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긋하게, 여행 |  최갑수

우동을 먹으러 갈 시간입니다

문득 자신이 늙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눈가의 주름을 발견했을 때, 모니터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초록색 등이 반짝이는 신호등을 뛰어 건너기를 포기할 때 등 어떤 순간일 수도 있고, 새로운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목욕탕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느긋한 기분을 즐기고 있다. 이 순간도 늙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가운데 하나다.


목욕탕의 따끈한 물속에 누워 ‘목욕탕을 나가서는 우동 한 그릇을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진한 가쓰오부시 육수에 유부 튀김과 김 가루가 넉넉하게 올라간 우동 말이다. 곧 봄이 올 것인데, 봄에는 목욕을 마치고 우동을 먹는 이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목욕탕과 우동의 조합은 영하 3도에서 영상 2도일 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에는 소중한 것, 가치 있는 일이 멀리에만 있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났다. 라오스와 붉은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영하 27도 북극 근처의 길을, 갈라파고스 근처 망망대해를 헤매고 다녔다. 그 여행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많은 걸 얻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 그 여행을 다시 하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체력이 될 때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젊은 시절에는 최대한 멀리 가보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지금은 35도의 온탕에 유부 튀김이 올라간 우동이 먼저다. 갈라파고스도 좋고, 북극도 좋지만 그건 젊은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멀고 먼 길을 돌아 추억은 희미해지고, 육체는 사라지며, 어차피 후회만 남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제 백신을 맞고 온몸이 아팠는데, 아프면서 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아, 내겐 내가 있었구나. 앞으로는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야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다짐했다.


오늘은 목욕탕 천장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다. 좋은 인생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물음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목욕탕의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떠올릴 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다. 눈을 감고서는 ‘그런 질문은 작년까지 열심히 했으니 올해에는 그만 하자. 인생, 좋은 기분과 괜찮은 느낌 정도 가지고 가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버린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되지 못한 것이 인생이고, 내가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멀고 먼 길을 돌아와 이젠 이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나쁘지 않은 인생이군. 역시 그냥 늙지는 않았어. 목욕탕 천장에서 물방울 하나가 이마 위에 똑 하고 떨어져 내린다. 이제 우동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 

최갑수는 여행 작가다. 가끔 혼자 여행을 떠난다. 백반을 먹고 중국집에 간다. 호텔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까먹으며 인터넷을 뒤적일 때도 있다. 그의 여행과 생활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ssuchoi를 들여다 보자.

📎 Clip |  행복한 사고가 일어난 것 뿐이에요

그림을 그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드릴게요. 그냥 이렇게 덧그리기만 하면 돼요. 이렇게 하면 아름다운 나무가 다시 탄생하죠. 우리는 실수를 것이 아닙니다. 단지 행복한 사고가 일어난 것뿐이에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신이 해낼 있다고 믿는 것이 번째 일입니다.”


어둠을 그리려면 빛을 그려야 하지요. 빛을 그리려면 어둠을 그려야 하고요. 어둠과 , 빛과 어둠이 그림 속에서 반복됩니다. 안에서 빛을 그리면 아무것도 없지요. 어둠 속에서 어둠을 그려도 아무것도 보입니다. 인생 같지요. 슬플 때가 있어야 즐거운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좋은 때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그림을 그릴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 말고는 없거든요.”


- 로스

🍵 혼자라는 즐거움 |  류진

경계의 기술

으슥한 밤. 저기 집이 보인다. 보름달처럼 해사한 가로등. 언제나 등대처럼 우뚝, 골목을 지키는 편의점의 서치라이트 같은 간판등. 그간 파악해 둔 곳곳의 CCTV를 쓱 훑는다. 파출소로 곧장 호출이 가는 붉은 버튼들도.

 

집 앞. 고개를 뒤로 홱, 돌린다. 누가 따라오진 않나? 여느 날처럼 퇴근 중인 동네 사람일 확률이 높지만, 글쎄. 거동이 하 수상한 사람만 수상한 건 아니니까. 잠바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낸다. 뭔가 급한 게 생각난 사람처럼 길 한복판에 장승처럼 뚝 멈춰 선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고민하는 시늉. 내 뒤를 바짝 쫓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냥 집에 가는 길이었던 애꿎은 행인 1이 가던 길을 재촉한다.

 

자, 이제 공동현관 앞. 또 고개를 홱 돌려 옆 건물 한 번, 앞 건물 한 번, 그 앞에서 끽연 중인 사람들의 행색을 살핀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에 맨발, 슬리퍼 차림이면 안심.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검지로 손자국을 지운다. 택배 기사, 새벽 배송 기사, 배민과 쿠팡 기사들에게 널리 알려진 번호지만, 저기서 담배 피우는 사람까지 내 집 ‘공현’ 비번을 알 필요는 없잖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공동 현관문은 꽤 늦게 닫힌다. 그 앞을 지나던 이가 마음먹고 들어오려면 얼마든지 입성할 수 있는 아주 답답한 속도다. 문을 끝까지 주시한다. 갑자기 누가 나타나 팔이나 머리통을 슬쩍 끼우진 않는지. 그와 동시에, 건물 청소 이모님이 1층 계단 밑 창고 앞에 늘 세워 두는 대빗자루의 위치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 옆 소화기가 제대로 놓여 있는지 스캔한다. 소화기 손잡이는 유사시 곧장 집어들 수 있는 위치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현관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드디어 내 집 현관 앞. 8개의 숫자로 짠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면서 아래층 계단, 위층 계단 두리번. 도어락의 매끈한 유리판을 쓱쓱 문질러 지문 제거.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지만 굳이 한 번 더 잠긴 상태를 확인한 후 걸쇠를 단단히 채운다.

