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뒤, 아버지와 함께 노바스코샤 록포트에 있는 할머니 집을 찾았다. 록포트는 남쪽 해안가에 있는, 인구 500명이 전부인 작은 어촌 마을이다. 항구의 길쭉한 부두에는 크리스마스 전구 같은 색을 가진 고기잡이배들이 일렬로 매여 있다. 닳아빠진 노란색, 빛 바랜 빨간색, 다양한 색조의 푸른색. 사진엽서에 등장할 법한 전형적인 노바스코샤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 고향에서 캐나다 데이라고 부르는 공휴일인 7월 1일이면 나를 데리고 록포트에 갔다. 7월 4일 독립기념일과 비슷하지만,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걸 기념한다기보다 ‘캐나다의 탄생일’에 가까운 날이었다. 노바스코샤에서 백인 어린이로 살았던 나는 이 나라의 역사를 전혀 몰랐다. 집단학살의 뿌리, 체계적 인종주의, 인종분리가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자리 잡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나에게 캐나다 데이는 그저 불꽃놀이와 퍼레이드가 열리는 날, 교회 지하실에서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는 날일 뿐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한 행사는 ‘기름 막대’였다. 부두에서 바다 위로 길고 가느다란 통나무를 눕혀 놓는다. 통나무 아래는 깊은 바다다. 단단한 통나무에는 빈틈없이 라드를 발라두고, 바다 위로 뻗어 있는 끝부분에는 라드 덩어리로 지폐 무더기를 붙여 놓는데, 참가자들은 그 돈을 손에 넣는 데 도전하는 것이다. 전략이랄 것은 두 가지가 전부다. 첫 번째는 통나무에 배를 댜고 천천히 조금씩 전진하는 것이다. 보통 이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필승법은 최대한의 속도로 통나무 위로 쭉 미끄러져 나간 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대서양으로 풍덩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많은 지폐를 쓸어 떨어뜨리는 것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뒤 추위로 덜덜 떨면서 바다에 떨어진 지폐를 그러모은다. 머리 위를 맴돌던 갈매기들은 물에 떠다니는 라드를 노리며 하강한다. 물론 나는 참가한 적 없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에 쭉 살고 있었다. 방이 세 개, 외장재는 흰색인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집 뒤로는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페이지 상점’이라는 잡화점이 있었다. 가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이름이 무엇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주유기를 들여 놓았다는 건 알지만.
2층의 침실들은 벽장을 통해 옆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벽장 속으로 탈출해 꼭 내 몸에 맞게 설계된 것 같은 조그만 문을 통해 상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알전구에 달린 줄을 당기면 빛이 내가 모아 둔 보물들을 비추었다. 영화 같은 일이었다. 나는 보석상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상자 속에 든 총탄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작디작은 물건이 숲속을 뛰어다니는 수사슴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매혹되었다. 쏜살같이 달리는 금욕적인 몸은 고작 이토록 조그만 총탄 하나에 쓰러지기에는 지나치게 장엄해 보였으니까.
“데니스, 엘런이 다이크라면 어떡할 거냐?” 모두가 일광욕실에 앉아 있을 때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인종차별적인 말을 할 때와 꼭 같이 날카로웠다. 얼래니스 모리셋의 아이러니를 빌리자면, 갓 태어난 내게 발과 귀가 무지개색인 곰인형을 선물한 바로 그 할머니가 그런말을 한 것이다. 나는 열여섯 살이었고 얼마 전 영화 촬영을 위해 머리를 삭발한 채였다. 텔레비전에서는 블루제이스의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였고 응원하는 팀은 토론토였다. 아니, 보스턴이었나? 그날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를 만난 마지막 나날 중 하루였다. 아직 살아 계셨다면 할머니는 당신 손자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더는 무지개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변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