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82회 (2022.12.07)
▲ 최휘 시인이 직접 찍은 시집 사진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고 동시를 쓰며 이 계절을 쓰고 있는 최휘입니다. 계절을 쓴다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실일 텐데 이번 계절에는 유독 계절을 쓴다는 사실이 체감됩니다. 아마도 제 삶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기 때문일 거예요. 첫 동시집 『여름 아이』가 출간되었거든요.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자다 문득 깨었을 때도 떨어진 단풍잎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도 설렘과 두려움이 이 계절과 꽉 맞물려 온통 저를 몰고 다닙니다. 

십일월을 지나 십이월을 향해 가는 지금, 내 몸의 동작 하나하나에 말랑말랑한 힘이 실려 있어요. 아직 나조차도 침투해보지 못한 내 몸의 어떤 곳까지 설렘과 두려움이 파고들어요. 이 놀랍고 신기한 체험 속에서 독자 여러분과 시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기쁠 뿐입니다.

💛최휘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눈썹 (홍일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 


눈썹은 가볍고 여린 들창 같은 것

그렇게 말하면 어디선가 혼자 비 맞고 있는

눈물방울 같은 아이


차라리 가시철조망이라고 하자

철조망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자


눈썹 아래 잠드는 밤바다

격랑과 해일이 잦아든 사이 낡은 구두를 덜거덕거리며 심해를 걷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 온지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우우 떼지어 몰려다니는 슬픔의 군단이 있다

어군탐지기에 잡히지 않는 

글썽이는 방향이 있다


무작정 찾아간 바닷가 민박집

다 잊고 죽은 듯 잠만 잔

관 속의 사나흘

긴 눈썹 아래 오래 젖어 뒤척이던 날


해안가 가시철조망을 바다의 눈썹이라고 부르며 걷던 저녁이 있다

가늘게 흐느끼는 모래알의 아득한 울음 끝

눈물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주던

몸안에서 돋아난 여러 올의 빗살무늬


눈썹은 때론 광물성

생의 지각을 뚫고 나온 한 마리 그리마처럼

힘든 문제 하나를 안고 바다에 간 일이 있어요. 그 문제를 출렁이는 바닷가에 내려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죠. 그때 “어디서 온지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우우 떼지어 몰려다니는 슬픔의 군단이 있다”라는 문장이 불쑥 떠올라, 그 시를 찾아 읽었어요. 제 안의 문제가 “어디서 온지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어떤 군단처럼 막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눈썹은 가볍고 여린 들창 같은 것”이라는 첫 행을 읽는 순간, 눈썹이라는 기관의 새로운 발견에 제 가슴이 뛰었어요. 이렇게 멀리 떠나오지 않아도 제가 숨어들 은밀한 곳을 찾아냈기 때문이에요. 

눈에는 숨어들 수 없어요. 눈으로는 영혼이 너무 잘 보여요. 애써 뜨고 있지만 벌겋게 충혈이 되거나 데굴데굴 굴리거나 시선을 못 맞추거나 하다가 끝내는 울어버리기도 하죠. 입도 숨어들 만한 곳이 아니에요. 낮에 들은 어떤 말들을 다시 뱉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거든요.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마태복음의 말씀도 있잖아요. 벌름거리는 코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귀도 숨어들 곳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내 몸의 기관을 탐색하는 동안 저는 어느새 문제를 잊어버리고 보물찾기를 하듯 신이 났어요. 

맞아요. “눈썹은 가볍고 여린 들창 같은 것”이라는 은유는 정확하고 아름다웠어요. 눈을 조금 치켜뜨면 바로 들창을 열 수 있잖아요. 그 들창을 열어 나만의 바람을 쐴 수 있잖아요. 그러다 누군가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들창을 닫을 수도 있으니 정말 신비로운 은신처 아닌가요. 우리의 몸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은신처를 잘 활용해보려고 합니다. 숨고 싶지만 무작정 숨을 수 없을 때 저는 눈썹에 숨을 거예요. 그럴 때 그 눈썹을 “가시철조망”이라고 부를 거예요. “철조망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거예요. 여러분도 이 시를 읽고 투명 망토처럼 금세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몸의 은신처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 가깝고 너무 잘 숨겨져서 너무 안심이 되는 장소 말예요. 저는 이제 눈썹입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제10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오늘의 시믈리에, 최휘 시인의 신작 『여름 아이』🌿
구독자 님, 마지막으로 동시를 읽었던 게 언제인가요? 꽤 오래전인가요?🙃 오늘은 동시문학에 당당히 첫발을 내디딘 최휘 시인의 『여름 아이』를 소개드려요. 『여름 아이』는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작이기도 한데요. 145: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로 선정되었어요.  최휘 시인의 동시들에  "다정하고 발랄한 감성"과 "삶의 가혹함과 절망"을 담아내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뜨끔하게 했다고 해요. 동시는 어린이 뿐만이 아니라, 그 시절을 지나온 모두가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장르입니다. 우리 『여름 아이』 속 한 구절로 동심을 찾아볼까요?

