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64회 (2022.07.27)

여름이 한창입니다. 곧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될 참이에요. 일하는 엄마인 저는 방학만큼은 아이들과 혼이 빠지게 놀 결심을 합니다. 바다로 긴 휴가를 떠나기 전, 아이들을 위한 선크림과 저를 위한 시집을 몇 권 준비합니다. 미안합니다. 저에게 시는 ‘놀 때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하얀 파라솔 아래 살랑살랑 바닷바람 불어오고, 아이들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에 파도치는 소리는 덤으로, 저는 시인들의 말에 이토록 값없이, 사뿐히 올라탑니다. 

💗정한아 작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붉은 솥단지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안녕, 나의 마녀야, 이런 날엔 잔치를 해야지, 수술 자국이 살아 움직이는 구두를 신고, 뱀들의 척추를 모조리 뽑아낸 유니크한 꽃다발을 들고, 툭툭 갈빗대를 분질러버려도 불식간에 다시 끼워맞춰지는 우산을 쓰고, 당신 등뒤에서 깔깔대다 소똥에 코를 박고 넘어진 날, 억울해서 물동이에 머리를 처박고 아홉 가지 병을 키우는 날, 지붕에서 뛰어내린 암소와, 너무 질겨서 뱉어낼 수밖에 없는 젖꼭지와, 이따금 벌레가 날아드는 눈동자, 휘파람으로 둘둘 묶어 대문 앞에 갖다버린 당신의 지느러미를 거꾸로 넘겨 읽다, 변기를 부여잡고 말았지

 

거품 가득 뱉어낸 배 뒤집힌 물고기들

밤새도록 이불을 찢어먹고, 샐쭉해진 기분으로 덧니를 핥으면 네 머리카락은 또 얼마나 자랐을까

 

이것 봐, 나는 오늘도 검은 구름을 뚝뚝 흘리며 부서진 목조계단을 잘도 건너고 있으니까, 줄줄이 늘어나는 국수 면발을 악착같이 붙잡으며 살아야지, 너보다 더 오래 살아야지, 머릿속에서 웽웽거리는 하루살이들을 손바닥으로 비비면 보라색 물보라가 일어나고

 

뷰티 스쿨 정원사에게 내 목숨을 맡긴 날

꿈 밖으로 튀어나온 사지가 예쁘게 잘려나간 날

잠자는 옆집 할머니 금니를 뽑아다가 원피스를 사 입고

흙탕물 위로 달아나는 네 그림자를 마구 휘젓다가 속바지를 흠뻑 적신 날

 

이런 날엔 우리 함께 배꼽을 열어젖히고 잔치를 해야지

 

찢어진 앞치마 위로 눈보라를 맞은 날

 

마치 여름 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박세랑의 어떤 시는 딸과 함께 읽고 싶어요. 그애는 이번주에 생일을 맞아 열 살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딸이 겪어야 할 온갖 삶의 시름을 떠올리면 그냥 콱 그애를 입으로 물어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곳으로 옮겨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은 그애 자신의 삶이 아닐 것이므로 저는 다만 멀리 떨어져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가령 뷰티 스쿨 정원사에게 목숨을 맡긴 날/ 꿈 밖으로 튀어나온 사지가 예쁘게 잘려나간 날//(…)// 이런 날엔 우리가 함께 배꼽을 열어젖히고 잔치를 해야” 한다는 것, “붉은 솥단지”에 모든 시름과 수치를 쏟아붓고 “보라색 물보라”가 일어나도록 휘휘 저어보라는 것, 그렇게 망가져서, “부서진 목조 계단”을 끝내 비틀거리면서 건너갈 수 있다는 것. 아이는 마녀가 나오는 동화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 될 것이란 사실은 알지 못해요. 마녀가 되는 데는 여러 이점이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군요. 그애가 자라기를 기다리면서, 저는 저대로 제 솥단지를 젓습니다. 제 솥단지도 웬만한 사이즈는 넘지요. 펄펄 끓는 그 안의 것들 진국이 된 지 오래입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새로 나왔어요!
문학동네시인선 176 주하림 시인의 『여름 키코』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계절과 어울리는 시를 소개합니다. 

햇빛, 크고 뾰족한 붉고 푸른 돌
렌트한 집 무언가 눈을 감고 너를 만지고 있다
여름은 사라지고 색색의 빛 색색의 타일
수영장 바닥은 연하고 갈수록 짙어지고
바다에 누워 있는 나
상처받은 그날로부터 계속
동양인은 나 혼자가 될 때까지
여자는 나 혼자가 될 때까지
내가 다시 그때가 될 때까지
수영장 타일 위로 떠오르는 물방울 빛
망각도 훈련이야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그의 유언
_「July」 부분 
💗정한아 작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이 밤이 새도록 박쥐 (이윤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나야 네 곁을 오리처럼 뙤뚱뙤뚱 따라다니던 그래 나야

불빛 한 점 날아와 부딪치는 다방 창가

너는 턱 괴어 애인을 기다리지만

베토벤 교향곡 음표들처럼 거꾸로 천장에 매달려

네 크림빛 눈물이 나태하게 풀리는 동안

퐁당 퐁퐁당 네 이마 위로 각설탕을 빠뜨리는, 그래 바로 나야

 

