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실패하는 독서

안녕 결, 민경이야.

 

방 안에서도 몸을 웅크리게 되는, 한기가 든 줄도 몰랐다가 더운 샤워기 물을 맞으며 으스스 몸을 떨게 되는 겨울이야. 주홍이나 보랏빛 노을은 찰나지만, 해가 넘어간 후 옅은 군청빛 하늘이 오래 지속되는 겨울이야. 구름이 없고 미세먼지 농도가 좋아서, 달이 밝게 뜨는 밤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겨울이야.

 

기다리던 겨울을 맞아서 조금 신이 났는지, 겨울이 가득한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어. 한 주 동안 몰라보게 추워진 날들 속에서 평안히 지냈니?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연말을 생각하며, 연말에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쁘게 지냈어. 또 한 해를 시작하며 세웠던 계획을 돌아보며 이건 했구나, 저건 하려고 했던 것도 까먹었구나 하고 재미있어했고, 내년에는 어떤 날들을 보낼지 생각해 보아야겠구나 하며 조금 들뜨기도 했어.

 

*

 

얼마 전에 상담을 받고 왔는데, 선생님께서 MBTI가 뭐냐고 물어오셨어. 나는 중간은 NF 불변이고, E-I와 J-P는 비율이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어. 그러니 선생님께서 사람들과 만날 때 에너지가 생기는지, 아니면 혼자 있을 때 그러한지 다시 물으셨어. 나는 3초 정도 뜸을 들이다가, 사람들이랑 있을 때라고 대답했어. 그 대답을 하고 스스로 놀랐는데, 평소에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곤 덧붙여 말했어. 사실 혼자 있는 시간도 많고, 그 시간을 필요로 하긴 하는데 그때도 마냥 혼자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혼자 있을 때 주로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는데, 그때는 혼자 있는 느낌이 아니에요. 드라마를 보는 시간도 많은데 그때는 ‘나’라는 사람도 없는 느낌이고요, 서사에 모든 걸 던지는 기분?”

 

그리고 샤워할 때 정도만 제정신으로 혼자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했지. 그렇게 말하는 내내 낯설었어. 그리고 지도에 없던 섬을 발견한 사람처럼 재미있어했지.

 

외부에서 받는 자극에, 특히 사람에 의한 자극에 에너지를 많이 얻지만, 동시에 민감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 사회적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내 모습을 정리했어. 그 결론이 조금 씁쓸하기도 했는데(기질 때문에 선호하는 방식으로 마음껏 살지 못하는 거니까), 덕분에 책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던 건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책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의 강점은, 먼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거야.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언제 만날지, 언제까지 만날지 등. 그리고 책으로 엮었다는 건 글이 있었다는 거고, 그 글은 작가가 책상 앞에서 보낸 무수한 시간의 증거니까. 그렇게 공들여 내놓은 마음이라는 점에서 힘을 가진다고 생각해.

 

장르에 따라서, 책 너머 또는 안의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시를 읽으며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걸 가장 좋아해. 다른 장르의 책들로도 충분히 작가, 또는 인물들에게 가닿을 수 있지만, 시 장르 특유의 시인과 독대하는 느낌이 정말 좋거든.

 

소설에는 서사와 인물이, 에세이에는 정형성과 설명이, 희곡에는 무대와 지문이, 인문서에는 이론과 지적 발견 등이 작가와 나 사이에 있는 기분인데, 시는 철저히 화자와 나뿐인 것처럼 느껴져.

 

시에 서사와 인물, 정형성과 지적 발견, 그런 것들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시인으로 동일시되는 화자의 존재가 그것들에 압도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 하지만 독대한다고 해서 마음이 더 쉽게 보이는 건 아니야.

 

마음은 저마다 고유해서, 또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방식도 모두 달라서, 같은 언어로 쓰였다 하더라도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가 다른 장르의 글보다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는 고유한 마음을 널리 쓰이지 않는 표현으로 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번역할 구석이 아주 많고, 번역에 실패할 확률도 압도적으로 높지.

 

그럼 쉽게 표현하면 되지 않나?라는 물음이 떠오를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가 아는 언어로 모든 마음을 깔끔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보다 언어에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가끔은 어렵고 모호하고 못 알아먹게 쓰인 마음에 대한 문장들이 더 진실에 가깝게 느껴지는 경우가 내겐 많았어.


