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제는 BDSM이 아니다

추적단불꽃이 지속적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지금’을 조명합니다.

디지털 성범죄, [지금]

SSC(Safe, Sane, Consensual, 안전한, 제정신의, 상호합의) 설명. ⓒ 추적단불꽃

우리는 BDSM을 취재하며 안전과 즐거움이 보장되는 플레이가 과연 가능할지, 근본적인 고민이 들기도 했다. 취재를 하며 이 안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계속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SSC(Safe, Sane, Consensual, 안전한, 제정신의, 상호합의)를 실천하는 성향자들도 있었다.

#. 실질적인 권력은 ‘돔’이 아닌 ‘섭’ - J씨

흔히 BDSM 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도미넌트(돔)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쪽은 서브미시브(섭)이다. 도미넌트는 결코 서브미시브의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되며, 따라서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한계가 어디인지, 서브미시브와의 충분한 합의를 바탕으로 관계를 이끌어내야 한다. 즉, 결국 BDSM플레이라는 것은 서브미시브가 허용한 한계 내에서 도미넌트가 얼마나 잘 이끌어내며 상호 만족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물론 이러한 충분한 합의를 위해서는 가장 기본이 될 세이프워드는 물론이고, 대화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몸으로 할 수 있는 신호들이 상호 합의가 되어야 한다. 관계가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엔 적응에 물론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도미넌트는 서브미시브를 위해 애프터 케어(BDSM 플레이 후 진정기간)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BDSM관계는 섹스 외에 데이트나 일상생활에서까지도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피임과 성병에 대한 안전은 물론이며, 플레이 도중 다칠 수 있는 부분을 최소화하며 안전한 플레이를 해야 하고, 만일 다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이에 대한 케어까지 책임져야 한다. (출처: <과연 BDSM과 Feminism은 양립할 수 있는가: 세상 모든 BDSMer 페미니스트들에게 바치는 나의 고백>, <<여성이론 41호>>, 2019))

#. 서로를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한 플레이 - K씨

성인이 된 이후, 성인인증이 가능한 여러 사이트를 접속하며 BDSM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접했다. 방대한 정보라 자칫하면 잘못된 인식으로 파고들 수도 있었지만, 이성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인식에서 보면 어긋난 정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BDSM은 단순한 폭력이 되어버리기 쉽다. 나의 첫 플레이 상대는 BDSM 초심자였던 내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알려줬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 트위터에서 처음부터 반말로 구인하는 이들을 거르라는 등의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BDSM의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고 원하는 강도 역시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 없이 플레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설령 플레이 도중 피해를 입을지라도, 그들이 부족한 게 아니다. 상대방의 신뢰를 이용한 가해자가 문제다.

BDSM에서 ‘합의’란 무엇인가

BDSM 플레이 전 합의를 진행하면서 그 기준과 개념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무엇보다 '합의'의 가장 큰 목적은 안전하면서도 즐거운 플레이를 위한 것이다. 추적단불꽃은 총 5명의 성향자들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며 성향자들 간의 ‘합의’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었다. ㄱ씨는 “서로의 건강 상태와 성병 여부를 공개하고, 이후 혹여라도 문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 연락처와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공유한다”고 말했다. 이후 개인의 안전과 아웃팅을 예방하기 위해, 촬영이나 제삼자를 플레이에 초대하는 행위 등은 더욱 철저히 규칙을 정할 것도 강조했다. ㄴ씨는 세이프 워드, 강도, 횟수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 등을 정하고, 애프터케어 시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응급상황 시 대처하는 방법(근처 병원의 위치를 알아놓는 등) 역시 사전에 이뤄져야 함을 말했다. ㄷ씨는 BDSM 플레이에서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지와 기구를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또한 상대에게 공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합의 방법 또한 다양했다. 구두, 문자, 서면, 영상 합의 등 방법과 정도는 상호 합의로 정했다.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인원 모두가 암묵적인 합의는 추천하지 않았다. 이유는 “문제가 생겼을 경우, ‘암묵적으로 합의하지 않았냐’는 질타받았을 때 내세울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여 ㄱ씨는 최대한 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의논하고 문자 등으로 남겨둘 것을 추천했다. ㄹ씨는 영상으로 합의를 진행하면 아웃팅 혹은 협박의 위험이 있으므로 신중하게 작성 해야 하며, 개인정보 유출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ㅁ씨는 “커뮤니티나 SNS등에 BDSM과 관련한 ‘계약서’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문서들이 있다.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계약서 내용 중에는, ‘‘주인’은 ‘노예’를 매각할 수 있으며, 주인이 노예를 임대 또는 매각하여 금전적 또는 이에 상응하는 수익은 전적으로 주인에게 귀속된다’는 등의 조항도 있다”며 이런 계약서를 사용하게 되면 원치 않은 행위를 강요받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ㅁ씨는 “합의에 관련한 부분은 둘 사이에 충분한 대화를 통해, 문제 발생 확률이 낮은 문자 등으로 남기는 게 안전하다”고 덧붙였다.

