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온도, 조명, 습도'가 사악 하고 산들바람처럼 불어오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글거리는 멘트로 뭇 여성들의 경악을 자아낸 멘트지만 이만한 표현이 없네요.) 구체적으로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기분을 느낀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특정 무드가 있죠. 종종 영화에서 그런 무드가 느껴질 때면,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이 무드를 어떻게 영상에 담아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와요.

이렇듯 잘 만들어진 영화들은 어떠한 레이어가 느껴지는데, 겹겹이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라 살짝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일단 영화를 보면 가장 먼저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보이죠. '다른 영화들과 비슷해보이는데 이 영화는 왜 이렇게 과몰입하게 되지?'하고 궁금해하며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종합예술의 결정체인 영화의 매력이 빛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미술감독은 공간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커다란 벽지나 가구부터,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소품들까지 신경써서 그 자체로 미장센을 만듭니다. 또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 더 자세히 보면, 스타일리스트가 영화의 무드와 캐릭터의 성격을 촘촘하게 분석해 배우에게 딱 맞는 옷을 입히죠. 헤어&메이크업 스탭은 여러 스타일 후보 중, 배우 본체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실제 인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최고의 안을 골라 캐릭터를 탄생시키죠. 누구 하나 이 작품에 허투루 임하는 사람이 없어요. 프로페셔널의 정수같은 느낌이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화의 때깔이 좋으면 감독의 연출력이나 배우의 연기력만 칭찬하는 선에서 그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감독으로 이름 석자 크게 알린 류성희 감독이 더 대단하다고 느껴요.

감독의 가장 최근 작품인 <헤어질 결심(2022)>으로 얘기를 해볼까요? 저는 서래 집의 초록색 같아 보이기도 파란색같아 보이기도 하는 벽지가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장면을 보는 순간, '아, 역시!'라고 속으로 외쳤어요. 벽지의 무늬는 언뜻보면 겹겹이 둘러싼 산 같아 보이기도, 몰아치는 파도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요. 산과 바다로 크게 나뉘는 영화의 공간적 특성과 메시지를 잘 담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영화의 전체적인 무드는 또 어떻고요. '이포'라는 도시는 영화 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지만, 두시간 내내 안개끼고 축축한 이포의 거리를 종일 배회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완벽한 무드를 만들어내서 순식간에 과몰입하게 만들었죠. 처음 봤을 땐 감독의 연출 실력이 좋아서 이렇게 미감이 뛰어난 영화가 탄생하는 줄 알았는데 겹겹이 보니 미술감독을 포함한 숨겨진 스탭들의 공이 크다는 걸 깨달았어요. 감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인터뷰를 찾아 읽다보니, 역시나 성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프로 의식이 어마어마하더군요.

“프로덕션 디자인은 무드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무드란 물리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의 공기나 정서까지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극장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경험이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고유의 파장을 지닌

소리와 감정에 형태를 부여했다."

-'씨네21' 인터뷰 중 발췌 및 편집

이렇게 뛰어난 커리어와 프로 의식을 갖춘 여성이 레이어의 안쪽보다는 레이어의 앞쪽에서 박수갈채를 받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달의 좋여사로 소개합니다. <헤어질 결심>을 보지 못해 아쉽거나, 보고난 후 류성희만의 세계가 궁금해졌다면 마지막 코너에서 소개하는 영화들로 8월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요?

* 제목은 오은 작가의 동명의 시집 제목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올해로 5년 2개월 차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전 직장 경력까지 합치면 정확히 6년 2개월이네요 . . ⭐️ 초등학교 1학년이 6학년이 되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디자인은 뒷순위로 밀려날 때가 종종 있어요. 대부분의 업무가 빨리빨리, 최대한 낮은 예산으로 진행되다 보니 디자인은 ‘나중에’, ‘여유 있으면’ 하는 것이 되더라고요. 그럼 디자이너라는 내 직업도 뒷순위인가 하는 생각에 힘이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10년, 20년 뒤에도 디자인 계속하고 싶은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 . . 나약한 쇠끼 . .'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

이렇게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던 어느 날, 퇴근 후 집 근처 영화관으로 달려가 <헤어질 결심>을 봤습니다. 탕웨이와 박해일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미장센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단톡방에 ‘대박’, ‘미쳤다’는 말만 쏟아냈던 기억 . . ◠ ͜   ◠ (언어적 표현의 한계)

산과 바다, 아파트, 경찰서 등 일상에서 익숙한 공간이 감각적으로 다가왔던 게 좋았고 특히 나무와 푸른 바닷빛 벽으로 이루어진 서래의 집이 인상적이었어요. 나중에 류성희 미술감독의 작업이었다는 걸 알고 대표작들을 찾아보았는데요.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고지전>, <아가씨>, <헤어질 결심> 그리고 최근 개봉한 <외계+인 1부>까지. 누아르부터 전쟁, 드라마, 스릴러, 로맨스, SF 등 장르와 시대를 넘나드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세계에 다시 한번 놀랐답니다.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다니라’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화 속 주인공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으니

계속 공부하고 경험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미술감독이라면 영화감독의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 디자이너의 취향대로만 작업하면

항상 비슷한 결과물이 나올 거예요.