 

“야. 오버야.”

 

얘기를 다 들은 친구가 어깨를 찰싹 때리며 던진 한마디. 그에게 “이것은 한 치의 과장도, 보탬이나 뺀 것 하나 없는 나의 마감 (야근) 퇴근길이여.”라고 다시 한번 주지시키지만 핀잔만 돌아올 뿐이다. “니가 저기 외딴 공장 지대에 사는 것도 아니잖아. 왜 저래. 작작 해.”

 

사방이 천적인 아프리카 초원의 부시벅도, 켕기는 거 많은 인생 제인슨 본도 아니면서 신경을 곧추세우는 야밤 퇴근길을 이어온 지 십 몇 년째. 처음 혼자 살기 시작한 동네는 걸어 다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성북동 300번지 대 윗동네였다. 사방에 맹수 대신 굿 치르는 절이 음산한 공기를 뿜었던 곳. 편의점은커녕, 상업 시설이 전무한 마을. 낮은 층고의 낡고 오래된 아파트 2층에 들어선 내 첫 독립 집은 서장훈이 만세 하면 중지 손톱이 보일 정도로 땅과 가까워서 단 한 번도 창문을 열고 잠든 적이 없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에도.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외벽 배관을 타고 아주 쉽게 올라올 수 있을 만큼 침입하기가 꽤 쉬웠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어머. 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적이 있나?’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겠지만, 없다. 아. 독립하기 전 딱 한 번. 할머니가 새벽 기도회에 가시면서 문단속을 허술하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날, 좀도둑인지 술 먹고 남의 집에 잘못 들어온 같은 아파트 사는 미친 X인지 모르겠지만 꿈꾸다 깬 내가 못 보던 실루엣이 서성이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 누구야!” 외쳤을 때 혼비백산이 돼서 도망간 남자와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땐 무슨 기세였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주방 가위를 집어 들고 걔 뒤를 쫓아 나갔다. 2010년쯤, 송파구 오금동 어듸메에서 새벽 5시경, 손에 큰 가위를 든 20대 처자가 씩씩대며 거리를 배회한 것을 보신 적이 있다면, 접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는지 잘 알게 되었으니 잔소리는 넣어두세요.)

 

여튼 이런 연유에, 각종 ‘충격적인 일격’을 전하는 뉴스 속 CCTV 영상 잔상을 쉽게 잊지 못하는 불의의 기억력이 더해져서 이렇게 피곤하게 산다. 사실 제이슨 본 뺨 때리는 이 퇴근길 루틴이 딱히 버겁진 않다. 애쓰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이 됐기 때문이다. 간혹 깊은 새벽에 퇴근하는 날엔 무섭기도 하지만. 지금 사는 동네 - 송파구 한복판, 본가에서 10분 거리 - 는 대개 오랜 토박이들이 사는 촌 같아서 대체로 평화로운 게 사실이다. (집값은 아님)

 

다만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항상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되고 싶어서 - 적어도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혹은 도움을 청할 방법엔 무엇이 있는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나쁠 건 없잖아?


<메기>라는 훌륭한 영화를 찍은 이옥섭 감독은 새 동네에 이사한 첫날, 늦은 밤까지 짐 정리를 하다 종일 굶었다는 걸 알아차린 후 ‘편의점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 못을 박던 망치를 들고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집수리하다 나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해서요. 그치만 무서워서 들고 나간 거예요. 제가 겁이 진짜 많거든요.”라고 말했지만. 아마 진짜 무서웠던 사람은 길가의 동네 사람과 편의점 파트 타이머였을 것이다.

 

“그렇게 무서우면 빨리 결혼하지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간 많았는데 - 그런 위험이 성별을 가리나? 나보다 힘센 사람과 한집에 살면 물론 좀 낫겠지만. 지금은 나의 공상(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는 시뮬레이션) 능력과 아직 ‘핫한’ 성질머리를 믿는다.

 

세월 앞에 장사 없으므로, 언젠가 예민력과 성질이 무뎌지는 날이 오겠지. 그땐 부디 내 곁에 용맹한 시고르자브종과 극성맞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있기를. 언젠가 박막례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 훌륭한 어른이 결혼을 꼭 해야 하냐고 묻는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 개 키우면서 살아.” ✉️

류진은 패션 잡지와 여행 잡지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다가 내 시간을 내 뜻대로 쓰고 싶어서 프리 워커가 됐다. 그게 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엔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삶을 잘 꾸리기 위해 더 많이 보고, 읽고, 겪고, 쓰고, 부딪히며 산다.  @nomad_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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