕망과 이성이 뒤얽힌 어른을 위한 그리스 로마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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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천문학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위대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 여성 거장 21인의 삶과 철학을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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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핀란드의 뭉크'로 불리는 북유럽 대표 화가 헬렌 쉐르벡의 삶. |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 슬프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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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너 필링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겪는 인종차별과,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소수적 감정'. |
📚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여성의 관점으로 보는 과학, 그리고 과학의 관점에서 여성을 이해하려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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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며 또 읽으며 얻은 영감들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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