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도 출신이다. 세상의 모든 칼국수는 멸치칼국수인 줄만 알고 살다가, 직장생활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서 바지락칼국수를 처음 먹었다. 밍밍한 국물 맛이 칼국수라고 하기엔 뭔가 좀 어색했다. 나의 선택은, 멸치칼국수vs바지락칼국수=멸치칼국수, 군만두vs찐만두=군만두, 돼지김치찌개vs참치김치찌개=돼지김치찌개, 짜장면vs짬뽕=짜장면이다. 내가 사는 파주에서는 제대로 된 멸치칼국수를 파는 곳이 드물다. 남대문 시장 칼국수 골목에서 파는 칼국수가 내가 어릴 적 먹던 경상도식 칼국수와 가장 비슷하지만, 멸치칼국수가 생각날 때마다 남대문시장까지 가는 건 무리니 그냥 내가 만들어 먹는다.
멸치칼국수는 육수가 팔 할이다. 일단 끓는 물에 멸치를 손에 잡히는 만큼 많이, 듬뿍, 가득. 머리는 떼지 않는다. 배를 갈라 내장을 빼지도 않는다. 그래야 국물이 더 터프하다. 다시팩이 있으면 하나 더 넣어준다. 다시팩 없으면 다시마 A4 반 장 크기만큼 잘라 넣는다. 대파 뿌리 있으면 반 개 넣고, 양파 반 개 툭툭 썰어 넣고, 당근도 채 썰어 넣는다. 애호박 있으면 채 썰어 넣고(빼도 된다), 감자 있으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넣고(빼도 된다).
육수가 만들어질 동안, 밀가루 반죽을 한다. 밀가루는 종이컵 한 컵 분량. 볼에 담고 달걀 하나를 깨트려 넣는다. 그리고 소금 살짝, 여기에 식용유 한 스푼. 자, 이제 반죽 시작. 처음엔 숟가락으로 밀가루와 달걀이 잘 섞이게 저어주다가, 섞인 다음에는 손으로 반죽한다. 반죽은 오래 할수록 좋다. 몇 해 전 이탈리아 마르케라는 곳에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탈리아텔레를 만드는 셰프에게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죽을 얼마나 해야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가 대답하길, “어깨가 아파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이탈리안다운 멋진 대답이었다. 그의 말을 떠올리며 ‘그렇지, 난 귀찮은 건 못 참아도 힘든 건 참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하고 덤볐지만, 난 힘든 것도 못 참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뭐, 이 정도면 됐지, 대충 먹자. 시판면이 아닌 게 어디야.
반죽이 다 되면 도마 위에서 덧가루를 뿌리고 밀대로 밀어 가며 얇게 편다. 너무 얇게 펴면 면 씹는 재미가 없으니 적당한 두께로. 얇게 펴진 반죽은 덧가루를 앞뒤로 뿌려 돌돌 말아 먹기 좋은 두께로 썰어준다. 5~7mm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면을 다 썰면 덧가루를 조금 더 뿌려 면을 펴준다. 아참, 나는 반죽을 약간 덜어 내 수제비도 만들어 면과 함께 넣는데, 수제비 반죽은 면보다 더 얇게 민다.
육수가 끓기 시작한다. 중약불로 낮추고 조금 더 끓인다. 진한 멸치 육수 냄새가 가득한 주방. 뭔가 아늑하고, 안도감이 든다. 국자를 들고 육수 맛을 살짝 본다. 달큼하면서도 약간 비릿한, 익숙한 육수 맛이다. 그래, 이거지. 낮 동안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붕붕 떠 있었던 마음이 멸치 육수 앞에서 차분해진다.
육수 재료를 건져 내고 면과 수제비를 넣는다. 면과 수제비는 끓는 물에 반쯤 미리 삶아 두었다가 육수에 넣고 다시 끓이면 맛이 좀 깔끔하긴 하지만,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멸치칼국수는 터프하게! 국간장과 소금, 액젓으로 살짝 간을 더 하면 완성이다. 칼국수를 그릇에 담고 김가루와 깨를 넉넉하게 뿌려 준다. 경상도식이니까 듬뿍. 나는 여기에 고춧가루를 많이 뿌린다. 음 이 정도면 속이 쓰릴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육수를 맛본다. 물론 그릇을 들고 살짝 마셔야지. 숟가락으로 육수를 떠 먹는 건 경상도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아, 흠흠. 육수향이 콧속으로 스트레이트로 파고 든다. 좋다. 만족스러운 맛이다. 진한 멸치육수는 뭔가 독불장군같고 맘대로 같은 면모가 있다. 밸런스가 안 맞고 좀 엉성하지만 오히려 그게 매력이다.
면도 적당히 잘 익었다. 한 젓가락 가득 집어 들고 후후 식힌 다음 입으로 가져간다. 오오, 그래 이 맛이지. 앞을 향해 정확하게 돌진하는 직진의 맛! 후루룩, 후루룩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면을 건져 먹는다. 틈틈이 육수도 마신다. 멸치육수는 적당히 식으면 은근히 깃든 다정함을 드러낸다. 먹기 좋게 식은 국물을 마셔 본다. 그렇지, 이게 바로 멸치칼국수만의 매력이지. 츤데레 같은 녀석.
다 먹었다. 깨끗하게 비운 면기는 인생의 포만감을 들게 한다. 잘살고 있어, 하고 어깨를 툭 두드려 주는 것 같다. 아, 맞다. 오늘 사무실에서 약간 이상한 사람이 뭔가 시비를 걸어왔는데, “아이쿠, 죄송합니다. 수고하십쇼.” 하고 얼른 도망쳐 나왔다. 어딜 가나 이상한 사람이 꼭 일정한 비율로 있다는 건 불변의 법칙이다. 이상한 사람 앞을 지날 때는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걷는 것이 상책이다. 문득 그에게 내가 만든 멸치칼국수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가 뒤틀린 땐 탄수화물이 안내하는 그곳으로 가면 된답니다. 밀가루 150그램에 따듯한 육수 조금이면 마음이 따뜻하게 진정되거든요.
그런데 쑥갓을 올리는 걸 깜빡했군. 괜찮아, 어차피 쑥갓은 가장 먼저 먹어야 하니까, 드라마로 치면 인트로 같은 것이니까, 생략하기 버튼을 클릭했다고 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