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케도 시간은 흘렀고 히말라야 12좌 등반길처럼 가팔랐던 12주 수업을 마치는 날이 왔습니다. 소감을 나눌 때 사랑눈은 다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을 붙잡고 버텼으며 다른 분투하는 엄마에게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요. 이것이 서로에게 용기가 된다는 거로구나 싶어서 저는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저도 ‘이렇게까지’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잘 모릅니다. 그냥 ‘해야 한다’는 직감만 믿고 따를 뿐이죠. 우리는 알아서 행하기도 하지만 행하고 나서야 왜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기도 하죠. 저도 나중에 알아챘어요. 손에 쥔 건 비록 앙상한 글 몇편일지라도 애를 쓴 그 순간순간이 저를 조금씩 변화시켰다는 걸요. 그건 주부에서 작가로 직업이 달라진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예요. 욕구하면 안 되는 사람에서 욕구해도 되는 사람으로, ‘욕구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허용하게 됐습니다.
‘욕구란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캐럴라인 냅은 『욕구들』에서 정의해요. 그런데 이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여자는 하지 말아야 해요.
“먹지 마, 커지지 마, 멀리 가지 마, 많이 원하지 마.”
꽤나 익숙한 명령이죠. 사랑눈이 다이어트 실패기를 두 페이지나 되는 글로 썼던 것처럼 먹지 말아야 하고요. 사랑눈이 전문직이지만 직업적 야망을 갖지 않게 된 것처럼 남자보다 잘나가도 안 되고요. 사랑눈이 수업 하나 들으면서 배우자, 아이,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에까지 시달리는 것처럼 나의 필요는 가족의 필요를 위해 포기해야 하고…
이렇게 ‘하지 마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최초의 욕구가 발동했을 때 ‘잘하는 법’을 고민하기도 전에 내가 이걸 해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의심과 싸우게 됩니다. 캐럴라인 냅이 떠올리는 자기 어머니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죠.
“애초에 자신에게 욕망하고 원할 권리가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의 필요들을 부끄럽게 여기며, 심지어 그 필요들을 거의 인정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 여자를 상상하게 된다.” (122~23면)
저 ‘젊은 여자’는 내가 너무 유난인가 싶어 주저앉길 반복하던 저이기도 하고요. ‘그냥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동화책이나 읽어주고 같이 시간 보내면 될걸, 이렇게 화를 내고 속상해하면서까지 수업을 들어야 할까? 남편 말대로 나중에 애들 크고 할까?’ 되뇌는 사랑눈이기도 합니다. 맞아요. 만국의 엄마들이 ‘조용하지만 끈질긴 불안, 모기의 잉잉거림처럼 성가신 내면화된 경고’에 시달립니다. 존재에 가해진 금기와 제약이 이렇게까지 완강하기에 무언가를 하려면 이렇게까지 힘겨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