대체로 그런 문장들을 시에서 만났고, 그 문장들을 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들여다보는 게 좋았어. 대부분이 오해거나 오독인, 실패하는 독서를 반복했던 이유는 ‘마음은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모조리 파악할 수도 없으며, 발화되는 순간마다 온전히 이해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시 속의 문장들이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그게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어. (물론 너무 오래 읽으면 머리가 아프지만:)

 

*

 

날이 추워 바깥에 나가서 자극받는 일이 줄어서 그런지, 시가 잘 읽히는 날들을 보내고 있어. 그러다 4년 전, 사회 초년생 생활이 너무 어려워,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덜컥 신청했던 수업의 선생님이셨던 시인님의 시집을 꺼내 읽게 되었어.

 

추웠던 겨울, 일곱 번의 금요일마다 평일 동안 부서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한 시간 반을 달려 노원구의 한 서점에 갔어. 그곳에서 조용히 서로가 쓴 시를 나누고, 몇 마디씩을 덧붙였던 시간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큼직하고 깊은 흔적으로 남아있어. 흉터가 될 뻔했던 어려운 시간들을 흔적으로 남을 수 있게 다독여주었던 수업이었어.

 

시인님과 한창 얼굴을 나누던 시기에 발행되었던, 시인님의 친필 서명이 새겨진 시집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어. 그러다 보니 시인님이 보고 싶었어.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시인님의 새로운 시집을 사두었는데, 그 시집을 이어 읽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본 것 같은 마음으로 변했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날들을 지나오셨구나, 그때 단호하게 내게 말했던 마음들이 변하기도 하셨고, 그때와 다름없는 마음들을 가지고 계시기도 하구나 하며 아무도 없는 방에서 시인님과 마주 앉아 시 이야기를 하던 그때처럼 열렬히 말을 걸고, 말을 들었어. 해가 다 질 때까지 오래 가만히 앉아 그 시집을 읽었어.

 

*

 

결, 그래서 오늘은 네게 시인님의 한 문장을 빌려 질문을 건네고 싶어. 아래 문장이 네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궁금해. 박소란 시인님의 <울고 싶은 마음>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야.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고유한 언어로 쓰인 이 문장이 네 고유한 마음에 어떤 의미로 닿을지 궁금해, 네 감상(感想)을 들려줘.

 

*

 

그럼 결, 한 주 동안 편안히 지내길,

동지에 가까워지는 날들 속에서도 늘 몸과 마음을 덥힐 수 있는 온기를 곁에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마칠게.



2022.12.04. 민경
추신. 인용한 시, <울고 싶은 마음>이 수록되어 있는 시집 사진을 동봉할게:)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36-2. 지난주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건네고 싶은 마음에 대해 물었어.
"싫든 좋든, 크든 작든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아"

대한민국은 지금 간 밤의 열기로 들썩이고 있겠지? 정말 좋은 선물을 주었어,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한 장면도 안 보고 일찌감치 잠들어 버린 내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축구 경기 결과를 물어보았을 때 남편이 ‘우리가 이겼다!’라고 대답했어. 거짓말인 줄 알았어. 그리고나서 주장인 ‘손’의 어시스트를 받아 황희찬 선수가 골을 넣는 장면을 보았고 ‘손’의 뜨거운 눈물도 보았어. 정말로 기뻤고 마음이 정화되는 과정을 느꼈어.


‘어시스트’라는 용어의 정의를 찾아보니 [축구ㆍ농구ㆍ아이스하키 따위에서, 득점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선수에게 공을 보내는 일. 또는 그런 선수.] 라고 하네. 손흥민 선수가 공격수이기는 하지만 도움을 주었고 그 도움을 받아 역전골이 터졌어. 골을 넣은 선수에게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지만 칠,팔명의 상대 수비수를 뚫고 어시스트를 해 준 ‘손’을 칭찬하는 뉴스도 못지않게 자자하다.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아도 가슴 벅찬 감동이 여전할 것 같아.


