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zuyeon loves u 💛
여행을 떠나던 날 두 번째 서신을 발송했습니다. 돌아온 지 4주가 다 되어가네요. (이틀이 되어가네요, 일주일이 되어 가네요, 2주가 되어가네요, 3주가 되어가네요….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수정했는지 모릅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이상하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습니다.) 여행지에서는 일주일 내내 기차를 탔고 매번 다른 마을에 묵었습니다. 레일패스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머니에 잘 챙겨두어야 했지요. 바지런히 이곳저곳 걸음을 옮기며, 짊어진 짐이 참 많고 무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배낭이나 캐리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너무 가벼웠습니다. 여행지에서 제가 책임져야 할 것은 여권과 지갑, 오로지 그뿐이었으니까요. 여러분은 내가 진 짐을 실감한 적이 있나요? 어느 순간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짐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짐이라는 단어를 책임으로 바꾸어봅니다. 어쩌면 중요한 건 짐의 무게보다도 짐의 무게를 느끼는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여유는 짐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했습니다. 조금 아이러니하네요.
  쪼꼬만 이야기 01 ー만화책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이후 한창 『슬램덩크』 붐이 불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 여운 속에서 저마다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있는데요, 저는 등장인물만 아는 정도라 그 물결에 함께하는 대신…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 보는 걸 좋아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대가 없이 좋아하는 얼굴은 대체로 순해 보입니다. 『슬램덩크』에 푹 빠진 착한 표정들을 가만가만 바라보며 만화책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어릴 땐 매일 밤 부모님 사이에서 잠들곤 했습니다. 두 분은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었고, 책 읽기가 끝나면 불을 껐습니다. 그 사이에서 엎드려 그림책을 읽다 잠이 드는 건 매일 저녁 반복되는 일과였습니다. 그러니까, 독서란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눈을 뜨면 세수를 하는 것처럼, 누구나 반드시 하는 행위인 줄 알았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책 읽는 게 선택적 행동임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수업 시간에 '꼭 해야 하는 일과'를 하나씩 이야기하는데 아무도 책 읽는 이야기를 하지 않더군요. 손을 번쩍 들고 "책을 읽고 자야지요!"라고 했다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습니다. "잘난 척한다."면서요. 얼굴이 뜨거워지고… 숨고만 싶었습니다. 나는 잘난 척하려고 그런 게 아닌데…. 아직도 좀 억울하네요.
밤이면 당연히 해오던 그 행위가 싫지 않았으므로, 독서가 좋아하는 일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한글을 깨치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뒤로 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읽었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책이었으며, 엄마의 가계부거나 때때로 과자 봉투에 적힌 성분표이기도 했습니다. 읽다 읽다 더는 읽을 것이 없던 어느 날, 손이 닿지 않는 책꽂이 꼭대기 칸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바퀴가 달린 의자를 책장 앞에 갖다놓고 깨금발을 뗐지요. 마침 그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가 새된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습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올라가는 게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지금도 종종 올라가곤 합니다만 비밀로 해주세요.) 얌전한 아이였기에 야단맞을 일이 별로 없던 저는 놀란 얼굴로 타이르던 엄마 얼굴을 선연하게 기억합니다. 왜 그런 일은 잊히지도 않을까요.

