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것들은 언제나 날 행복하게 만든다 [풀칠 168호]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2024년의 두 번째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저는 ‘아다리가 맞는 순간(이하 아다리)’을 참 좋아하는데요. 이를테면 어떤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았는데 우연히 집었던 책에서 그것과 연관된 이야기가 나올 때. 마침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그런 감정을 다루거나 친구가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들 말이에요.

최근 경험했던 ‘아다리’는 바로 행복에 대한 한 영상인데요. 역대급으로 만족스러운 한 해를 보내고, 그 사실이 또 의심스러워 원인을 톺아보고 있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이 영상을 보니 그 이유가 단번에 이해되더라고요.

초장부터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네요. 오늘도 메일 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풀칠이 여러분에게도 아다리의 순간 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새해 첫날 이름 모를 산 뒤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올해의 목표를 떠올렸다. 물론 2023년의 만다라트표도 미완성인 채로 끝나고 말았지만. 자고로 목표라는 건 성공 만큼이나 실패하는 재미도 있는 법이다. 2024년의 목표는 작년과 같다. ‘안정감’이다.

안정감이라는 건 사랑 만큼이나 모호한 단어라서 구태여 주석을 달아보기도 한다. 내 경우엔 안정감의 원천은 ‘LOVE WHAT YOU LOVE MORE’다. 직역하면 ‘사랑하는 것을 더욱 사랑하라’라는 뜻인데 출처는 0호를 끝으로 사라진 매거진 <블립>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행복감은 나에게 안정감을 선사한다. 업무용으로 받은 나의 반려 노트북에도 ‘LOVE WHAT YOU LOVE MORE’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있다. 작년에도, 올해도 꼭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2023년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일 년을 보냈다. 분명 어영부영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회고를 하면서 뒤돌아 보니 꽤나 많은 걸 쟁취했다. 그중 하나는 ‘나’라는 존재를 지탱하는 요소가 늘었다는 점이다. 여러 다리 중 하나가 부러져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분명 나의 세계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여기엔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

한 축은 내가 별 거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이 나이쯤 먹으면 뭔가 그럴듯한 존재가 되어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되어보니 별 거 없다. 간신히 일어나 씻고 출근하고 뒤지게 일하고... 그 틈새로 가끔씩 행복한 일이 찾아올뿐. 운이 좋아 작은 꿈이나 큰 목표를 이루고 난 뒤에도 내 인생은 뒤집어지지 않을 거고,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로 매일 눈을 뜨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거북목이 유발한 좌측 어깨통증이 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소한 소망이 있을뿐이다. 물론 인생이 뒤집어질 만한 사건의 정도가 로또 1등에 당첨되는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별거 아니라는 자각은 스위치를 전례 없던 방향으로 전환하게 만든다. 이 드넓은 우주 속 태양계 안에 그 먼지와도 같은 지구, 또 그 안에 작은 나라 속 도시에 살고 있으니. 내가 너무 자그마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세상사에 저절로 무신경해지곤 한다. 요란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외면하고, 차라리 그 시간과 정성을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정반대의 축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정확히 짚자면 나의 취향에 대한 확신인데, 남들이 좋다는 것들을 이제는 탐내지 않는다. 적어도 내 취향이 아니라면 그래미나 노벨문학상도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LOVE WHAT YOU LOVE MORE'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바람에 취향을 편식하게 되고 말았지만. 살아보니 어차피 편식을 해도 사람은 정해진 만큼 큰다. 물론 뉴진스의 음악은 무지막지하게 좋다.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한 영화를 떠올렸다.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라이프>에서는 천국으로 가기 전, 인생에서 단 하나의 기억을 골라야 한다. 그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기억일 수도 죽음을 피하기 위해 경계해야 하는 기억일 수도 있다. 삶에서 가져가야 할 단 하나의 기억이라니. 이거야말로 한 사람의 가치관을 가늠할 수 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누렸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고르곤 한다. 나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사는 존재라고 믿으니까. 행복이야말로 나의 신앙이다.

올해 <원더풀 라이프>를 보며 내가 고른 단 하나의 기억은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다. 그날 내가 만난 사람과 바라본 풍경. 그날 들은 음악과 애인과 나눴던 이야기들. 공연을 방해했던 어린아이의 기침소리까지도. 그때 그 장소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그득하게 채워져있다. 그것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깊은 행복감에 흠뻑 빠져들 수 있을 정도다.

예전에 한 정신과 교수가 말하길 기록을 통해 나를 기쁘고 슬프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인지하는 것. 스스로 행복해질 방법을 처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더욱 사랑할수록 행복에 가까워진다고 해석했다. 역시 내가 얻은 이 안정감의 원천은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이제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확신했다.

소란스러운 유행이나 요망한 알고리즘이 나를 설득하려 들 때. 그래서 나의 취향이 흔들리는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할 때. 그럴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린다. 그건 다른 누구의 기준도 아닌 오직 나에게만 좋은 것들이면 충분하다. '나한테는 장들레가 그래미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신이야!'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할수록 내가 더욱 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야망백수 : 호시절을 보내고 계신나 보군요. 좋아하는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경제력과 시간을 어느 정도 갖추는 데 성공하신 거겠죠. 흑.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요즘 저는 모든 것에 영 시큰둥하거든요. 취향이라는 말에도 그만 질려버린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마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잠자고, 일하고, 밥 먹는 나날을 반복하다가 우연히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마주칠 때, 우리의 중심이란 다채로운 색의 바다에 빠진 아주 얇은 손수건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이 수건을 건져 물기를 꾹 짜보면 어떤 색으로 물들어 있으려나요.