저는 감독의 세계를 해석하고 변형해 나온

결과물 자체에 흥미를 느끼거든요.

-월간디자인 2016년 7월호 인터뷰 중 -

다양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데는 감각과 스킬도 중요하지만, 역시 디자인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1순위인 거 같아요. 그리고 새로운 것들 공부하고 도전하는 걸 겁내지 않아야 하고요.

류성희 미술감독은 영화 <암살> 작업을 위해 일제 강점기 식민지 정책,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관해 공부했다고 해요. 영화 <외계+인>의 세계관은 고려 문명과 현대적 요소들(+ 외계인)이 혼합되어 있다보니 또 관련 분야에 대해서 지식을 쌓았을 거고요. 역시 류성희 world.com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제일 두려운 것은 어느 순간 날이 무디어져서,

내 이미지를 구현 못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발언하고 싶은 욕구나 감정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감독은 무엇인가 발언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감독을 도와주는 작업이어서,

그것이 습관화가 되면

맞춤형 인간이 되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까먹을 것 같은 날이 오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다. 나도 발언하고 싶다.”

- 톱클래스 2007년 2월호 인터뷰 중 -

그리고 감독의 요청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디자이너의 주관을 담아낸다는 점이 너무너무 멋있었어요. 디자이너가 단순히 디자인 툴을 다루는 오퍼레이터가 되지 않으려면, 오래오래 이 디자인 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아가 있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작품들을 통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미술 또한 다른 요소들과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이건 영화미술뿐만 아니라 어떤 디자인이든 마찬가지일 거고요. 덕분에 디자인은 항상 뒷순위로 밀려나는 것 같아 속상했던 감정들이 싹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역시 힘들고 지칠 땐 멋진 여성들을 알아가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요! 저와 같은 고민하는 디자이너분들이 계신다면, 이번 호를 읽고 영감과 에너지를 동시에 얻으셨으면 합니다 🥰

얼마전에 SNS에서 일반인과 덕후의 차이에 대한 글을 봤습니다. 너무 좋은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와! 좋았다!”하고 산뜻하게 넘어가면 일반인,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검색하고 곱씹으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들을 찾는 데까지 이르면 덕후라고 하더군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서는 어느 쪽이신가요. 저는 후자입니다. 당장 얼마전에 <헤어질 결심>을 본 뒤로 모든 말미에 “마침내”를 붙이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그러고보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느냐, 아니냐’로 나뉘더군요. 한 번 본 영화는 어지간해서는 다시 보지 않는다는 사람과 보면 볼수록 재미가 더해진다는 사람으로요. 저는 여기서도 후자입니다.(젠장) 어쩐지 적으면 적을수록 덕력을 뽐내는 것 같아 민망해지네요...

물론 저도 모든 영화를 여러 번 보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보는 영화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보는 ‘재미’가 커서 여러 번 보게 되는 영화는 대사와 장면을 통째로 외우는 영화입니다. <타짜>나 <전우치>, <극한직업> 같은 영화가 이쪽에 들어갑니다. 또 하나는 장면 장면을 곱씹게 하는 영화들입니다.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같은 영화가 이런 쪽인데 주로 이런 식입니다.

<헤어질 결심>을 본 후 첫 번째 감상 중 하나가 서래(탕웨이 분)의 집 벽지가 ‘영화의 주된 배경인 산과 바다 두개를 모두 담아낸 느낌이라 너무 좋다’였는데요. 두 번째, 세 번째에는 그보다 조금 더 작은 단위의 것들을 찾고, 보고, 파게 됩니다. 가령 이런 것들이죠. 

서래의 산해경 책은 미술팀이 직접 디자인한 것이고, 어항 속 파란 구피는 같은 서래를 상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서래집 거실의 울퉁불퉁한 나무 벽은 기도수(유승목 분)가 그곳을 거대한 음악감상실로 썼다는 캐릭터의 전사를 설명하는 것 같은 것들이죠. 이런 것들은 우리 모두 영화를 보는 내내 보았지만 보지 못한 것이고, 영화에 빠져듦으로써 보지 못했음에도 본 것들입니다.

이런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그리고 나의 생각이 창작자의 의도와 같았음을 확인 했을 때 무엇보다 큰 짜릿함이 있습니다. 마치 창작자와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이런 식의 감상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엔딩 크레딧입니다. 쿠키 영상이 없는 한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장면을 기다리며 그 장면을 이토록 곱씹게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됩니다. 제가 <박쥐>의 그 기묘한 공간과 분위기들에 반해 그 영화를 보고, 또 보다가 마침내 류성희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처럼 말이죠. 그녀의 가장 최근작인 <외계+인 1부>는 고려시대부터 미래 사회까지 배경의 폭이 굉장히 넓은데요. 어떻게 감독의 이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멋지게 해결해냈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최동훈 감독이 7년만에 내놓은 신작이라는 점보다 그 점이 더 저의 흥미를 돋우는 중이라면 그녀에 대한 저의 사랑이 느껴지실까요?

류성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난 뒤로 저의 영화생활은 한층 풍성해졌습니다. 말 그대로 볼 게 더 많아졌거든요. 그리고 여러분도 틀림없이 그렇게 되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