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92회 (2022.02.15)
  △ 최진영 소설가가 직접 찍은 사진 

안녕하세요. 소설을 쓰는 최진영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해질 무렵의 산책을 좋아했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 지구의 자전을 목격하는 것만 같았고 ‘지구’라는 커다란 우주선에 탑승한 기분도 들었어요. 요즘은 사정이 있어 저녁의 산책을 정오의 산책으로 잠시 바꾸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가까이 바다가 있습니다. 높은 건물이 없어 하늘이 아주 드넓게 보이고 그만큼 빛도 가득합니다. 빛 속을 걷다보면 마음도 서서히 데워지는 느낌이에요

💘최진영 소설가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이별하는 정오 (장혜령,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초원장 여관의 정오

카운터 여자는 낮잠

 

얇은 벽 너머

한 사내가

구토하는 소리를 듣는 정오

 

느티나무 아래

벤치의 노인들이

말없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정오

 

양말 가게 남자가

수굿한 뒷모습으로

아들의 수학 문제에 열중하는 정오

 

우동집 앞

당신에게서 돌아서는 정오

돌아서 걷기 시작하는 정오

 

가는 비 내리고

손차양 한 사람들이

하나둘 처마 밑으로 모여드는 정오

 

신호대기중인

버스기사가 창밖으로 내민

흰 손에서

 

날갯짓하는 작은 새의

심장소리를 듣는

 

거리의 나무에

빛이 무늬를 새겼다

사라지는

 

불시에

이별을 예감하는 정오

 정오의 태양은 꼭대기에서 나를 봅니다. 비 오는 날에도 태양은 거기 있어 허름한 나를 은은하게 밝힙니다. 장혜령 시인의 「이별하는 정오」를 읽으며 빛의 시선을 생각했습니다. 빛이 바라보는 카운터 여자와 한 사내, 노인들, 양말 가게 남자와 비를 피하는 사람들을 상상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이 마음 깊이 묻어놓은 아름답고도 쓸쓸한 비밀들을 이야기로 쓰고 싶었어요.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가 이별하던 날의 태양을 떠올렸습니다. 돌아서 걷던 우리를 비추던 환한 빛과 이후의 오랜 밤에도 저물지 않던 사랑을. 마침내 우리가 가장 멀어져 나의 자정이 당신의 정오라 해도, 당신을 비추던 빛이 나에게도 찾아온다면, 나를 비추던 빛이 당신에게로 돌아간다면, 담담하게 매일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태양을 찾을 수 없다고 빛이 사라지진 않듯, 이별이 도래했다고 사랑이 메마르진 않듯, 언젠가 마지막 이별을 맞이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사랑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2023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詩를 사랑해."
2023 #동네라이브 네번째 시간✨
주하림 시인편 (with 조대한 평론가) 

 
이번주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시사 동네라이브 시간 💞
기괴하고 아름다웠던 지난 계절을 허물고
그 잔해로 지어올린 새로운 여름에 구독자을 초대합니다.

『여름 키코』의
주하림 시인과 함께 미리 만나는 여름,
놓치지 마세요😎

📌2/16 목요일 저녁 7시 30분 문학동네 인스타그램
 
💘최진영 소설가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이윤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려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

 

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

전생이구나

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 봄

 

저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

 

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

그것을 꺼내어보는 일

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

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보내어보는 것

 

피 묻은 그것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

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나

 

이윤설 시인의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를 마주하면서도 빛을 생각했습니다. 지옥과 빛. 나란히 두고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두 단어가 이 시에는 함께합니다. 가슴에서 꺼내놓은 지옥은 "네모난 작은 새장"입니다. 빛이 드는 베란다에 쪼그려앉아 자신의 자그마한 지옥을 바라보는 사람을 그려봅니다. 빛 속에서는 지옥마저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죽음은 어쩌면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일까요. 빛으로, 빛으로, 저 밝은 빛으로 아렴풋하게 스며드는 삶이 바로 죽음일까요. 이 시를 읽고 나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삶을, 죽음을, 슬픔을, 허무를, 그리고 나의 지옥마저 사랑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더 밝은 곳으로 계속 걸어가고 싶습니다. 한 편의 시는 때로 그 시를 쓴 사람의 평생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이 나에게 걸어와 스스로 깨우친 생의 결정적인 비밀을 무심히 말해주고 돌아서는 것만 같아요. 이토록 귀한 시를 이렇게 쉽게 읽어도 될까, 생각하며 다음 장을 넘기면 「이 햇빛」이란 시가 나타납니다. 다시 빛 속입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김복희 시인입니다.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 『스미기에 좋지』와 친절한 시작(詩作) 안내서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등을 통해 독자들께 다양한 방식으로 인사를 건네온 김복희 시인은 어떤 시를 골랐을까요? 다음주 수요일에 함께 확인해보아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그렇게 지구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마주하게 된 슬픔은, 어쩐지 이전과 다른 빛깔을 지니고 제 앞에 앉아 있습니다." 문장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왜 허수경 시인 시를 읽으면 슬픔이 나아지는 건지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서 기쁘고, 또 나아지는 마음입니다.
💬 「자유형」을 읽다가 "아름다움은 다 겪고도 안아주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눈물이 났어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떤 마음인지 가늠이 되어서요 시도 너무 아름다웠지만 임선우 작가님의 소감도 정말 좋았어요.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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