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주 풀칠 마감 당번 파주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매번 같은 인사가 진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요. 풀칠 레터에서는 매번 님의 안부를 묻습니다. 한 주간 무탈하셨기를, 되도록 좋은 일이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요.

저는 올해 초 정신과에 방문했습니다. 정확히는 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인데, 큰 사건사고가 있던 것은 아니고요. 성인 ADHD 증상에 대한 의심도 들기도 했고, 그저 지금의 상태가 정상인지를 체크해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당시 병원에 오가며 스마트폰으로 썼던 일기를 여러분께 공유합니다. 저를 상담해 주신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울증은 ‘마음의 디스크’ 같은 거라고 하더군요.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면 디스크가 호전되듯이, 마음을 성실하게 토닥이다 보면 분명히 나아질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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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에 가기로 결정했다.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급작스런 사건이나 사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지금의 삶이 도저히 정상인 거라 믿기지가 않아서, 이 상태 그대로라면 도무지 오래도록 살 자신이 생기지 않아서였다.

지도 앱을 켜고 ‘정신과’를 검색했다. 지도에는 사거리에 위치한 삐까뻔쩍한 빌딩부터 골목 속 골목에 있는 써금써금한 곳까지, 우리 동네에 속속들이 들이찬 병원이 표시됐다. 3년 넘게 살던 동네인데도 정신과병원이 이리도 많은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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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앱으로 몇 곳의 리뷰를 찾아보며 색깔별로 별표를 해두었다. 며칠 동안 어디를 가야할지, 나 같은 게 여기를 방문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을 거듭했다. 속절없이 바닥으로 꺼진 것 같은 어느 날, 충동적으로 별표를 해 둔 곳 중 하나에 전화를 걸었다. ‘성인 ADHD 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그거 안 해요’라는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치료가 시급한 멘탈에 되려 상처를 입은 채 스마트폰을 몇 분 간 꾹 쥐고 있었다. 다시 폰을 들어 집에 가장 근접한 곳에 전화를 걸었다. 묵직한 음성의 남성이 상냥함을 연기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주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정보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그래, 이곳이다 싶어 충동적으로 예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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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 자리한 병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서며 ‘이게 맞는걸까’ 싶은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다음 칸을 오르며 또 그런 생각을 했다. 다들 이 험난한 세상을 적당히 잘 버티고 사는데 나만 나약하게 이렇게 병원에 쫓아온 것은 아닐까. 지금의 평범한 상황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더 많은 안온함을 누리려 하는 걸까.

3층 높이를 몇 분에 걸쳐 올라선 병원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병원 대기석을 어색하게 두리번거린 뒤, 구석에 비집고 들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마치 야자 당직 교사의 매타작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짧은 기다림 뒤에 익숙한 이름이 불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던전 포털로 입장하는 심정으로 그 새하얀 문을 열어젖혔다.

이름이 불린 것까지는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의사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경계와 낯가림이 가득한 채로 방문한 연유를 묻고 답했다는 사실, 그 뒤로 나의 TMI가 쏟아졌다는 사실만 희미하게 남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주일 뒤 다음 진료가 예약되었다는 문자가 스마트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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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ADHD 테스트를 끝낸 뒤에 다시 의사 선생님과 대면했다. 의사 선생님은 묻고 싶거나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말했고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단답을 뱉고 난 뒤에 너무 정이 없어 보일까 ‘지난번에 많이 말한 거 같아서요…’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맞은편에 앉은 선생님은 ‘파주씨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 해줄 수 있나요?’라고 물어왔다. 선생님의 화법은 모두 청유형이다. 질문 또한 나의 동의를 구하는 친절하고도 사려 깊은 화법이다.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또래보다 조금은 늦게 늙어가는 낯익은 그 얼굴. 벌써 몇 십 년째 다이어트 결심을 입에 달고 사는 귀여운 말버릇 또한 귀에 자동재생됐다. 어머니가 나에게 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어머니가 나에게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물었고 나는 내가 받지 못한 것보다 과분하게 받고 있다고 답했다. 지나치게 진심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받았다는 사실, 또 그게 고마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내용은 온화한데 태도가 몹시 단호해 믿을 수 받게 없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충분히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물론 선생님은 그 말조차도 청유형으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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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했다. 검사 결과는 성인 ADHD는 아니었다. 물론 대부분의 병이 그러하듯 ADHD 또한 스펙트럼 장애이기 때문에 칼로 자르듯 맞다, 아니다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상 범주 안에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ADHD가 아닌데도 이미 나의 상태는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병이 없다면 약물이나 치료로 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솟아올랐다. 나의 불안을 감지한 선생님은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선생님이 내게 건넨 이야기는 경미한 수준의 우울증세가 있다는 것이었다. 잔뜩 걱정이 생길 만한 말을 뱉어내곤 ‘이 정도의 우울 증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며 수습했다. 그 순간 나는 선생님이 아주 프로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에도 잡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의심스러웠다. ADHD가 아니면 도대체 내가 겪는 건 뭐냐고. 선생님은 어쩌면 내가 느끼는 ADHD 증세의 원인이 우울 탓일 수도 있다고 했고, 원한다면 아주 약한 수준의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였는데 A는 효과가 강력한 대신 짧고, B는 효과가 그럭저럭이지만 10시간 내외로 효력이 있었다. 끊임없이 물었지만 결국 A와 B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건 결국 내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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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약효에 대해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3일을 제외하곤 먹는 걸 까먹는 바람에 제대로 된 효과를 체감하진 못했지만, 기대감이 서린 눈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 약을 먹고 난 뒤엔 ‘뒤지게 일하기 싫은’ 기분이 ‘그냥 할 만한’ 정도가 된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그 정도면 약효가 잘 드는 거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이번에도 궁금한 것은 없는지 물어왔다. 나는 보통 사람들도 나 만큼이나 ‘싫어하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지’를 물었다. 다른 삶을 살아본 적 없으니 다른 사람들도 일하는 게 지독하게 싫어질 때가 있는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걸 꿋꿋하게 참고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내 질문에 턱을 손으로 받치고 있던 선생님은 배시시 웃으며 무장해제된 얼굴로 답했다.

