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캐나다에서 온 편지] 이번 레터는 육아휴직 중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우님이 보냅니다. 아이들을 새로운 환경에 던져두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알아서 적응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었는지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혹시 님께서 외국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만한 팁을 알고 계시다면 꼭 의견을 남겨주세요.

스키를 처음 타본 게 언제였더라? 내 기억이 맞는다면 중학교 스키 캠프였을 것이다. 개인 장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개인 교습은 더더욱 아니어서 난장판이었던 기억이다. 이미 스키를 타본 적이 있던 아이들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고 나처럼 생전 처음 부츠를 신고 스키라는 장비를 결합한 아이들은 슬로프 아래에 모여 넘어지기 연습부터 했다. 아침에는 네발,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 느닷없이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시 네발로 걸었다. 그나마도 앞뒤로 걷는 게 아니라 좌우로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는 꼴이라니. 스키 앞부분을 모아 A자 모양을 만들어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으면서 방향을 바꾸는 연습을 했다. 마지막엔 S자로 내려오는 걸 배우고 캠프가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자주는 아니지만 어설프게 배운 스키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대학생이 돼서 중학교 스키 캠프를 같이 갔던 같은 반 친구와 큰맘 먹고 몇 차례 둘이 당일치기로 스키장을 다녀왔다. 가족들과도 겨울에 몇 번 스키 리조트를 다녀왔다. 그런데 웬걸. 스키가 조금 익숙해지자 스노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배운 스키를 접고 새로운 탈 것을 시도해볼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지팡이도 없이 두 발을 판때기 하나에 묶어두다니 이건 새로운 차원의 퇴화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왠지 멋진 퇴화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기어이 두 발을 보드에 묶어 다시 넘어지는 연습부터 했다. 그러고 나서 앞을 보고 살금살금 미끄러져 내려오는 연습. 옆으로 서 보드의 양날을 사용해 S자를 그리면서 내려오는 연습. 하도 많이 넘어져서 보드를 타는 연습이라기보다 보드에서 넘어지는 연습에 가까웠다.

괜히 스노보드를 배우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스키를 재미있게 타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가지 기술을 장착한 다음에 유사한 영역의 새로운 기술을 배운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나에게는 기술적인 난이도뿐만 아니라 못하는 걸 하느라 잘하는 걸 못 하게 되는 상황이 버거웠다. 스노보드는 몇 번 더 타보고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그게 나한테 합리적이었다.

점심시간에 아이들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둘째 아이가 아픈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밥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있단다. 데려가라는 소리구나 싶어 30분 안에 가겠다고 했다. 안 그래도 막내부터 시작된 감기가 온 가족으로 옮아가는 중이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둘째 아이는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아차 싶었는지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약간 있었다. 학교에 온 김에 첫째와 셋째도 같이 데리고 갈 수 있냐고 물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둘째와 학교를 나와 차에 올랐다. 운동장 쪽을 보니 셋째네 반 쉬는 시간인가보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의 아이만 빼고.

셋째는 운동장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발뒤꿈치로 흙바닥을 차고 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힐끔 볼 뿐 관심을 주지 않는 듯했다. 차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둘째에게 물었다. 동생이 원래 쉬는 시간에 저렇게 혼자 있냐고. 둘째 말로는 첫 번째 쉬는 시간은 둘째와 셋째가 겹쳐서 같이 놀고 두 번째 쉬는 시간은 첫째와 셋째가 겹쳐서 그렇게 짝을 지어 논다고 했다. 첫째는 보이지 않았다. 셋째는 세 아이 중 그나마 캐나다에 오기 전 영어유치원을 다만 몇 달이라도 다녀봤고 친구들과 같이 노는 걸 워낙 좋아하는 아이였기에 나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셋째조차 아이들과 어울리기 힘들다면 형들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결국 다음날 둘째는 고열로 인해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어 첫째와 셋째만 데리고 학교로 향했다. 첫째는 둘째는 집에 있고 본인은 학교에 가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학교 근처에 도착했지만 첫째는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참고로 통학버스는 파업으로 인해 당분간 운행하지 않는다). 아이는 아프다고 학교에 못 가겠다고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아이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보고 열이 안 나니까 괜찮다고 기어이 학교로 들여보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첫째는 엄마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한참이 지나 첫째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아내는 많이 어두워진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아이가 한참을 하소연했다고 한다. 학교에 가면 전부 모르는 말이라 혼자 앉아있기 일쑤이고 내가 여기에 왜 있나 싶단다. 하루에 세 번 정도는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대부분은 참지만 실제로 운 적도 있단다. 오늘 아침에도 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혹시 학교에 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잠깐 희망을 품었었단다. 그리고 정말 몸 마디마디가 다 아팠단다.

그러고 보니 첫째는 요새 도시락을 거의 먹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온 날들이 많았다. 얼마 전엔 숙제를 도와준다고 본 지문에서 나도 처음 보는 herbivore (초식동물), carnivore (육식동물), omnivore (잡식동물) 같은 단어들이 있었다. 알파벳도 따로 배운 적 없는 아이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지문이었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자책했다. 이마에 손바닥 한 번 갖다 대보고 괜찮다며 슬로프에 아이들을 던져놓았다. 발밑에는 생소한 보드가 묶여있고 앞에는 육식, 초식, 잡식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슬로프에. 스스로 알아서 배우겠거니 넘어지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고. 아내와 오랜만에 아이들 교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냈고 아내는 곧바로 행동에 옮겨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대화 스크립트가 준비되어야 간신히 통화버튼을 누르는 나와 달리 아내는 바로바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했다. 든든했다.

방과 후에 아이들과 도서관에 갈 것이다. 가장 쉬운 어린이 동화책으로 알파벳 하나, 단어 하나 차근차근 함께 읽을 것이다. 동네 스포츠센터에 아이들을 위한 수업도 몇 가지 알아봐서 아이들이 몸을 쓰면서 놀 수 있는 시간을 만들 것이다. 날씨가 너무 춥지 않은 날에는 첫째 아이와 동네를 한 바퀴 뛸 생각이다. 유일하게 뛰는 걸 좋아하거니와 둘만의 시간도 필요하니까. 그리고 되도록 많은 학교 행사에 학부모 자원봉사로 참가할 생각이다. 학교 선생님에게는 수업자료를 공유해줄 수 있는지 물어봐서 아이들과 복습해볼까 한다.

며칠 뒤 첫째 아이의 감기가 드디어 나에게도 옮았다. 몸살기에 몸은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목은 부어서 침을 삼키는 것도 고통스럽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열은 나지 않는다. 이 감기가 지나가면 올겨울에는 아이들과 실제 스키장도 한 번 가볼 생각이다. 힘들다고 말해준 아이들이 고맙다. 엄마, 아빠가 너희에게 더 든든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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