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70회 (2022.09.07)

안녕하세요, <우리는 시를 사랑해> 구독자 여러분. 예술의전당에서 근무한지 올해로 12년 차인 강다혜입니다. 저는 탐미하는 것이 취미라 아름다운 공연, 음악, 그림, 영화, 시, 술, 사람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삶이 어떤 모양으로 흘러가는지 궁금해서, 라고 대답합니다. 혼자 술을 마시며 시를 읽는 것은 저의 오랜 습관입니다. 그러다 3년 전부터,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 함께 시를 낭독하고 시와 어울리는 술을 마시는 ‘시술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해오고 있습니다. 반주(飯酒)보다 시 읽을 때 곁들여 마시는 술을 더 좋아하는 저는 ‘낭만다혜’라고도 불리는데요, 제가 고른 낭만적인 시 두 편을 여러분께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강다혜 기획자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나라는 시간 (이현호,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누군가 내 심장을 한입 베어 먹었을 때

한입만큼 비어버린 심장을 버렸을 때

산다는 것이 죽음을 참는 일일 때

지구가 외계인의 성경 속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악마들의 천국이 여기가 아니라고

이상한 질문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때

영혼은 영혼, 천사는 천사, 당신은 당신

인제 세상에는 아무런 비유도 필요가 없을 때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을 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새로 가르쳐줄 것이 없을 때

어제부터 너를 사랑하겠어 내일은 너를 사랑했어 지금 너를 사랑했었어 그 사랑을 사람했어

오래 들여다보아도 손댈 수 없는 비문만이 남을 때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우리는 서로 병이 깊다고만 생각될 때

기도를 그치는 영혼을 꿈꿀 때

영혼을 그치는 기도를 올릴 때

거울에 비친 눈동자 한쪽에는 죽은 신이 다른 한쪽에는 당신의 뒷모습이 앉아 있을 때

내가 신을 닮아갈 때 점점 세상에서 달아날 때

밤하늘에 백반증 같은 눈이 내릴 때

별은 밤의 사리(舍利) 같을 때

가벼워진 심장으로 소복이 눈이 쌓일 때

나도 한 마음의 인간일 때

천천히 먹은 것 같은데, 분명 꼭꼭 씹어 삼킨 것 같은데 체하는 날들이 더러 있습니다. 음식이 문제인가? 나의 컨디션 때문인가? 배가 아파오고 손이 점점 차가워지는 와중에 이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왔을까 생각합니다. 출처가 분명한 고통─누구나 같은 요인으로 아플 수 있다─이 주는 위안을 찾으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습관처럼 살다보니 덜컥 삶에 체하는 날들도 생겼습니다. 왜 아픈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어떤 문장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현현한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시집들을 뒤적거렸습니다. 나의 자그마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운이 좋았고 이현호 시인의 시 「나라는 시간」을 만났습니다. 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혼돈을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그 광경은 “누군가 내 심장을 한입 베어 먹었을 때/ 한입만큼 비어버린 심장을 버렸을 때”의 모양이었고 “산다는 것이 죽음을 참는 일”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그치는 영혼을 꿈꿀 때”는 지금 당장 내가 가져야만 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신을 닮아갈 때 점점 세상에서 달아날 때”는 지금 이 궤도에서 이탈해도 좋을 것 같다는 위로를 주었습니다. 이 시를 읽을 때 저는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요, 잠시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우리는 서로 병이 깊다고만 생각될 때”라는 문장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마음을 겹쳐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연유로 앓았던 마음이 같은 문장 안에서 만나지는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체한 뒤엔 소화제를 먹으면 되는데 이렇게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전 모를 것만 같습니다. 다만, 시의 마지막 문장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도 한 마음의 인간일 때”. 그러니까 내가 나를 잘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도 한 마음의 인간이니까. 그러고 나니 어지러움과 복잡함의 부피가 줄어들더군요. “영혼은 영혼, 천사는 천사, 당신은 당신/ 인제 세상에는 아무런 비유도 필요가 없을 때” 아무것도 꾸며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나라는 시간을 온전히 감각하게 해준 고마운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문학동네시인선179 『바람 불고 고요한』 출간★
구독자 님, 문학동네시인선 179번이 출간되었습니다. 1983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정갈하게 다듬은 시어로 존재의 쓸쓸함과 비극적 아름다움을 노래해온 김명리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바람 불고 고요한』을 만나보세요!

