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출세의 밑거름으로 생각한 적은 없어요. 사실 유학이라는 말도 조금 민망할 정도로 학업보다는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 그리고 새로운 언어로 살아보고 싶다는 호기로 떠났거든요. 외국인으로서의 생활은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는데요. 어떤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사는 경험은 내가 세상의 얼마만 한 일부분인가를 알게 하면서 내면의 성장을 도왔고, 서울에서 프랑스까지 넓어진 행동반경은 장소, 환경에 대해 의연한 태도를 만들어준 것 같아요. 

예술은 삶과 많이 동떨어져 있고 그 간극을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가가 늘 의문이었어요. 예술 서적만 보더라도 그 신에서 사용하는 어휘가 참 다르죠. 또 매사에 심각하고 심드렁한 ‘예술가적’ 태도는 참 피곤한 부분이고요. 게다가 모호하고 애매하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미덕으로 통하는 예술이 이 험한 세상에 무슨 영향력이 있나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예술을 무척 사랑하고 저마다 힘있는 세계를 구축하는 예술가를 보면 탄성이 나온다는 것이에요. 이 상태라면 예술가보다는 예술 애호가가 적합하죠. 미련이야 약간 있었는데 예술과 삶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애초에 예술가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어요. 그건 기획자나 큐레이터, 비평가, 에디터, 디자이너 같은 사람들의 일이죠. 이들 덕분에 예술이 예술로 존재할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이 예술가보다 더 예술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면 시작과 끝이 확실한 책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책임감 있는 예술적 실천이라는 생각에서요. 

이번 31호 다미 님의 인터뷰를 읽으며 영감도 얻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안의 예술적 감각을 다시금 깨워주셨다랄까😆 모든 글, 이미지 하나하나가 오랜만에 술술 잘 읽히고 너무나 도움 되는 책 한 권 읽은 기분이었어요!

첫 번째 월페이퍼는 다미 님의 개인전 관련한 질문의 답변을 읽고 영감을 받았는데요! 제 개인작업과도 긴밀한 연결고리를 발견했다랄까! 기억과 기록, 까마득히 잊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경험, 예술은 기억을 전제로 탄생한다는 말 하나하나 너무나 공감이 되었어요. 기억과 기록이 때로는 좋은 영감과 소재가 되기도 하고요! 기억이라는 ‘점’ 하나하나 이으면 아트가 된다는 아이디어를 비주얼화했어요! 

'All art is a memory of age-old things, dark things, whose fragments live on in the artist.'- Paul Klee 모든 예술은 오래되고 어두운 것들의 기억이고, 그의 조각들은 예술가로부터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