💚최휘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네 개의 심장 (김개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


스물몇 살 때 우리가 가진 거라곤 복숭앗빛 볼과 양말 뒤꿈치의 감자알 같은 구멍, 곰팡이 슨 냉동 커피, 그리고 유리창을 깨뜨릴 것같이 가파른 호흡이었다. 좁고 컴컴한 방에 우리는 분수에 맞지 않게 화려한 거울을 걸었다. 흰 장미가 둘러진 거울은 수은같이 탐스럽고 위태롭게 빛났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거울 앞에 서서 오지 않을 따뜻한 세계를 그려보았다. 가스 같은 입김이 흘러나왔다. 우리의 입술은 말린 표고버섯같이 거칠었지만 우리의 언어는 파티장을 뛰어다니는 연인들의 것이었다.

노예같이 거칠었던 우리는 내어줄 것이 없어서 고래의 뱃속과도 같은 허기를 채울 수가 없어서 서로에게 서로를 먹여주기로 했다. 달아오르던 전기스토브. 토끼의 눈알과도 같이 붉은 불빛 아래 우리는 깡마른 척추를 구부려놓았다. 30년 만에 찾아온 한파가 유리창에 하얀 산맥을 만들고 우리는 소름에 전 옷을 입었다. 얼음같이 단단한 서로의 눈동자를 깨고 갈 수 없는 곳까지 헤엄쳐갔다. 우리는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겨울을 나는 포유류. 선이 벗겨진 코드를 꽂으며 심장에 화상을 입었다. 우리는 그림자에도 심장이 있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무심코 읽기 시작한 시집의 어느 페이지에 온통 휩싸이는 그런 날. 이 시를 읽은 하루가 꼬박 그랬답니다. 시 속의 화자가 “너의 이십대는 어땠어?” 이렇게 묻는 것 같았어요. 그와 날이 새는 줄 모르고 한바탕 수다를 떠는 것 같았어요. 몇 시간을 떠들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아득해지는 것 같았어요. 흔들리는 기억의 조각을 혼자서 어루만져보는 것 같았어요. 

스물 몇 살, 그때의 저는 몇몇 친구들과 뭉쳐 다녔어요. 동전처럼 굴러다녔어요. “우리 홍도 갈까?” 그렇게 말해놓고 그날부터 우리는 ‘홍도 4인방’이 되었지요. 누구는 일을 가졌고 누구는 일을 갖지 못한 날들이었어요. 퇴근을 하면 홍도 4인방은 벌써 내 방에 들어앉아 화투판을 벌이고 패를 떼고 속옷만 입고 방안을 돌아다녔어요. 우리는 배달음식으로 방바닥을 어질렀고 홍도는 가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내 방은 자꾸 우리의 방이 되어가고, 우리의 방은 밥물처럼 끓어 넘쳤어요. 

홍도 4인방은 지금 각자의 집에서 살아요. 어쩌다 전화로 밥 한번 먹자를 반복하면서요. “우리 홍도 갈까?” 이제는 아무도 이 말을 하지 않아요. 우리의 아득한 젊음이 뭉클하게 묻어 있는 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거예요. 마치 서로를 옛날 그 방에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요. “스물 몇 살 때 우리가 가진 거라곤 복숭앗빛 볼과 양말 뒤꿈치의 감자알 같은 구멍, 곰팡이 슨 냉동 커피, 그리고 유리창을 깨뜨릴 것 같이 가파른 호흡이었다”라는 문장에 오래 붙들려 있다 보면 보여요. 방식과 태도는 서로 다르지만 이십대 특유의 혼란과 그림자가 보여요. 이 시에는 젊음의 방황과 그 시간을 견디는 안쓰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이 시집을 들고 어둑한 구석을 파고들어가보세요. 어둠의 질감, 어둠의 억양, 어둠의 굴곡, 어둠의 무덤, 어둠의 비린내, 어둠의 분비물과 한참을 뒹굴고 나면 다시 환한 곳이 그리워질 거예요. “우리는 그림자에도 심장이 있었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주욱 긋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시집 『우리 모두』와 평전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을 옮긴 고영범 번역가입니다. 카버의 삶과 문학의 여정을 따라간 책 『레이먼드 카버: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를 집필하기도 하였지요. 고영범 번역가가 고른 두 편의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주 수요일을 기대해주세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우시사> 덕분에 제 계절은 늘 계절의 온도에 맞게 빛나요. 사랑합니다.

💬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잘 느껴졌어요 편지 중에 나는 상처보다 커. 나는 결코 상처에 잠식당하지 않았어라는 문장을 자꾸 곱씹게 됩니다.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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