정련된 시적 세공으로
빚어낸 생의 아름다움
시력 40년, 김명리 시의 정수


모과나무 아래 서 있을 때면
아픈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적막이 또 한 채 늘었어요

이대로 죽음이
삶을 배웅 나와도 좋겠구나 싶은

바람 불고 고요한 봄 마당
_「바람 불고 고요한」 중에서
💚강다혜 기획자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홀수의 방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왔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는.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 이제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밤을 다 소비해야 한다. 우리의 그림자는 한패가 아니다. 그림자는 암호처럼 커진다. 씻어도 투명해지지 않는다. 젖어서 흐물흐물 찢어지면 내부를 들여다볼 텐데. 이젠 버려야 하나. 어차피 한패도 아닌데. 우리는 오로지 나였을 한 사람과, 너였을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붙어 있다. 인정하자. 그러지 않으면 사랑에 빠져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으니. 가로등 불빛 아래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의 윤곽을 돌멩이로 그려준다. 내가 떠나도 바닥에 남을 뭔가를. 기억은 순간순간 그림자들의 방을 뺏는 놀이 같아.

그 와중에 잊고 싶다는 말이 개미처럼 우왕좌왕한다. 그 와중에 미안과 무안(無顔)은 깊은 방을 만들고 있다. 나는 방을 잃고 현관문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너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오로지 너였을 한 사람을 발굴하듯이. 그래서 발굴된 영혼이 다른 영혼을 찌를 듯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반복 행위가 주는 무감각을 빗겨가는 일 같습니다. 쉬이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반복하고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사람과 만났으니 마음도 새로 갈아끼워야 했는데 마음은 새것도 아니었으면서, 역시나 또 어렵구나 하나봅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았던 에너지와 형태는 모두 달랐었는데, 관계가 시들어가는 건 왜 비슷한 모양으로 느껴지는 걸까요?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에서 ‘우리’라고 명명했던 관계로부터 분리된 나를 발견합니다.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마주하고 있을 때 무엇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 우리의 견고함은, 등을 돌리고 멀어지면서 틈이 벌어집니다. 저는 그 여백이 매번 낯설어서 솜뭉치처럼 뭉개 깊숙한 곳에 숨기곤 했습니다.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밤을 다 소비해야 한다. 우리의 그림자는 한패가 아니다”는 재빨리 잊으려고, 고통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수많은 밤을 소환합니다. 저는 허겁지겁 도망쳐나왔지만 시인은 달랐습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저 담담하게 알려줍니다. 시인은 ‘홀수의 방’에 남겨진 소재들을 가지런히 읊습니다. 무명의 상흔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머문 홀수의 방문을 슬며시 열어봅니다. 재질과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뭉쳐 덮어놓은 조각들을 저는 비로소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왜 그때 그토록 마음이 저릿했는지 마침내 알아차립니다. 당신과 나, 우리의 몸과 마음의 속도가 서로 달랐다는 것과 실은 방향도 같지 않았다는 것. 모두 시에서 발견한 비밀들입니다. 어떤 온도였는지 무슨 색깔이었는지, 슬픔과 부재가 방안을 맴돌며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갔는지 오랜 추억들을 어제 일처럼 더듬어봅니다. 마음은 물질을 넘어서는 공간이라 공허함은 평수로 잴 수 없다더군요. 부지런히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으면 나오는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오로지 너였을 한 사람을 발굴하듯이” 홀수의 방에서 솟아난 날것의 마음은 시인의 거짓말 같은 주문─“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뒤에서 더욱 생생해집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여름 키코』의 주하림 시인입니다. 최근 신작 시집을 발표하고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주하림 시인은 어떤 시를 골랐을지 궁금합니다. 다음주 수요일, 주하림 시인이 고른 두 편의 시와 함께 만나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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