“당연하죠. 솔직히 저도 일하기 싫을 때가 있는 걸요.”

사실 이 질문의 의도는 나의 의지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뿐인데. 나를 상담해 주고 있는 의사조차 일하기 싫을 때가 있다는 말까지 듣고야 말았다. 나는 그 말이 꽤나 허접하다고 느끼면서도 확실한 위안이 됐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호르몬을 속이는 몇 개의 알약보다 무방비 상태로 튀어나온 진심이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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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방문일이 다가왔다는 문자가 왔다. 진료비를 수납하며 관성적으로 했던 예약이었다. 시간에 맞춰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으려다 이내 멈추었다. '본인만 괜찮다면 더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해달라고 말했다. 지독한 콜포비아였지만 답지 않게 용기가 났다.

병원을 다니기 전과 후, 내 주변은 여전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일하기 싫은 마음은 여전하고 내 삶은 빙글빙글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다. 나 혼자만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선생님의 말마따나 우울은 마음의 디스크 같은 것이니. 비가 올 때 유독 부지런히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우울이 들이닥칠 낌새가 보이는 날이면 충실히 하루를 살겠다고 다짐한다. 내장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맛있는 저녁을 챙겨 먹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끼지 않고 진심을 전한다. 그렇게 마음을 쭉쭉 늘리다 보면 얼렁뚱땅 돌아가는 내 인생도 자세히 뜯어보면 그럭저럭 괜찮다는 확신이 든다.

야망백수 : 절대로 병들지 않는 인간과 무리하면 아픈 인간 중 어느 쪽이 더 ‘정상적인 인간’과 가까운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아픈 걸 두고 비정상인 걸 고민해야한다면 세상이 비정상이란 방증이겠죠. 아픈 걸 인정하는 데엔 용기가, 치료받는 데엔 시간이 필요하단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요. 파주님께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길 바랍니다. 제가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다음 생에엔 꼭…) 진단을 할 순 없지만, 안부는 물을 수 있잖아요? 자주자주 안부를 여쭙겠습니다.

아매오

유명한 기업 또는 기업가를 다룬 책을 몇 권 읽어보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인물 자체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책의 완성도 면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습니다. 복잡하게 나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고요. 한번 읽어보셔도…좋을 것 같습니다ㅎㅎ

파주

교수가 아니고서야, 전공을 살리기 참으로 힘든 세상이네요. 저도 최근에 제가 쥐고 있는 것들을 돌아 보며 '나의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될 때가 잦아지는데요. 그럴 때면 <슬램덩크>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채치수는 채치수, 신현철은 신현철, 나는 누구지!'하고요. 조용한 사무실 속에서 그런 말장난을 하고 나면 조금은 리프레쉬가 되더라고요.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지만요. 고민이 들 때면 언제든 찾아와 푸념을 나누어 주세요. 이 코너는 그런 풀칠러님을 위한 것이니까요!

마감도비

험난한 일을 겪으셨군요. 고생 많으셨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동업을 해본 경험은 없지만 먼 과거 사람 여럿이서 과제 하나 하는 것도 힘들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험난한 일이었을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앞으로는 더 단단하게 일을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 대학원 졸업장 제대로 받아보자구요. 화이팅입니다.

야망백수

어렸을 때 레고를 정말 많이 갖고 놀았습니다. 레고로 해적선이며, 피라미드며 만드는 동안엔 결국 부수고 말 거란 걸 알면서도 참 열심히였던 것 같아요. 재미도 있었고요. 사는 것도 레고 갖고 노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허망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상이긴 하지만, 짓는 재미를 놓진 않는 거죠. 면접에서 좋은 결과 있으셨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