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슥한 밤. 저기 집이 보인다. 보름달처럼 해사한 가로등. 언제나 등대처럼 우뚝, 골목을 지키는 편의점의 서치라이트 같은 간판등. 그간 파악해 둔 곳곳의 CCTV를 쓱 훑는다. 파출소로 곧장 호출이 가는 붉은 버튼들도.
집 앞. 고개를 뒤로 홱, 돌린다. 누가 따라오진 않나? 여느 날처럼 퇴근 중인 동네 사람일 확률이 높지만, 글쎄. 거동이 하 수상한 사람만 수상한 건 아니니까. 잠바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낸다. 뭔가 급한 게 생각난 사람처럼 길 한복판에 장승처럼 뚝 멈춰 선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고민하는 시늉. 내 뒤를 바짝 쫓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냥 집에 가는 길이었던 애꿎은 행인 1이 가던 길을 재촉한다.
자, 이제 공동현관 앞. 또 고개를 홱 돌려 옆 건물 한 번, 앞 건물 한 번, 그 앞에서 끽연 중인 사람들의 행색을 살핀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에 맨발, 슬리퍼 차림이면 안심.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검지로 손자국을 지운다. 택배 기사, 새벽 배송 기사, 배민과 쿠팡 기사들에게 널리 알려진 번호지만, 저기서 담배 피우는 사람까지 내 집 ‘공현’ 비번을 알 필요는 없잖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공동 현관문은 꽤 늦게 닫힌다. 그 앞을 지나던 이가 마음먹고 들어오려면 얼마든지 입성할 수 있는 아주 답답한 속도다. 문을 끝까지 주시한다. 갑자기 누가 나타나 팔이나 머리통을 슬쩍 끼우진 않는지. 그와 동시에, 건물 청소 이모님이 1층 계단 밑 창고 앞에 늘 세워 두는 대빗자루의 위치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 옆 소화기가 제대로 놓여 있는지 스캔한다. 소화기 손잡이는 유사시 곧장 집어들 수 있는 위치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현관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드디어 내 집 현관 앞. 8개의 숫자로 짠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면서 아래층 계단, 위층 계단 두리번. 도어락의 매끈한 유리판을 쓱쓱 문질러 지문 제거.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지만 굳이 한 번 더 잠긴 상태를 확인한 후 걸쇠를 단단히 채운다.
“야. 오버야.”
얘기를 다 들은 친구가 어깨를 찰싹 때리며 던진 한마디. 그에게 “이것은 한 치의 과장도, 보탬이나 뺀 것 하나 없는 나의 마감 (야근) 퇴근길이여.”라고 다시 한번 주지시키지만 핀잔만 돌아올 뿐이다. “니가 저기 외딴 공장 지대에 사는 것도 아니잖아. 왜 저래. 작작 해.”
사방이 천적인 아프리카 초원의 부시벅도, 켕기는 거 많은 인생 제인슨 본도 아니면서 신경을 곧추세우는 야밤 퇴근길을 이어온 지 십 몇 년째. 처음 혼자 살기 시작한 동네는 걸어 다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성북동 300번지 대 윗동네였다. 사방에 맹수 대신 굿 치르는 절이 음산한 공기를 뿜었던 곳. 편의점은커녕, 상업 시설이 전무한 마을. 낮은 층고의 낡고 오래된 아파트 2층에 들어선 내 첫 독립 집은 서장훈이 만세 하면 중지 손톱이 보일 정도로 땅과 가까워서 단 한 번도 창문을 열고 잠든 적이 없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에도.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외벽 배관을 타고 아주 쉽게 올라올 수 있을 만큼 침입하기가 꽤 쉬웠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어머. 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적이 있나?’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겠지만, 없다. 아. 독립하기 전 딱 한 번. 할머니가 새벽 기도회에 가시면서 문단속을 허술하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날, 좀도둑인지 술 먹고 남의 집에 잘못 들어온 같은 아파트 사는 미친 X인지 모르겠지만 꿈꾸다 깬 내가 못 보던 실루엣이 서성이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 누구야!” 외쳤을 때 혼비백산이 돼서 도망간 남자와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땐 무슨 기세였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주방 가위를 집어 들고 걔 뒤를 쫓아 나갔다. 2010년쯤, 송파구 오금동 어듸메에서 새벽 5시경, 손에 큰 가위를 든 20대 처자가 씩씩대며 거리를 배회한 것을 보신 적이 있다면, 접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는지 잘 알게 되었으니 잔소리는 넣어두세요.)
여튼 이런 연유에, 각종 ‘충격적인 일격’을 전하는 뉴스 속 CCTV 영상 잔상을 쉽게 잊지 못하는 불의의 기억력이 더해져서 이렇게 피곤하게 산다. 사실 제이슨 본 뺨 때리는 이 퇴근길 루틴이 딱히 버겁진 않다. 애쓰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이 됐기 때문이다. 간혹 깊은 새벽에 퇴근하는 날엔 무섭기도 하지만. 지금 사는 동네 - 송파구 한복판, 본가에서 10분 거리 - 는 대개 오랜 토박이들이 사는 촌 같아서 대체로 평화로운 게 사실이다. (집값은 아님)
다만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항상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 되고 싶어서 - 적어도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혹은 도움을 청할 방법엔 무엇이 있는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나쁠 건 없잖아?
<메기>라는 훌륭한 영화를 찍은 이옥섭 감독은 새 동네에 이사한 첫날, 늦은 밤까지 짐 정리를 하다 종일 굶었다는 걸 알아차린 후 ‘편의점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 못을 박던 망치를 들고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집수리하다 나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해서요. 그치만 무서워서 들고 나간 거예요. 제가 겁이 진짜 많거든요.”라고 말했지만. 아마 진짜 무서웠던 사람은 길가의 동네 사람과 편의점 파트 타이머였을 것이다.
“그렇게 무서우면 빨리 결혼하지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간 많았는데 - 그런 위험이 성별을 가리나? 나보다 힘센 사람과 한집에 살면 물론 좀 낫겠지만. 지금은 나의 공상(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는 시뮬레이션) 능력과 아직 ‘핫한’ 성질머리를 믿는다.
세월 앞에 장사 없으므로, 언젠가 예민력과 성질이 무뎌지는 날이 오겠지. 그땐 부디 내 곁에 용맹한 시고르자브종과 극성맞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있기를. 언젠가 박막례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 훌륭한 어른이 결혼을 꼭 해야 하냐고 묻는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 개 키우면서 살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