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본전 생각이 날 때
밑줄일기
-월요일 아침 출근길을 앞둔 당신에게 드리는 사소한 편지

#004.나의 취향에도 한계는 있구나
   이번 주 토요일은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결혼 5주년이라 이번엔 사치해도 되지 않나 싶어 예산을 높게 잡았습니다. 강원도 여행도 계획하다가, 서울에서 내로라한다는 호텔들을 구경하다, 방값에 흠칫 놀라 호텔 예약 사이트를 종료했습니다.

   결국 금요일에 반차 내고 회사 근처에 있는 호텔 뷔페에서 평일 점심을 먹었어요. 작은 뷔페라 생각했는데 하나씩 맛보았더니 배가 무척 불렀어요. 그래도 메뉴를 거의 다 먹어봐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산책을 나섰습니다. 바람이 쌀쌀해 사무실에 들러 급하게 후드 티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소화가 될 때까지 걷다가 네시쯤 집에 돌아와 낮잠을 잤습니다. 근교 카페라도 갈 생각이었는데 점심에 뷔페를 먹고 주변을 크게 산책하니 끝나버렸어요.

  다음날엔 느지막이 일어나서 대공원에 갔습니다. 서울대공원 안에는 테마가든이라는 곳이 있어요. 일명 장미원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이들을 위한 작은 동물원과, 작은 정원과 나무그네가 있습니다. 산책로에 놓인 벤치에 누워있으면 저수지가 보여서 좋아합니다.

   입장권을 사려는데 직원이 걱정하시며 물어보셨습니다. 볼 게 많이 없는데 괜찮으시겠냐고요. 물론 대공원 본원처럼 사자나 코끼리, 물개를 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도 저희에게 충분했는데, 누군가 볼 게 없다고 잔뜩 욕이라도 한 걸까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요일은 날씨가 무척 좋았잖아요. 늦은 오후 저수지 풍경은 잊지 못할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결혼기념일 주간은 차고 넘칠 정도로 좋았습니다. 남들에게 만사 제쳐놓고 가라고 할 정도로 강력하게 추천할 곳은 아니었지만요.

  솔직히 이 정도로 막아서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결혼 5주년이라 낭비할 생각을 했지만 막상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나 봅니다. 여기서 만약 더 돈을 많이 썼으면 자꾸 본전 생각이 났을 것 같다고요. 금요일에 어마어마하게 좋은 뷔페를 갔다면 정말 속이 쓰렸을 것 같아요. 먹어보지 못하고 나온 음식들이, 그 이후엔 뷔페의 가격이 생각나 괴로웠을 거에요.

   남편과 그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의 취향도, 깜냥도, 그릇도 작고 작아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감탄할 에너지가 없다고. 기력이 딸려서 멀리 나가는 외출이 정말 힘들고, 우리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에서 만족할 만한 요소를 찾고 그것을 되새긴다고. 좋게 말하자면 작은 것에 기뻐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아니라면 소심한 사람들이라고.

   소심해진 저희의 모습에서 두 가지 문장이 생각났습니다. 첫 문장은 장강명 작가의 5년 만의 신혼여행인데요, 아무리 보라카이에서 멋진 노을을 봤어도, 흔쾌히 행복 리스트에 올라가지 않아서 이상하게 느껴진단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꾸 무의식중에 가성비를 생각해 보게 된다고요. 와인의 세계가 행복해 보여 발을 들여놓으려다, 감당이 안 되어 스스로 선을 긋는 김혼비 작가의 모습에도 공감했습니다.

   언젠가 아주아주 부자가 되어 근심 걱정이 덜어지면 그 한계가 조금 넓어질 수 있을까요? 혹시 제가 망설이며 고민만 하는 사이 놓쳐버린 좋은 풍경도, 즐거움도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취항의 한계를 넓히는 것보단 제게는 지금 일상에서 돋보기를 들이대 행복을 건져올리는 게 더 쉬워 보입니다. 돈도 돈이지만, 요즘 부지런히 향유하고 즐길 기력이 완전 바닥났거든요.

  매일 회사와 집만 오가고 늘 가던 곳만 가는 사람이었지만 달리기를 하면서 동네의 보석같은 모습을 발견했다는 김상민 저자의 말처럼, 저 또한 우리 동네에서, 일상에서 행복을 건져올리는 방법을 알면 어떨까 싶네요. 일단은 동네 여행 마스터 최재원 저자의 가르침대로, 우리 동네에서 내가 좋아하는 다섯 가지 순간을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그걸로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 문장은 코로나 시기를 버틸때 발견했던 문장인데요, 카페도 헬스장도 맘놓고 갈 수 없었던 그때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제 세계는 좀처럼 넓어지지 않네요.

   만약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추억을 쌓는 분들이라면, 혹시 이 가을에 만난 좋은 풍경에 대해, 지난주에 갔던 맛집들에 대해서 자랑해주시겠어요? 기쁜 마음으로 저장해둘게요.

2022년 9월 26일,
오늘도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지쳐버린
소얀 드림
이번주의 밑줄
첫 번째 문장

정도 비용을 들이고 정도 기쁨을 맛보다니! 그게 HJ 순간을 행복하게 느낀 이유다(…) 보라카이에서 느끼는 모든 즐거움에는 상당한 요금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우리는 즉물적인 쾌락을 맛볼 때도 실은 무의식중에 비용 대비 편익을 생각한다. 

두 번째 문장
취향의 확장과 함께 넓어지는 세계, 멋진 말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그게 와인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소중한 기억을 안겨줄 테고, 그건 분명 멋진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멋짐을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사람에 나는 해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대개의 취향은 돈을 먹고 자란다.
세 번째 문장

한때는 새로움을 갈망하며 여기저기를 쏘다녔지만 지금은 여행조차도 좋아하는 도시 한두 곳만을 반복해 찾는다. 나이 듦의 탓일 수도, 아니면 좋아하는 걸 즐기기에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 해서일 수도 있다. 그런 변화가 나쁘단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원초적인 즐거움 중 하나, 새로운 경험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일정 부분 포기하며 살고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달리기는 동네의 숨은 모습들을 들춰낸다. 동네의 재발견은 곧장 일상과 직결되기에 피부로 와닿는 달리기의 선물이다.

네 번째 문장
퇴근 후 여행을 여러 번 시도하며 우리 동네를 다양하게 탐험해보세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나열할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 내가 좋아하는 것을 5가지 이상 꼽을 수 있게 된다면 다음 여행 코스에 도전해보세요
다섯 번째 문장

좁아진 세계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려면 해상도를 높여야 한다. 많이 가질 수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특징을 파악하여 그것을 최대한 즐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자연과 계절의 변화에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인다. (...) 주변의 사소한 기쁨에 관심을 기울이자. 이런 식으로 좁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즐기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못다 쓴 한마디
-금요일은 좋아하던 분의 마지막 출근일이었습니다. 일 년 전 지금 회사에 와서 닮고싶었던 기획자분이었는데요, 밑줄일기 첫 호에의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분입니다. 멀리 가지는 않으시지만 못내 아쉽습니다.
-요즘 제가 자주 듣는 노래는 Emotional Oranges의 플레이리스트입니다. 그래도 노래는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다행입니다. 출퇴근길에, 밤 산책때 혼자 들으면 못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날이 좋아서 자주 사진을 찍고 산책하고 있는데요. 요즘 추위도 더위도 가혹한 걸 보면 좋았던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 나머지 해를 겨우 나는 것 같아요.
오늘의 밑줄일기는 어땠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소감도 좋고, 받고싶은 편지 주제가 있다면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