비디에세머이자 <S&M페미니스트>의 저자 클라리스 쏜은, “BDSM을 시작하기 전,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동의는 변화하며 진행되는 협상”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원하는 것은 바뀔 수 있고, 이에 대해 상호 간의 협상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비해 BDSM 관련 논의가 활발한 미국은 비디에세머를 위해 존재하는 500개 이상의 교육 및 사회 조직이 있다. 그 중 한 단체인 커뮤니티 ‘네트워크/라레드’(Network/La Red)에서는 반-학대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네트워크 라레드는 LGBTQ를 비롯한 SM 등의 관계 내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 단체다. 그들은 ‘학대’와 ‘BDSM’의 근본적인 차이가 ‘동의’에 있다고 지적했다. 명확하게 동의하지 않았다면, 싫다고 말하기 두려웠다면,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알았다고 말한다면, 싫다고 할 때 결과(실직, 가정 파탄, 아웃팅(타인에 의해 성 정체성이 폭로되는 문제) 등)가 두려워서 ‘알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의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적극적 합의를 바탕으로

상호 성적행위를 할 때 모든 당사자가 지켜야 할 원칙. ⓒ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을 지원하며, 시민 사회가 피해자의 관점으로 성폭력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왔다. 그러면서 모든 성적 관계가 적극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정의한 ‘적극적 합의’는 이렇다.

적극적 합의란 성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동의한 데에 있어서 드러나는 공통의 요소들을 말한다. 항변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성적 행위에 대한 동의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동의했다는 자각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성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이고,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동의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행위에 관여한 모든 사람은 상대방과의 성적 행위에 있어서 적극적 합의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출처: 단 하나의 기준, 적극적 합의 캐나다 온타리오 법원 판결 215p, 한국성폭력상담소, 2017))

지난해 6월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로 <동의×동의, 적극적 합의> 토크쇼가 진행됐다. <여자들의 섹스북>(이매진)을 쓴 한채윤 작가는 토크쇼에서 “버스 타고 갈까? 밥 먹을 거야? 뭐할까? 등의 일상대화 대부분이 합의를 이루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성과 관련되면 합의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한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항상 서로와 합의하며 살아가지만, 성에 있어서 만큼은 적극적인 합의가 쉽지 않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성과 관련해 ‘대놓고’ 물어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부끄러운 일로 생각해서, 혹은 상대의 침묵을 '동의'로 착각하여 상대의 의사를 으레 짐작하고 행동한다면, 그게 바로 원치않는 성적행동, 성적 침해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피해자다운 건 없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에게 범죄의 원인을 찾는 시각이 존재한다. 피해자가 피해 이후 무기력해야만 하고, 울어야만 하는 등, 사회가 만든 ‘피해자다운’ 모습을 강요한다. 범죄 피해를 입어도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이라는 틀 안에 피해자의 행동이 합당하지 않다면,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부터 힘든 현실이다. 또한 강간 과정에서 폭행이나 협박이 발생하지 않은 이상, 설령 폭행이 발생했다 할지라도 피해자가 현저히 저항하지 않는 이상 ‘강간’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강간죄 성립 요건을 매우 협소하게 해석하는 ‘최협의(最狹義)설’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BDSM 성향자들은 성범죄 피해자 중에서도 더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을 뿐이다. BDSM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별개로, 성향자가 성범죄 피해를 당했으면 이에 대해 마땅히 지원받아야 함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성향자’라는 사실이 이들을 성범죄 피해자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한국 사회 전반이 가진 ‘성’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이, 특정 성향을 보이고 있는 이들을 범죄 사각지대로 몰아가고 있음을 이제는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보수적인 성과 관련한 인식을 개선하는 것과 함께,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해 모든 성폭력 피해자의 안위를 보장해야 한다. 2018년 미투 폭로가 연이어 일어나자, 20대 국회에서는 강간 처벌 관련 법안이 10개나 발의됐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임기 만료됐다. 지난해 8월 21대 국회에서도 정의당 류호정 의원,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 등 여성의원들이 비동의 강간죄 법안을 발의했다. ‘폭행 또는 협박’만을 강간죄 요건으로 보고 있는 현행 법조문에 ‘상대방의 동의 없이’, ‘위계·위력’이라는 문구 등을 추가해 발의했으나, 법안은 현재까지 계류된 상태다.

2018년 유엔(UN) 여성 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형법상 강간을 폭행, 협박이 있는 경우에만 한정하지 말고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점에 두도록 해야 한다”며 비동의 강간죄 개정을 권고한 바 있다. 이미 독일이나 미국, 아일랜드, 영국 등 해외에서는 비동의 강간죄를 적용하고 있다. 성적인 관계를 맺기에 앞서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동안 당연한 일들이 지켜지지 못해 피해를 겪은 이들이 너무 많다. 1953년 첫 형법 제정 이래, 7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켜져 온 강간죄의 성립요건이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다. ‘동의’에 기반한 성문화가 도입될 때, 비로소 성범죄 피해 사실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