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맹 시각장애인 선생님과 함께 박물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서 경제 과목을 가르치시는 터라 워낙 지식이 풍부한 분이었어요. 제가 함께 다니면서 전시 설명 문구를 하나하나 읽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읽으며 ‘과연 이걸 전맹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명문조차도 ‘보이는 사람’을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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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뮤지엄은 대부분 보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시각을 매개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소리로, 누군가는 촉각으로 공간을 탐색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향이 더 의미 있는 공간을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최근에 방문했던 스톡홀름 역사박물관은 약 500년 전 사람들이 집 안에서 가축을 기르고 요리를 하며 함께 생활하던 환경을 향으로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땀 냄새와 가축의 오물 냄새, 음식 냄새가 한 데 뒤섞여 만들어낸 향으로 당시 공간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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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전달하는 공간 ㅣ 스톡홀름 역사 박물관
바이킹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먹거나 사용했던 향신료·식재료·조리 방식의 냄새를 재현해 놓은 체험 공간. 음식에 향을 더하거나 보존용으로 사용했던 캐러웨이, 요리나 약초로 사용된 고수, 바이킹 시대 주요 식량인 훈제 생선 냄새를 맡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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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은 새로운 박물관 정의를 채택하며 이렇게 밝혔습니다. “박물관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 영구기관이다. 박물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소통하며, 교육, 향유, 성찰과 지식 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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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의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뮤지엄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입니다. 뮤지엄의 역할이 유산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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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에서 다루는 주제인 뮤지엄은 6호의 도서관과 비슷합니다. 공공성을 지닌 공간이죠. 두 공간 모두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지적이면서 예술적인 감각,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일깨우는 공공 공간입니다. 도서관은 경제적 조건과 관계없이 누구나 올 수 있는 공간인 반면 뮤지엄은 고가의 전시품이 있다 보니 때때로 유료로 전시가 개방된다는 점이 다릅니다. 한편으로 예술적 안목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갈 수 있다는 인식이 바탕에 있다고나 할까요? 한국 사회에서 뮤지엄은 도서관보다는 더 낯설고, 빈번하게 다가가기에는 어려운 곳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한 겹의 장벽이 더 있다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뮤지엄의 풍경을 상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각자의 속도로 뮤지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유아차에 탄 어린이나 백발이 희끗한 어르신들도 보행 보조기를 끌고 와 시간을 보내는 그런 곳이면 더욱 풍성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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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여는 뮤지엄>
첫 번째 파트인 ‘감각’은 뮤지엄의 시각 중심성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창의적 음성해설을 연구하는 해나 톰슨은 음성해설이 작품의 외형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 붓질의 두께, 색을 둘러싼 불확실성,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주관성까지 해설 안에 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는 일에서 나아가 작품이 어떤 감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함께 탐색하는 방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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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미 2천 년 전부터 문학을 통해 훌륭한 음성해설을 만들어왔어요.” 영국의 연구자 해나 톰슨은 불문학 연구 배경과 시각장애 당사자로서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뮤지엄에서의 창의적 음성해설Creative Audio Description을 탐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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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를 결핍으로만 바라보는 관점도 여기서 바뀝니다. ‘블라인드니스 게인Blindness Gain’이라는 개념은 보지 못함이 사회와 예술에 새로운 감각적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구로 여겨졌던 오디오북이 지금은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매체가 되었듯, 비시각적 감상 방식은 더 많은 관람객에게 작품을 다르게 만나는 길을 열어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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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을 설계하는 뮤지엄>
두 번째 파트인 ‘연결’에서 접근성은 함께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실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과정에 참여하고, 그들의 생각이 반영될 때 접근성은 의미 있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진정성 측면에서도 중요하죠.
서울시립미술관의 ‘모든 가방’ 프로젝트는 이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감각의 제약을 경험하는 관람객을 위한 도구를 만들자는 제안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워크숍을 거치며 질문은 조금씩 확장됐습니다. “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도구”라는 목표는 “서로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관람 도구”라는 방향으로 넓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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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의 ‘모든 가방 프로젝트’는 미술관과 관람객, 특히 그동안 미술관 경험에서 소외되어 온 이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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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지속하는 뮤지엄>
세 번째 파트인 ‘책임’은 접근성을 하나의 태도로 확장합니다. 기관에서 이벤트 성으로 한 번 개선하는 실험이 아닌 관람객을 대하는 태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술가 카르멘 파팔리아가 말하는 오픈 액세스는 접근성을 살아 있는 관계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에게 접근성은 법적 기준을 충족하는 절차보다, 서로의 필요를 함께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누가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가?’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고 공간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 나아가 자신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자기결정권과 주체성의 문제로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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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비시각적 예술가라고 소개하는 카르멘 파팔리아Carmen Papalia는 접근성을 고정된 조건이 아닌 관계와 소통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흰 지팡이 대신 행진 밴드나 확성기를 이동 보조 도구로 삼는 퍼포먼스부터, 미술관 공간과 제도에 직접 개입하는 설치작업까지, 카르멘은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접근성 철학인 오픈 액세스Open
Access를 예술로 풀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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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3호 <놀이> 편에서 인터뷰했던 호니먼 뮤지엄Horniman Museum의 커뮤니티 매니저 줄리아 코트Julia Cort의 말이 생각납니다. “뮤지엄은 시혜자, 방문자는 수혜자라는 관점을 넘어, 외부인에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호의 주제는 뮤지엄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질문은 사회 전체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어떤 감각을 기준으로 공간을 설계해 왔을까요? 예술과 지식은 누구를 기준으로 전달 되어왔고, 누구의 경험은 배제되어 왔을까요? 이번 <뮤지엄>호가 익숙한 기준을 돌아보고,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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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I 김병수 미션잇 대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은』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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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V 8호 <뮤지엄>은 현재 온라인 서점 알라딘, 교보문고, Yes24에서 구매가능합니다 :) MSV 소셜임팩트 또는 MSV 뮤지엄을 검색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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