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가벼운 선물』 이후 4년 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이번 시집의 다정한 거리감이 퍽 인상적이에요. 무심하지도 호들갑스럽지도 않은 그 간극이 기껍게 다가왔는데요. 이러한 시적 태도를 취하게 되기까지 그 뒤편의 시간은 어땠나요?
그간 생애 마지막 졸업을 했습니다. 두번째 시집 『가벼운 선물』이 박사과정에 입학한 해 가을에 나왔고, 이번 시집은 졸업한 해 가을에 나오게 되었네요. ‘척척박사’가 되면 좀 똑똑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고, 다만 논문을 쓰는 동안 저 자신과 대면하게 되더라고요.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숨기지를 못하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단순한 동물. 그런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어요. 그걸 보고 나니 그전처럼은 안 되더라고요. 좋아도 선뜻 좋다고 못 하고, 싫어도 곧장 싫다고 못 하게 되고요. 그러면 이제 현대에 맞는 복잡한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에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네요. 다정하지도 무심하지도 못하는 인간. 멀리하지도 가까이하지도 못하는 인간. 졸업을 하고 나니 다시 스무 살이 된 느낌이군요. 막막한 와중에 이런저런 일을 하며 정신없이 봄과 여름을 보냈어요. 그 간극이 그래도 ‘다정’으로 묶일 수 있다면 다행이겠고요.
Q2. 이번 시집은 일반적인 시집 구성과 달리 부가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지난 두 시집도 마찬가지인데요. 굳이 부를 구분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지, 그렇다면 어떠한 흐름을 염두에 두고 시 순서를 배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다 보니 이번까지 세 권 모두 부를 나누지 않게 되었는데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이유를 붙여보자면 이러합니다. 비유하자면 부를 나누는 일은 산책로에 쉼터를 놓아두는 것과 비슷한데 저는 독자분들이 멈추지 않고 한 번에 걸어가시면 좋겠더라고요. 물론 시집 한 권을 단숨에 읽는 건 여러모로 힘에 부치기도 하고 덜 즐거울지도 모르지만요. 제가 떠올린 독자의 형상도 결국 걷는 사람이었어요. 첫 시집부터 시적 화자가 산책자라고 여겼고, 그 이동 경로가 실내와 실외를 오가며 목차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봤고요. 대략 이번 시집에서도 화자가 실내와 실외를 오가는 가운데 전반부에는 온도가 낮고 정적인 시편이 놓여 있고 후반부에는 모임의 이미지나 관계를 다룬 시편이 모여있습니다.
Q3. 이번 시집에는 제자리에 있는 듯하지만 미묘하게 바뀐 온도를 포착하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띕니다. 분명히 무언가 바뀌었음을 감각하게 되는 순간에 대해 들려주세요.
두번째 시집과 세번째 시집 사이에 제게 일어난 중요한 일 하나는 조카가 둘이나 생겼다는 것인데요. 가까이 살아서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보니 알게 됐어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타고나는구나. 첫째는 책을 아주 좋아하고 많이 읽는 대신 먹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둘째는 그 반대고요. 제 어린 시절은 따로 영상 기록이 없어 어머니의 증언에만 의존할 따름이지만 아마 제가 문학으로 오게 된 데에도 제 힘은 미미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기 의지가 무용하듯이 태어나기 전부터 지니고 온 사랑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번 생에서 제가 바꿀 수 있는 몫은 아주 한 끗에 불과하겠죠. 물론 언제나 그렇듯 그 작은 한 끗이 가장 바꾸기 어렵고, 또 가장 결정적인 변화이기도 할 테고요.
그래서 그 한 끗에 자꾸 눈이 가요. 크게 달라지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 아주 조금 달라지는 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돼요. 최근 오랜만에 발목을 삐었는데요. 보도블록에서 아스팔트로 발을 내딛다가 순간 발목이 꺾였는데, 높이를 가늠해보면 한 뼘도 안 되는 차이였거든요. 어느 쪽을 바닥으로 감지하고 있었는지 착각한 것이 그만큼 큰 충격으로 온 거죠. 미묘한 변화도 그렇게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큰 압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시로 예를 들자면 한 권의 시집 안에서도 시와 시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어요. 예컨대 「열린 공간」의 “열려 있어 밀면 열려”와 「문 고치기」의 “생활하려면 막아둘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열어둔 것이다” 사이. 무한히 열어두는 마음과 최소한으로 열어두는 마음 사이의 온도 차 같은 것이지요.
Q4. 이번 시집에서 유독 마음이 가는 시가 있다면 그 이유와 함께 소개해주세요.
‘시인의 말’과 「하안(河岸)」 사이에도 어떤 낙차가 있는데 그 낙차 때문에 지금은 「하안(河岸)」에 마음이 가네요. 하안은 제가 어렸을 때 살던 동(洞)의 이름이에요. 어머니가 제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하셔서 평생 그렇게 알고 살았는데 얼마 전 기본증명서를 뗄 일이 있어 보니 광명에서 태어났더라고요. 지역번호를 똑같이 02로 쓴다는 점에서는 같은 지역이라고 ‘칠’ 수도 있으려나요. 따지고 보면 경계란 원래 거기 있던 것이 아니라 누가 어디쯤에서 한번 그어둔 것이겠지요. 저는 이제 “사랑이 끝나면 영영 시작되지 않는 사랑도 있다”라고 말하던 「하안(河岸)」의 세계에서 “한 번은 들렀다 나온 마음”(‘시인의 말’)으로 족한 만큼의 온도 변화를 겪었어요. 그렇다 보니 제게 있었던 「하안(河岸)」의 마음이 어쩐지 조금 멀게 느껴져서 자꾸 마음이 쓰이네요.
Q5. “하얀 마음을 가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하고도 다를 것 같아요. 하얀 마음의 공동체에 도착할 독자들에게 인사 한말씀 건네주세요.
“하얀 마음”은 착한 마음이나 고결한 마음은 아니고요. 속죄하는 마음도 아니고요. 계속 더러워지는 마음, 그러나 씻을 수 있는, 회복 가능한 마음에 가까워요. 비 오는 날 장화를 신는 건 젖지 않아서가 아니라 젖어도 금세 닦아낼 수 있어서잖아요. 새것이 될 수는 없어도 계속 ‘다시’ 돌아오는 힘,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독자분들께 제 시가 바닷물처럼 짰으면 좋겠어요.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시였으면. 그래서 자꾸 다음 장을 넘기게 되고, 그러다 또 자꾸 첫 장을 다시 펼치게 하는 자꾸 하얀 마음이게 하는 시집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오래 머물러달라는 말보다는 또 와달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하얀 마음의 공동체라는 것이 어딘가 있다면 아마 그렇게 몇 번씩 되돌아온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