아마 어떤 색이 들어있긴 하겠지만, 올해는 그 색을 들여다보기보단 손수건이 필요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제 손수건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 제 손수건의 색이 건네받을 사람의 마음에 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손수건이니까요.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제 손수건을 건네기 좋게 바싹 말려놓는 사람. 올해엔 그런 사람이 되어보렵니다.

마감도비 : 행복이란 뭔지 너무 잘 알려주는 글이라 읽으면서 저까지 들뜨게 되네요. 일 때문에 너무 바쁜 나머지 행복이란 단어를 도외시할 때가 있었는데 행복의 자가 처방 잘 배우고 갑니다. 약은 약사에게, 행복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나 봐요.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는 잘 알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을 땐 무엇이 필요한지도 자문해보아야겠어요. 파주님의 행복, 갑진년에 더욱 배가 되길 기원합니다.

아매오 : 나한테 취향이란 게 있는지 의심하는 요즘입니다. 음악만 해도 그래요. 듣던 노래만 듣는 것도 아니고 아무 노래나 듣습니다. 노래 제목은커녕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도 잘 몰라요. 재생목록 자동 추가와 랜덤 재생에 절여진 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충 그 설정으로 재생시키면 그럭저럭 들을 만한 노래들이 무한대로 흘러나오니까요. 아이러니하죠. 제 취향에 맞는 노래들을 무한대로 추천해주는 시스템으로 인해 노래 한 곡 한 곡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게 됐으니 말이에요. 노래 제목을 기억하지 않고 가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결국 ‘그런 느낌’만 남는. 이러한 상태의 제게도 취향이란 게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취향의 중심이 그만 흔들, 려버린 기분입니다. 그런데 그 흔들림이 일상이 된.

▲ 중심적 특성

풀칠러A

방배와 서초의 중심..이 아닌 중간에서 고깃집 수저 통에 기대둔 핸드폰 화면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매오

풀칠을 통해 미소를 지은 사람이 있고 심지어 그 당사자가 그 사실을 저희에게 알려준다는 사실은 언제나 경이롭습니다. 저 또한 미소를 짓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풀칠러B

요 며칠 직장 동료들이 돌아가면서 꿈에 나오고 있어요. 실제 일어날 법한 사건이 아닌데 주인공만 그들이 캐스팅된 느낌이라고 할까... 옆 부서 막내사원이 사귀는 사이인데 권태기를 겪는 연인으로 나온다든지, 웃으며 인사만 나누는 사내 카페 매니저님이 왜 자기한테만 못되게 구냐고 울며불며 화내는 친구로 나온다든지... 깨고 나면 부조리극을 본 것 같고 마음이 혼란합니다. 이 또한 관계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에서 오는 것일까요... 캐스팅했는데 뭐라도 출연료를 드려야 하나 싶고 그렇습니다. 오늘도 공연하느라 힘쓰셨어요.

야망백수

얼마 전에 외부 미팅 나가서 좀 어색하게 밥을 먹을 일이 있었는데요. 그걸 우연히 친한 동료가 봤나 봐요. 나중에 저한테 연기하느라 애썼다고 말해주더라고요. 별생각 없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혼신의 연기를 알아채준 관객이 있다는 게 뭔가 찡하더라고요. 오늘도 공연하느라 애쓰셨습니다. 연기를 안 해도 되는 사람에게, 연기하는 모습을 들키는 소소한 행운이 풀칠러님에게도 찾아들길 바라겠습니다.

풀칠러C

핸드폰 화면 속에서 아기를 안고 웃는 아빠와 화면을 보기 위해 모여든 고깃집 손님들. . 귀여우면서 되게 훈훈한 장면이네요. 추억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심이라는 단어를 가치관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저도 변하겠고 저의 중심도 변하지 않을까 싶네요. 변화에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파주

최근에 ‘태양계 실제 움직임’이라는 제목의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요. 거대한 행성들이 쉴 새 없이 태양 주위를 빙빙 회전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놀랍더라고요. 더군다나 태양도 이 드넓은 은하계를 돌고, 또 은하계를 포함한 우주도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니… 이걸 보고 난 후엔 ‘중심’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내 시점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내 인생, 내가 중심이라 믿고 아주 가끔씩 은하계를 공전하는 태양,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를 떠올려야겠다고요. (참, 오해하실까봐서 덧붙이자면 천동설신봉자나 지구평평론자는 아닙니다. 진짜로!)

풀칠러D

이번 1분기, 저의 가장 큰 변화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부부가 둘 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 간신히 첫째가 자기 생각을 말할 즈음이 되니 둘째가 생겼네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저밖에 모르던 제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커지고, 저를 조금씩 내려놓고 있어요. 둘쨰 아이를 통해 조금 더 성장하고, 다져지는 2024년이 될 것 같습니다. 응원을 부탁드려요. 미리 감사합니다!!

마감도비

정말 축하드려요!! 첫째에 이어 둘째라니. 몸은 고되겠지만 기쁨이 가득할 거 같아요. 풀칠러님의 성장도, 가정의 평온도 모두 챙기시는 한 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저희도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