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 작가는 서울과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로, '숯'이라는 한국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숯의 화가’라고도 불니다.

그가 이렇게 숯을 본인의 대표 소재로 선택하게 된 이유는 프랑스에 거주하던 시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민한 자에게 답이 찾아오듯, 그는 어느 날 우연히 그를 평생 대표하는 재료인 숯과 조우합니다.

타지, 특히 외국에서의 삶은 현실적이게도 경제적 문제를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10시간 이상을 작업하는데, 전부 물감을 사용하기엔 도저히 재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손가락 만한 유화물감 하나가 2~3만원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500원 정도 하는 숯 한 봉지면 일주일을 작업할 수 있게 되면서, 재료에 대한 고민과 비용 부담을 모두 해결하게 되습니다.

이렇게 발견한 숯에 그는 한국을 담기로 합니다.

옛 한국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에 금줄과 함께 숯을 걸었던 기억, 장을 담글 때 숯을 띄우던 기억, 숯을 갈아 만든 먹으로 그려내는 동양화 등

한국의 일상에 연결된 숯의 기억들을 떠올려 이를 정체성으로 연결지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러온 숯은 아주 동양적인 소재이기에, 그대로 제시한다면 서양인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을 것이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정체성을 담으면서도 서양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방법론을 적용합니다.

바로 숯을 짓이겨 캔버스에 발라, 마티에르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서양의 마티에르가 물감을 두텁게 발라 질감이 느껴지게 하는 것이라면, 이배의 마티에르는 마치 동양화에서 화선지에 먹물을 먹이듯이 미디엄을 발라 숯가루가 안으로 스며드는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내가 세잔이나 모네를 이해하는 것 만큼

서양에서 겸재나 추사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열망이 있었다”

*마티에르(matière) : 질감

이배가 숯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순환과 반복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태우고 난 검은 숯에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근원적인 힘이 스며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의 끝을 보면 결국 숯으로 귀결되므로 숯은 모든 사물의 정수, 즉 에센스입니다.

숯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굉장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습니다.

이배가 표현한 숯은 꺼진 생명이 아니라 불을 붙이면 다시 타오르는, 생명력을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무로 탄생해 자신의 몸을 불태워 숯이 되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구조를 통해, 이전까지는 죽음을 상징했던 숯이 이배의 손길을 거치며 에너지를 가진 존재로 재탄생 했습니다.

숯에서 발견한 순환의 개념은 드로잉, 회화, 설치 등 여러 형태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캔버스에 자른 숯 조각들을 나란히 이어붙이고 표면을 연마한 불로부터 (Issu du feu) 시리즈,

숯가루를 짓이기고 미디엄을 섞어 화면에 두껍게 안착시킨 풍경(Landscape) 시리즈,

목탄에서 추출한 검은 안료로 형태를 그리고 여러 번 덮는 아크릴 미디움(Acrylic medium) 시리즈,

숯가루가 섞인 먹물로 다양한 형태의 붓질 그대로를 보여주는 붓질(Brushstroke) 시리즈,

숯과 브론즈 자체를 전시하는 조각, 설치 작업 등

다양한 형식으로 숯의 잠재성을 탐구하며 명상과 성찰의 거대한 동양 문화권을 담아냈습니다.

숯 조각을 캔버스에 배치하고 사포로 표면을 갈아내면, 숯이 머금고 있던 광택이 은은하게 드러납니다.

다양한 크기, 서로 다른 연마 과정을 거친 숯 조각들은 각각의 색과 빛을 다채롭게 뿜어내 보는 이의 시선과 방향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합니다.

숯 가루를 짓이겨 화면에 두껍게 붙이는 풍경 시리즈는 풍경이 가지는 색채와 물성을 다양한 숯을 사용해 구현하여, 또 하나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자연을 그려냈습니다.

‘불로부터’와 ‘풍경’ 시리즈는 숯을 직접 자르거나 붙여, 숯이라는 물성 자체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면, 비교적 근래에 이루어진 ‘아크릴 미디엄’, ‘붓질’ 연작은 숯의 영혼을 끌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디엄 : 미디엄은 아크릴의 보조제 중 하나입니다. 젯소나 바니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텐데요, 이것들이 대표적인 아크릴 보조제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그리지 않는 것은 값어치가 없다고 보지만

흰 부분은 밀랍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

에너지를 붓끝에 담아 한 번에 표현해 내는 '붓질' 작업은 기운생동이라는 한국 수묵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삶과 죽음, 순환과 나눔 등 숯이 가진 태생적 관념 위로 붓자국을 통한 작가의 몸짓과 호흡, 에너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기운생동(氣韻生動) : 기운이 충일(充溢)하다는 의미로, 중국 회화의 작풍에서 최고 이상으로 삼았던 개념입니다.

천지 만물이 지니는 생동의 기풍이 화면에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배 작가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흑과 백의 모노크롬을 읽어낼 수 있는데요,

작가는 검정이 다 같은 검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굽기에 따라, 나무 부위에 따라, 나무를 자르는 작가의 손길에 따라, 나무가 숯으로 변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숯 안에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검은색이라고 하면 그냥 어두움 그 자체, 빛이 없는 것으로 이해해요.

사실 검정은 모든 색깔을 흡수해야 나올 수 있는 색입니다. "

작가는 빛과 어두움, 형태와 공백, 존재와 부재,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숯’을 통해 전합니다.

숯의 검정과 흰 선의 드로잉이 만나며 흑과 백, 음과 양, 명과 암의 공존을 이야기합니다.

한국을 떠나 30년 간 파리에서 활동하며 숯을 만났고, 숯에서 찾아낸 다채로움을 먹빛으로 구현하여 동양의 뿌리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현대성을 담아내는데 성공했고, 동양화의 수묵 정신을 재해석하여 숯이 주는 서체적 추상으로 한국형 모노크롬의 대단원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표현하고자 한 강인하고 따스한 온기의 색, 모든 것을 포용한 숯의 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