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마침내, 교회가 희망이다』 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마케터 B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송구영신 예배에서 나눈 인사말을 독자님께도 건넵니다. 삶의 모습과 상황은 다르지만, 새해에는 하나님의 평화가 서로의 삶에 깃들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 그 평화가 이 땅 구석구석, 특별히 평화가 더욱 절실한 이들에게 흘러가기를 바라고 다짐해 봅니다.
2024년 첫 번째 <월요일의 복음>은 1월 출간 예정인 박영호 목사의 『마침내, 교회가 희망이다』의 사전 연재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책은 박영호 목사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사경회에서 했던 강의를 엮은 것인데요. 단순히 ‘교회가 희망입니다!’라는 진부한 구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진정 교회를 희망이라고 말하기 위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희망이 될 교회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당시 사경회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후기입니다.
💬 시대를 직면하고 바라보는 인사이트와 시간과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준비하는 데 깊은 통찰의 시간이었습니다.
💬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삶, 공동체에 대한 끊임 없는 통찰과 후배들을 위한 당부, 그리고 여전히 멈추지 않으시는 눈물이 마음에 남습니다. 💬 3일 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많이 무너지고 또 위로받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한국교회에 대해, 목회자들에 대해 안 좋은 소식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때 가뭄의 단비 같은 귀한 말씀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교회가 어둠으로 뒤덮인 것처럼 느껴지는 작금의 시대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후배 사역자들에게 건네는 따스한 희망이자 위로입니다. 목사님이 건네시는 따스함은 단순한 감성적 위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세상의 소망이기에 지금도 교회가 세상의 빛일 수 있다는 은혜의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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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개구리가 나일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과 네 침실과 네 침상 위와 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 네 화덕과 네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갈 것이며 개구리가 너와 네 백성과 네 모든 신하에게 기어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출애굽기 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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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꼽아 보자면, 일과 놀이와 예배입니다. 놀이 안에는 쉼도 포함되지요. 이 세 가지가 잘되어야 인간 사회가 제대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일을 숭배합니다. 놀이를 일처럼 합니다. 예배를 엔터테인먼트나 놀이처럼 합니다. 일을 숭배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좋은 직업을 갖는 것, 돈을 잘 버는 것, 사업에 성공하는 것, 직장에서의 승진 등을 말합니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있는데,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그토록 애쓰는 것도 좋은 직장을 얻겠다는 목표를 향해 있습니다. 입시도 커리어도 지옥 같다고 표현하는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갈아 넣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가정마저도 취업이나 입시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한 전초 기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이 일에서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일이 예배가 된 사회입니다.
저는 아이를 좀 늦게 낳았습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인데, 아이와 함께 밥 먹으러 나가면 기도는 안 해도 사진은 찍어야 합니다. 맛있는 것, 예쁜 것 찍어서 SNS에 올리고 자랑합니다. 맛있는 음식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분위기가 더 중요합니다. 휴가를 가서도 그렇습니다. 놀아도 자랑할 만큼 놀아야 합니다. 노는 것으로 나를 보여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놀이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만족을 위한 엔터테인먼트가 되었습니다. 좋은 설교, 아름다운 음악, 힐링(healing)의 경험 등을 예배로 생각합니다. 요즘 교회가 어렵다, 제도 교회가 쇠퇴한다고들 하는데, 이는 사회의 다른 부분은 모두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데 교회만 힘들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가 중심에 있고 복음이 만인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면, 복음이 어그러질 때 사회 전체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은 일을 숭배하고 놀이를 일처럼 하며 예배를 놀이처럼 합니다. 말하자면, ‘out of order’입니다. ‘고장나다’, ‘질서가 어그러지다’라는 뜻이지요. 예배도 있고, 놀이도 있고, 힘도 있고,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뒤섞여 있습니다. 자기 위치를 이탈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개구리 재앙이 나옵니다. 개구리 자체는 재앙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입니다. 개구리가 언제 재앙이 됩니까? 개구리가 식탁 위에도 올라가고, 침대 위에도 올라가고, 컴퓨터 위에도 올라가면 그게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out of order’입니다. 성공을 바라는 마음, 커리어를 쌓기 위한 열심과 열망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야망이 너무 높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강렬한 야망과 욕망, 혹은 뒤처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압박감이 너무 강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이 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도구로 삼아서라도 달성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일은 소중합니다. 인간은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교역자들에게는 예배가 일이 됩니다. 