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 생깁니다

"그래서 범인이 누굽니까?", 1996년 여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가 출간된 후, 출판사 편집부로 문의 전화가 쏟아졌습니다. 


인쇄 사고를 의심하는 문의도 있었습니다. 실수로 마지막 장이 인쇄가 안 된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일부러 지운 것이었습니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는 사건도 있고, 수사도 있고, 단서도 다 있는 추리소설이었습니다. 없는 것은 딱 하나, 범인의 이름이었죠.


지금 봐도 무모한 시도였습니다. 추리 소설에서 마지막 해결 부분은 상품의 핵심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독자가 돈을 내는 이유가 바로 그 장면인데, 작가는 그 장면을 통째로 들어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들은 탐정이 친절하게 범인을 찍어줄 때까지 수동적으로 읽기만 한다"며 "진짜 독자와 작가가 지혜를 겨루는 '독자 교섭형(讀者挑戰型)' 추리소설을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라는 의도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놀랍게도 한 번의 시도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3년 뒤 <내가 그를 죽였다>에서 같은 실험을 반복합니다. 이번엔 용의자를 셋으로 늘리고, 세 사람의 독백을 번갈아 보여주는 방식을 썼습니다. 난이도를 낮추기는커녕 더 올린 것이죠.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목표가 팬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추리소설 형식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을 뿐이었죠. 그런데 이 실험은 뜻밖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독자들이 책 밖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히가시노 게이고의 도전은 팬덤 마케팅이나 브랜드 측면에서 참고할 부분이 많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독자의 마지막 행동이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해결 부분이 있는 소설에서 독자의 마지막 행동은 '읽기'에 머뭅니다. 탐정이 설명해주고 독자는 납득하죠. 책을 덮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반면, 해결 부분이 없는 소설에서 독자의 마지막 행동은 '추리'와 '검증'이 됩니다. 독자들이 스스로 추리하는 진정한 추리 소설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감상은 혼자 해도 됩니다. 하지만 해석은 남과 견주고 싶어집니다. 독자가 다른 독자를 필요로 하는 순간, '수동적 읽기'는 '적극적 커뮤니티 활동'으로 바뀝니다.


물론 요즘은 검색 몇 번이면 범인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검색되는 것은 결론뿐입니다. 내가 밟은 추론이 타당했는지, 내가 놓친 단서가 무엇인지는 같은 책을 읽은 사람과 맞춰봐야 알 수 있죠.


30년 뒤, 비슷한 실험이 지금 극장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 이야기입니다. 영화 <호프>에서는 마을에 나타난 그 존재가 무엇인지, 왜 왔는지 끝내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밝힌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이해되는 입장들이 충돌하는 비극을 그리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창작자가 선악을 지정하지 않으면, 관객이 지정하게 됩니다.


이런 태도는 처음이 아닙니다. <곡성> 때 그는 관객들의 해석을 직접 찾아본 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습니다. 자기 말도 수많은 댓글 중 하나로 여겨달라고 덧붙였고요. 최종 해석권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죠. 


(참고 - “나홍진이 뭘 알아”…‘호프’ 과몰입 열기 속 400만 관객 돌파)


보통은 반대로 합니다. 논쟁이 커지면 공식 입장을 내서 정리합니다. 그런데 정답을 쥔 사람이 입을 여는 순간, 나머지는 전부 오답이 되고 대화도 함께 끝납니다. 브랜드 입장에서 더 눈여겨볼 대목은 지금 <호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 결과,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습니다. 1점 아니면 10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죠. 500억을 쓴 영화의 평가가 갈렸으니 보통은 위기로 분류될 상황이죠. 그런데 이 논쟁이 N차 관람과 입소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새로운 해석과 정보가 계속 나오면서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고 공급됐기 때문입니다. 


다만 논쟁이 흥행을 만들었다기보다는, 흥행을 증폭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로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남습니다. 만장일치의 호평은 대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동의할 것밖에 없으면, 말할 것도 없으니까요.


여기서 오해를 하나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열린 결말이 무조건 팬덤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예술영화나 철학서를 떠올려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해석의 여지는 넘치지만 팬덤이라 부를 만한 것은 잘 생기지 않습니다.


팬덤을 만드는 것은 '할 일'입니다. 저(=박찬우)는 이것을 '참여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고객이 브랜드를 소비한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열린 결말은 참여 공간을 만드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나홍진 감독은 해석을 통해 참여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콘텐츠라는 형식에서 가능한 참여 공간이 해석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니 브랜드 마케터 입장에선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고객이 다음에 할 일이 있는가'라고 말이죠.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첫째, 미완과 정보 부족은 다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단서를 본문에 전부 깔았고, 나홍진 감독도 장면과 대사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두 사람이 뺀 것은 재료가 아니라 결론뿐입니다. 재료를 빼놓고 여백이라 부르면, 그건 그냥 불친절입니다.


둘째, 이런 여백은 재미 위에서만 작동합니다. 나홍진 감독은 직접 이 조건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그림을 원하지만, 그러려면 작품이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재미없는 작품의 열린 결말은 여백이 아니라 미완성입니다.


따라서 실무에서는 4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1) 우리 고객이 구매 이후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2)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료는 다 주고 있는지, 3) 자기 방식대로 해본 고객이 그것을 남과 견줄 공간이 있는지, 4) 그리고 우리가 만든 것이 애초에 이야기할 만큼 재미있는 것인지.


많은 브랜드가 메시지를 완벽하게 다듬는 데 공을 들입니다. 오해의 여지를 지우고, 빈틈을 메우고, 반박 가능성을 없앤 뒤 시장에 내보냅니다. 그러고는 왜 우리 브랜드에는 팬덤이 생기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팬이 많다고, 고객이 많다고, 저절로 팬덤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팬들이 서로 연결될 때 팬덤이 됩니다. 그리고 그 연결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 생깁니다


- 박찬우 메타브랜딩 팬덤브랜딩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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