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비 책타래 #63 사랑과 기쁨을 응시하는 디자인: 『의존을 배우다』를 디자인하며.
『의존을 배우다』 41쪽 인용문

위의 글은 『의존을 배우다』 41쪽 하단에 붙어 있는 각주입니다. flourish라는 원서의 표현을 왜 기존 철학책에서처럼 ‘번성’이나 ‘번영’으로 번역하지 않고, ‘피어나다’라는 말로 번역했는지를 설명하는 번역자의 덧붙임이지요. 책을 꼼꼼하게 읽지 않는 독자들이라면 쉬이 지나치고 말 각주로 책타래를 시작한 이유는, 저 각주 하나가 출발점이 되어 책의 표지를 완성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에요.


철학은 궁극적으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학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철학자 에바 키테이는 자신이 평생토록 전념하고 헌신해온 철학에서 말하는 ‘좋은 삶’을 사랑하는 딸 ‘세샤’가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철학은 ‘이성’을 인간의 조건으로 여기지만, 세샤는 중증 인지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성’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도무지 확인할 수 없거든요. 그럼에도 에바 키테이는 “세샤가 피어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즉 새로운 철학을 통해 세샤가 ‘피어나는 삶’을 살 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하지요. 『의존을 배우다』는 이처럼 저자가 자신의 삶과 철학이 불화하는 지점을 치열하게 파고들면서, 딸의 장애와 함께 살아낸 삶을 증거 삼아 새로운 철학을 쓰고자 하는 도전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을 겁니다. 인지장애와 정신적 장애, 의존과 돌봄 같은 이 책의 주요한 키워드들은 단번에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거든요. 거기에 더해, (200자 원고지 기준) 2000매라는 이 책의 분량을 생각해보면, 두께가 있는 학술서를 어떻게 더 많은 독자들이 집어 들게끔 만들 수 있을지가 편집자로서 고민이 많이 되었어요. '돌봄'에 늘 밝고 따뜻한 측면만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이 품고 있는 사랑과 기쁨을 어떻게든 강조하고 싶었답니다.


이번 책타래에서는 한 권의 책의 표지, 그리고 본문 곳곳에 숨어 있는 디자이너(와 편집자)의 고민을 나누고 싶어요. 이 책의 독자들이 책의 작은 부분까지 꼼꼼히 살펴주시길 바라면서요! 

『의존을 배우다』 표지. 초록 바탕에 분홍색 꽃이 크게 그려져 있다. 꽃의 테두리는
디자이너의 후기

"철학자인 저자가 인지장애를 가진 딸을 보살핀 경험을 바탕으로, 돌봄윤리에 관해 고찰하는 책이에요."

 

처음 편집자에게 책 소개를 간략하게만 들었을 때 가볍지 않은 주제라서 그런지 막연히 어려운 책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진지하고 무겁게 작업하면 더욱 어려워보일 것 같았습니다.(막상 읽어보면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ㅎㅎ)

 

어려워 보이는 키워드들을 독자들이 친근하고 쉽게 느끼게끔 서체와 표지 이미지 모두 단순한 형태를 지향했습니다. 서체는 무게감이 덜한 탈네모꼴 글자 ‘sandoll 서울’을 사용했고 이미지는 인지장애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인지장애 당사자를 위한 훈련 프로그램 중에 (아마도 모두에게 친숙한) ‘따라 그리기’가 있더라고요.(책 속에서 인지장애(cognitive disability)는 “생애 전체에 나타나는 인지 능력의 다양한 저하”를 가리키며, ‘따라 그리기’ 활동은 주로 인지 능력 저하를 방지하기 위한 활동의 하나다.—편집자 주) 저도 어릴 때 많이 했는데, 점 위의 숫자에 의존해서 하나씩 연결하여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이 『의존을 배우다』라는 제목과 꼭 맞았습니다.

 

그 방식을 찾았으니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궁극적으로는 피어나는 삶, 즉 좋은 삶에 대해 질문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때문에 모두의 삶이 피어나는 것만 같은, 밝고 명랑한 느낌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라는 편집자의 말이 떠올라 꽃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엄마와 딸이 서로 사랑하고 의존하며 더 나아간다는 점이 불완전하고도 완전한 행위로 생각되어, 꽃잎의 선은 다 닫지 않고 마지막 하나를 열어두었습니다.


표지 지류는 스케치북 위에 그린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미세한 티끌이 있는 ‘켄도’를 사용했고 배경에도 약간의 텍스쳐를 주었습니다.

 

본문의 구성도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장을 구성하고 있는 층위가 많은 책인데요. 처음엔 로마자 숫자가 책을 한층 어렵게 보이게끔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삭제하고 싶었지만 구조적으로 파악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 다시 넣기도 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지 않는 주제이기에 낯설게 느낄 수 있지만 읽다보면 빠져드는 책입니다. 조금 더 쉽게 책을 집어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는데 독자분들은 어떻게 읽고 계실지 궁금하네요! :)


―디자이너 N(『의존을 배우다』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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