네가 정중히 뒷문을 가리키며 꺼지라고 소리치던 나야 나

네가 쓰레기라고 말했던 나야 나, 검게 탄 미소로 뒷걸음치다

난 자동차에 치였을 뿐

신발이 구르고 어깨를 감싸던 검정 망토가 풀썩 덮쳤지

삐뽀삐뽀 사거리 순서가 뒤얽혀

신호등이 앵무새의 호동그란 눈을 치켜뜨고

경광등을 켠 고양이들은

거리로 몰려나왔지만 딴 세상의 똘마니들이 도래한 거야

힘들어 죽겠는 망토의 두 팔을 쫙 펼치자 때마침 바람이 폭풍이

아하 비틀,

할 줄 알았겠지만 나는 붕 날아올랐어

해와 달이 쌍생아처럼 서로

껴안고 나무들은 머리를 흔들며 비명을 지르고

작고 순하지만 성질이 불같은 집들이 바람의 살집 아래

화들짝 눈을 떴어

더러운 환풍구야 식당 뒷문이 흘리는 비웃음아

굴욕을 토하는 골목들아 날 봐

납작한 사거리 납작한 마을 납작한 산

접부채처럼 활짝 펼친

날 좀 봐 주름이 좀 이뻐

날아가는 내 날개 사이로 하늘이 다 비치고

높이 솟다가 문득 내려앉는

나야 나

 

너는 애인을 기다리다

한 점 불빛 날아와 부딪는 커피잔을 훌쩍 들이마셨을 때

거꾸로 매달린

나를 본 거야 맞아 나야

너는 스푼을 내던지며 박쥐, 라고 소리쳤어

다방 목조계단을 쿵쾅쿵쾅 뛰어내려와

문을 열었고, 순간 삐거덕거리는 계단의 무릎이 꺾이고

놀란 네 몸이 와르르 무너졌지 나야 그래 나야

네가 쓰레기라고 말했던 그래

 

이제는 달을 지우고 사라지는 지붕과 지붕 사이

눈빛이 칼날같이 그려진 나야

얼굴을 파묻고 검정 망토에 손깍지 끼면

발밑이 떠오르고 두 팔 벌리어 바람의 양감을 느낄 수 있고

조타수처럼 방향을 조종할 수도 있지

날아가는 나를 알아보는 이는 없겠지만

내 검은 그림자는 숲에서 죽은 새의 몸처럼 눈에 띄지 않는

숨을 비밀이겠지만 갈대숲의 흔들리는 고뇌 속에

내 눈물이 떨어진 걸 아무도 모를 테지만

여전히 사랑을 원하는 삐진 표정이겠지만

울먹이는 밤엔 창 열어 눈을 마주쳐보아도 좋아

밤의 책장이 저 혼자 덮이거나 부엌 등이 파닥 튀거나

알지 못할 천공의 울림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 잘살고 있어 네가 쓰레기라고 말했던 그래 나야


지붕과 지붕 사이 붕 떠올라 달을 쿡 찌르고

쿡, 쿡, 쿡, 웃어 죽겠는 나야 나

눈빛이 칼날같이

이제 나야 나 

소리로 남는 시가 있어요. 그 소리가 마음에 오래 남아 숨과 같이 호흡하는 시가 있습니다. 이윤설 시인의 「이 밤이 새도록 박쥐」는 제게 청량한 바람소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애인에게 “꺼지라”는 말을 듣고, “쓰레기”라는 말을 들은 이가 뒷걸음질쳐 넘어진 뒤 박쥐로 다시 태어나 “붕 날아오”르는 날갯짓소리입니다. 전 박쥐를 좋아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 시를 읽고는 종종 박쥐가 되어 날아가는 상상을 하곤 해요. 주로 마음이 위축될 때, 모욕을 당했을 때, 내 몸을 겨우 지탱하며 걸어갈 때입니다. 그럴 때 날개를 “접부채처럼 활짝 펼친”다면 시처럼 “발밑이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발밑이 떠오르고 두 팔 벌리어 바람의 양감을 느낄 수 있고/ 조타수처럼 방향을 조종할 수도” 있을까요. 생이란 찰나의 것, 벗어나 저 위에서 거꾸로 매달려 보면 “쿡, 쿡, 쿡” 웃어 죽겠는 한낱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영면한 시인의 영혼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해서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따뜻해요. 저는 나중에 시인들만 가는 나라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상상을 하면 참 좋습니다. 곤혹스럽게 무거운 이 몸이 ‘붕’, 날아오를 만큼 좋아요.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시믈리에는 하양지 만화 작가입니다. 『안녕이 오고 있어』 『우리는 시간문제』와 같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인생만화를 남긴 하양지 작가가 요즘 읽는 시는 무엇일까요? 다음주에 만나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우시사 런칭 이래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읽었던 것 같은데 피드백을 해야겠다 싶은 적은 처음입니다! 사무실 데스크에서 월 한 편의 시를 외다니!

💬고등학교 내신공부 할때 시를 종종 봤었는데,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며, 가끔 서점가서 구경하는 것 외에는 시를 볼 일이 잘 없었어요. 우연히 우시사 뉴스레터 가입해서,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저도 시를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대리만족을 잘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집 표지가 너무 예쁩니다!! :)

💬평소엔 글 시1 글 시2 글 이런 형식이였는데 오늘은 갑자기 시시시시시시 이래서 조금 당황했지만 다른 형식의 메일을 보내주신 게 신기해요. 처음엔 눈에 잘 안 들어왔는데 다시 읽어보니까 짱 좋아요. 그리고 마케터라 그런지 처음으로 소개시켜주신 시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지난호 정민호 마케팅국장님의 활약에 많은 분들이 피드백을 보내주셨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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