예배가 내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성공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 문제를 로마서 1:25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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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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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 여기서 모든 문제가 출발한다는 것이 로마서의 진단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예배 회복의 텍스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예배의 문제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소외라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는 존재의 근원(the ground of being),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그리고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자신으로부터의 소외가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롬 1:28)고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내 인생에서 나가 주세요”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를 밀어내려다가 자기가 밀려나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타락입니다. 자유롭고 싶었는데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심각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였는데, “하나님, 나가 주세요” 하면서 그 피조물들의 노예, 곧 피조물들을 예배하듯이 섬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노예이자 탐욕의 노예로, 또 그 물질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해방이 필요합니다. 해방이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로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1). 영어 성경(NRSV)은 이렇습니다. “Let my people go, so that they may serve me.” 여기서 “serve”는 예배를 말하지요. “Let my people go”는 곧 해방입니다. 즉, 진정한 해방의 완성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백성이 될 때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집트의 족쇄에서 풀려난다고 해방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 깊이 섬기는 백성이 될 때 참된 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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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출애굽기의 맥락에서는 바로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신이다, 모든 좋은 것이 바로에게서 나온다. 아니지요. 신약 시대가 시작할 때도 동일합니다. 로마 황제가 신이다, 황제를 통해 우리의 평화가 가능하다.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해방입니다. 바로의 시스템, 바로를 신격화하는 그 핵심에 종교가 있었습니다. 저는 식탁 위에 개구리가 올라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권력에 대한 패러디일 수 있다고 봅니다. “개구리가 왜 여기 올라와? 바로, 네가 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어?” 그것이 재앙입니다. 왕이 재앙이 아니라, 왕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재앙입니다(참조. 행 12:20-24).
두 번째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돈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이 위라면 우리는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제도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제도 말입니다. 그 제도를 유지하고 강화하고 그것에 충성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제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제도 교회를 강화하고 존속시키는 것, 부흥시키고 성장시켜서 화려해 보이게 만드는 것이 과연 우리의 사명인가? 심각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제도를 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전을 섬기지 않습니다. 비전은 소중하지요. 비전에 강력한 동기 부여의 힘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비전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남용된 적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연구를 해보면 좋겠어요. 이 비전이라는 말을 많이 쓰던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한국교회를 어렵게 만든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물론 비전은 매우 중요한 성경적 가치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야망이나 탐욕을 가리고 포장하기에 좋은 단어이기도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목회를 시작할 때 내가 가졌던 목회적 이상과 현장에서 부딪히는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목회는 나의 비전이 깨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자리 잡는다면, 나의 비전이 깨지고 또 깨지면서 하나님의 비전이 만들어져 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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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빌(Gregory K. Beale)이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논지는 간단합니다. “우상숭배자에게 내리는 가장 큰 벌은 우상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사 6: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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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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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지만, 적어도 “가서 말하라. 그러나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는 이 말씀 자체가 아주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시편 115:4-7을 읽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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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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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지요? 빌이 말하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우상, 나무로 만들고 쇠를 녹여 만든 우상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가장 큰 벌은 그가 우상처럼 되는 것입니다. 탐욕을 예배하면 탐욕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권력을 숭배하면 폭압적인 사람이 됩니다. 쾌락을 예배하면 음란한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처럼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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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번째 <월요일의 복음>은 박영호, 『마침내, 교회가 희망이다』(24년 1월 출간 예정)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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