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100회 (2023.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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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는 박준입니다. 요즘은 빈터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것이지만 이런 저의 눈앞에 다시 무엇이 오게 될지 기다리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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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안개 (신기섭, 『분홍색 흐느낌』)
구름도 시름시들 늙어 아프면
땅바닥에 내려와 눕습니다 할머니
정거장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나는
그 늙은 구름들을 묻을
땅을 파고 놀았습니다
십 년을 그랬습니다 어느덧 할머니 당신이
정거장에서 나를 기다리며
그 늙은 구름들이 묻힌 땅을 밟고 서
계십니다 오늘은
몇 박스나 팔았느냐
몇 박스의 땀을 흘렸느냐
아직 일러요 요즘은 마진도 하나 안 남아요 할머니
이제 마중 나오지 마요 나도 이제, 스물셋. 이에요
어쩌면 내가 묻어준 그 늙은 구름들 속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몇 박스의 꿈들도
묻혔나봅니다
할머니 당신이 이토록 작은 몸 웅크리며
떨고 있습니다
이제 마중 나오지 마요 나도 이제 어른이에요
그 늙은 구름들을 묻은 정거장 담벼락 아래
할머니와 나는 맞담배를 태우고 오늘도
집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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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직장을 옮기면서 서울살이를 시작해야 하는데 자기는 서울 지리를 모르니 셋방을 얻을 만한 동네를 추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축하한다는 말에 이어 친구에게 보증금이 얼마나 있냐고 물었습니다. 친구는 천만원을 생각하고 조금 무리하면 이천만원까지 마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월세는 적을수록 좋으며 통근 시간은 조금 길어도 관계없으나 지하철 3호선이나 6호선이 연결된 동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할머니도 함께 올라오시니 방은 두 개였으면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그의 새 직장과 그리 멀지 않은 서울의 외곽도시를 추천했습니다. 같은 돈이라면 상대적으로 넓은 집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친구는 단호하게 꼭 서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것인데 서울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면서.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발품을 팔며 월셋집을 구하던 날, 친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넓은 평야로 이루어진 그의 고향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했을 좁고 좁은 집들을 연달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재치를 더해 “우리 동네에서는 우사도 이것보다는 큰데”라고 농담을 했지만 제 귀에는 마냥 씁쓸하게 들렸습니다. 어쩌면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으니까요. 누구도 추천해줄 수 없는 낯선 시간을 친구는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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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폭우와 어제 (안미옥,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우산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는 아니다
모자를 쓴 사람이 있다
그건 나였을 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 할 때
뿌리가 깊어서
꺾이지 않는 나무구나
비는 오늘만 오는 것이 아니고
내일은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불투명한 얼굴
내일 또 공원에 갈 것이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잠깐씩 어제를 생각할 것이다
어제는 구름 같고, 쟁반 같고, 빙하 같고, 비탈 같고, 녹고 있는 소금 같다. 햇빛에 투명해지는 초록 같고, 안부를 묻는 부케 같고, 부은 손 같다. 상한 빵 같고, 어린 개의 솜털 같
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 같다.
어제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공원 앞 찻집에 앉으면
또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제는 어제를 버릴 수 없었다
가방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묶어둔 사람은 잊지 못하고
언제까지 착한 나무가 되어야 할까
얼마나 더 큰 나무가 되어야 할까
오늘은 기필코 가방을 열어보기로 한다
가방을 열어보려고 손잡이를 잡는다
또 손잡이를
이젠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어제가 다 닳아서
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나누지 않고 돌보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그런 이야기
누군가가
제멋대로 들어도 좋을 이야기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행을 가서는 여행만 하고
돌아올 땐 돌아오기만 하고
집에서는 집에만 있었다
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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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매일 시를 쓰거나 읽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 없습니다. 드문 일이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희열을 느낄 때 시집을 펼치거나 펜을 드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과 마주하거나 잔을 들어야지요. 아니면 울어야지요. 마음에 들불 같은 슬픔이 일어날 때도 낱말들은 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울음을 참거나 아니면 또 울어야지요. 생활의 평정과 마음의 평온이 없다면 시도 없습니다. 시를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잦아들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비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시의 순간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생각을 떠올릴 때와 틀림없이 같습니다. 스스로가 싫지도 부끄럽지도 않을 때, 내가 나인 것이 다행스러울 때 좋은 것들은 그제야 불쑥 찾아옵니다. 오늘 내가 새롭게 시 한 편을 만나게 된 것은 모두 어제로 끝이 난 나의 어제 덕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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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사> 시즌1 마무리 인사 새로이 돌아올 거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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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시를 사랑해>팀입니다. 2021년 4월 21일 첫 호를 시작으로 지난 이 년간 매주 두 편의 시를 보내드렸는데요, 첫 호부터 꾸준히 함께한 분들은 시집 네 권 분량의 시를 읽어온 셈입니다. 독자분들과 저희 사이에 쌓인 시간이 편편의 시들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그간 즐겁게 이어왔습니다. 오늘 100호로 <우시사>는 시즌1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5월 한 달 재정비하여 6월 초, <우시사> 시즌2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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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 놓고 살고 싶은 요즘 해야 하는 일을 잊지 않으려고 양 손가락을 다 폈다 접으며 진을 빼는데 레터 읽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이지, 기억합니다. 💬 스스로에게 저, 저, 하면서 미뤄둔 말이 많은 요즘이었습니다. 말은 없어도 마음은 차고 넘치는 지금 마침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퇴근길에 미뤄뒀던 <우시사> 콘텐츠를 보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바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내가 놓치는 것들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따뜻한 것들이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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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를 사랑해>에 관한 구독자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시사>팀은 매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독자분들의 피드백을 읽고 있어요. 이번 레터는 어땠는지, 어떤 시가 구독자님 마음의 문을 두드렸는지, <우시사>를 통해 어떤 시를 만나고 싶은지 등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요. 지난 이 년간 <우시사>와 함께한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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