네가 도움을 받았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마침 기막힌 어시스트가 간밤에 터졌기에 연관시켜보느라 주저리 주저리 축구 이야기를 늘어놓아보았어. 네게 도움을 주었던 경찰관들의 기본 마음도 분명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 이었을거야. 나도 어렸을 적에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서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


예전에는 남의 도움을 받고 도움을 되돌려 주기도 하는 일이 익숙하였지만 요즈음은 가속도를 붙여 개인화되는 사회 이다 보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경우가 대다수 인 것 같아. 오늘 근무 중에 동료들과 얘기를 하다가 ‘세신사’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어. 공중 목욕탕에 안 가 본지 오래 되어서 내가 알 수가 없었던 거야. 그리고 전해 들은 요즈음 공중 목욕탕 풍경이 내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대신 돈을 지불하고 세신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어. 도움을 받고 대신에 금전으로 해결을 하는 것이지. 그리고 예전에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길을 물어보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도 차창문을 내려 행선지를 물어보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는데 지금은 네비게이션을 쳐다보면서 바로 코 앞에 있는 목적지를 못 찾아 뱅뱅 돌기도 하지. 서로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불편해하고 왠지 되갚아 주어야하는 빚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도 예외는 아니야. 심지어 좀 별나다 싶을 정도로 도움이나 신세 지기를 싫어하지. 하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싫든 좋든, 크든 작든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아.


나는 살면서 서너 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내가 신체적으로 나약한 상태이고 심리적으로도 불안정적인 상태였다는 것이지. 그 때는 가장 밀접하게 나를 돌보아주었던 간호사분들의 도움이 강하게 고맙게 느껴졌어. 물론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 일을 하는 과정이었겠지만 다정한 말 한마디가 많은 위로가 되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참 고맙다’라고만 생각하였지,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 도움을 받으면서 그 고마움을 돌려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리고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경우도 흔하지 않지. 그래서 그 양자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일을 하다 보면 걸핏하면 당연한 듯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어쩌다가 아주 미안해 하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절대로 남의 신세 따위는 안 지고 살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이 도움을 구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아. 포인트는 도움을 주고 받는 일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겠지.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고 있어. 해피한 연말 되기를 바래.

"내가 돈이 아니라 사람으로 여겨지는 기분은 처음이었어"

민경이 안녕❤️ 먼저 집에 아무 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도 혼자 살면서 며칠동안 우리집 문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에 112에 신고했던 적이 있는데, 죄송하다는 내 말에 잘하셨다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해주시던 경찰분들이 떠올라. 그 말에 내 공간이 보호받는다는 생각을 조금은 했던 것 같아.


똑같이 전하고 싶은 마음을 받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바로 생각난 사람이 있어. 대학교 3,4학년 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식집 사장님인데, 늘 “잘한다”, “고맙다” 해주시던 분이야. 그 말에 힘입어 더 열심히 했던 것도 있지만, 그분의 말이나 행동에서 진심으로 존중해줌을 느꼈거든.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알바생 밥은 먹여야 한다며 자리를 만들어 밥을 챙겨주시곤 하셨어. 수많은 알바를 하고, 다양한 사장님들을 만났지만, 내가 돈이 아니라 사람으로 여겨지는 기분은 처음이었어. 그래서 당시에는 ‘나도 저런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하곤 했는데, 취업 준비하느라 연락도 제대로 못드렸네. 조만간 맛있는 거 사들고 봬러 가야겠어.


겨울은 겨울 다워야지 생각하며 요즘 추위에 아쉬움을 느끼는 중이었는데, 똑같은 말을 너가 해서 너무 신기하다. 이래서 친군가!ㅎㅎ 나는 딱 오늘 수습 기간이 끝났는데, 3개월이란 시간이 너무 금방 지나간다는 사실에 조금 긴장되는 아침이야. 그래도 좋은 한 주를 보낼 거야, 너도 나도 ☺️ 이번주도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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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답장을 읽으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회에서 도움은 돈을 받고 제공받는 서비스가 되었다는 말이 특히 공감되었어. 나 또한 그런 사회에서 살다 보니 도움받는 걸 미안해 하는 것을 넘어 무서워하게 된 것 같아서, 그 마음을 바꿔보려고 책상 옆 격언 메모들 옆에 '도움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 것'이라는 메모를 붙여두기도 했어. 뭐든 잘 받아야 잘 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건 사실 많지 않으니까. 너의 말대로 균형을 잘 맞추어 앞으로도 도움받고, 또 주며 살고 싶어. 포근한 연말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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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이 아니라 사람으로 여겨지는' 기분을 처음 안겨준 분이라니, 정말 질문을 듣고 바로 떠오를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마음을 네가 언젠가 받았다니 나도 덩달아 기뻐. 너도 아마 그분을 닮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을 거야,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겨울 다운 겨울을 맞으며, 가쁘고 조금은 긴장되는 일상을 맞이하고 있구나. 빠르게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도 머물고 싶은 순간들에 부족함 없이 머물 수 있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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