글자라면 일단 읽고 보기 바빴고, 책을 양손에 쥐는 걸 좋아하던 아이였지만, 만화책만큼은 유난스러울 만큼 멀리했습니다. 그런 아이가 된 데는 '비디오'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비디오라는 매체를 알고 있나요? 플로피디스켓을, 유선 전화기를 모르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비디오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쪼꼬만 이야기 02 ー비디오
비디오를 재생하면 파란 화면, 혹은 검은 화면에 *경고*가 뜨곤 했습니다. 무단 복제를 금하는 경고 문구가 지나가면 이런 음성이 들려왔지요.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수한 영상 매체인 비디오를 바르게 선택, 활용하여 맑고 고운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되어야겠습니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라는 대목에 빨간 딱지가 붙은 만화책을 보는 청소년들 영상이 송출된 걸로 기억하는데요.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장면이 없어서 퍽 의아합니다. 분명히 선정적인 만화책을 넘기는 아이들 그림 위로 엑스 표가 그려지는 영상을 본 기억이 있는데 말입니다. (혹시 저와 같은 장면을 기억하는 분이 있나요?) 비디오 경고 영상 때문에 만화책도 멀리하게 되었다고 굳게 믿었는데, 이 스토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건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저는 만화책이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잘못 이해한 채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엄마가 만화책도 읽어야 한다며 전권을 사다 주신 적도 있는데 본체만체했습니다. 보지 말란 걸 보고 싶어하는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화책과는 멀어진 채 자라났지요. (그러나 만화영화는 아주아주 좋아했습니다.)
<요괴인간>
제가 살면서 빌려본 비디오의 8할(아니, 9할, 아니, 9할 5푼)을 차지할 작품입니다. 어린아이가 보는 만화라기엔 무섭고 기괴합니다.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어 작년 봄 즈음 반가운 마음으로 몇 편 골라 보았는데, 여전히 오싹하더군요.  다듬어진 그림체로 새롭게 방영되거나, 조금 다른 느낌으로 리메이크되거나, 3D로도 나온 것 같은데요. 편평하고 납작한 오리지널이 가장 무섭습니다. 오프닝이 꽤 인상적인데 거기서 베로(가운데 빨간 옷을 입은 아이)가 이렇게 소리치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 편 정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여기눌러보세요. (무서우니까 긴장하시고요.)
  쪼꼬만 이야기 03 ー드라마
어릴 때 만화영화만큼은 부지런히 보아왔는데요. 그 까닭인지 제가 번에 소화할 있는 영상 러닝타임은 딱 그 정도입니다. 30 남짓. 그래서 영화는 마음먹고 보는 편이고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습니다. 시트콤을 제법 좋아했는데 이제 시트콤은 거의 사라진 장르가 되었지요. 제가 그나마 손쉽게 펼쳐보는 장르가 있다면 일본 드라마입니다. 대개 30 정도이기 비교적 부담없이 있는데요. 이번에 드라마가 정말 좋았습니다.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있나요? 에이로맨틱은 '연애적 지향의 하나로, 다른 사람에게 연애 감정을 품지 않는 것', 에이섹슈얼은 '성적 지향의 하나로,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엔 다양한 모양의 사랑이 있습니다. 다양한 태도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리고 사랑은, 누군가에겐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한 적이 없고, 성적 욕구를 느끼지 않는 남녀가 한집에 함께 살며 (임시) 가족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공식적인 드라마 소개에서 한 문장을 빌려올게요. "사람을 좋아한 적 없고, 왜 키스를 하는지 모르고, 연애도 섹스도 알지 못한 채로 망설이던 여성 앞에 나타난 연애하고 싶지 않은 남자와의 만남."


*스포는 없습니다만 약간의 대사도 보고 싶지 않다면 아래 이미지는 넘어가 주세요.

*일기장엔 글씨를 괴발개발  씁니다. 후후.

세상엔 똑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똑같은 성격, 똑같은 생김새의 사람도 없고요.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온 몇 번의 연애 역시 형태와 분위기와 마음이 달랐는데 타인의 사랑이라고 같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어떤 기준이나 범주 같은 것, 나아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윤리적인 차원을 해치지 않는 한 모든 사랑을 존중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한다고 믿으니까요. (나의 사랑도 파이팅!💕) 

● 쪼꼬만 이야기 04 ー한마디
앞서 말했다시피 저는 만화책을 보지 않는 아이였는데요. 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어른이 되고 나니 만화책에 소설과는 다른, 그림책과도 다른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군요. (늦바람이 무섭다고, 제 책장엔 어느덧 100권을 넘어선 <명탐정 코난>이 빼곡하게 전권 꽂혀 있….)

여러분은 『요츠바랑!』이라는 만화를 알고 있나요? 『아즈망가 대왕』 쓰고 그린 아즈마 키요히코의 작품입니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요. 요츠바를 보고 있으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어린 시절이, 아직 여기 있다는 듯 반짝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그것을 안심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언젠가 일본 친구에게 신세 한탄하듯 요츠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답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일기장에 한 자 한 자 옮겨 적으며 지금 내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을 되뇌어 보았습니다. 모처럼, 정말 모처럼 어른이 되었으니까 형편없어지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소중한 기억은 거기에 두고, 지금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모처럼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일본어여서 오역일 수도 있습니다. 종이를 거꾸로 놓고 거꾸로 쓴 글자라 잘 안 읽힐 수도 있고요.
● 쪼꼬만 답장에 답장
● 쪼꼬만 질문 [ Q3. 오늘 무슨 생각했어요? ]
[ Question3. 오늘 무슨 생각했어요? ] 세 번째 질문입니다. 저는 너무 많은 생각에 휩싸여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생각을 멈추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 오늘 하고 싶은 생각 하나만 남겨보기로 합니다. (수영 가고 싶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생각을 남기고 싶나요? 생각하고 싶은 것, 생각하기 싫은 것, 생각이 아닌 것, 생각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티슈 조각에 휘갈겨 쓰듯, 종잇조각에 낙서를 하듯 아무 말이나 남겨 보세요. 기록하고 나면 분명히 나아지는 것이 있으니까요. 

시간 내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이런 걸 함께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 일러스트는 노랑의 소중한 동지 세모코가 그려주었습니다.
👻 그림 문의 환영이래요!   
stibee

이 메일은 스티비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