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수선화

안녕 결, 민경이야.


지난 금요일에는 꽃시장에 다녀왔어. 회사 근처에 시장이 있어서, 점심시간을 쪼개어 가보았지. 겨울답게 여리고 예쁜 꽃들이 많았어. 버터플라이, 라넌큘러스, 튤립 그리고 이른 프리지아까지. 

나는 수선화를 사고 싶었어. 꽃망울이 엄지손톱만 한 방울수선화를. 푸른 꽃도 함께 사서 주말 내내 곁에 두고 싶었어. 그런데 단 한 군데에서만 팔고 있던 수선화 상태가 좋지 않았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꽂혀 있는 수선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지. 


방울수선화를 알게 된 건 2년 전쯤이었어. 꽃을 선물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어떤 꽃을 좋아하냐 물었더니 수선화라는 이름이 돌아왔어. 수선화라면 얼굴이 크고, 줄기가 꼿꼿하고, 꽃다발보다는 흙밭에 심겨있는 게 더 어울리는 꽃이라 조금 난감했지. 구근을 사서 줘야 하나 고민하며 검색했는데, 그때 처음 방울수선화 사진을 보았어. 앙증맞은 모양새에 금방 마음을 빼앗겼고, 꽃시장에 갈 때마다 수선화를 찾았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아, 한 상인분께 물어보니 철이 막 지났다고, 겨울에 나올 거라 하셨지. 


그해 겨울에는 그 사람과 꽃을 주고받을 관계는 아니게 되어서, 수선화를 잊고 지냈던 것 같아. 그리고 이제 그다음 겨울이 왔고, 다시 수선화를 사고 싶어졌어. 


이번에는 사지 못했지만, 이제 소한이니까. 

남은 겨울이 넉넉하니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해.


*


수선화의 학명은 나르시스(narcissus)야. 익숙하지 않니? 

맞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해서 그곳에 빠져 죽은 소년의 이름이야. 그 이야기에서 나르시스가 빠져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수선화라고 해.


나르시스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어원이기도 하지. 

나와 나의 관계. 내가 나에게 관심을 주고, 많은 신경을 쓰고, 애착하는 일. 

그것이 너무 깊어지면 자신과 타인을 위협할 수도 있지. 


요즘은 그것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


나르시시스트라고 하면 어디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며, 과시적이고 거만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런 모습이 아닐 때도 많다고 해. 그런 모습이 핵심이 아니라는 거지.


병적인 나르시시즘의 핵심은 ‘무의식적인 자격 지심’과 ‘의식적인 우월감’의 분리로 정리된다고 해.(Robins, Tracy, & Shaver, 2001)*


즉, 무의식적으로는 나를 미워하고, 부족하다 여기면서도 의식적으로는 아끼고, 특별하다고 인식하는 마음이 핵심이라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쁘다 여겨지는 모습을 억압하고 제거하려고 하는 동시에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이상화하고 그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지.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쁜 나'와 '좋은 나' 사이 흐르는 강이 더 깊어지고, 굽이치게 되는 것.


그래서 나르시시즘 치료의 핵심은 내가 남들보다 잘 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좋고 나쁜 모습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거야. 모순을 받아들이고, 왜곡된 생각과 마음을 걷어내는 것. 오늘까지 한 공부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


자기애에 대해 공부한 요 며칠, 그 시간이 드라마를 보는 것(혼자 하는 일 중 가장 재미있어하는 일이야)만큼 재미있고, 도파민이 팡팡 터졌어. 왜냐면, 내 이야기니까. 


진단받은 적은 없지만, 나는 내가 유의미한 수준의 증상을 가진 나르시시스트라고 생각해 왔어.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너에게 이야기해보려고 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처음으로 '나 나르시시트인가?' 생각했던 건 22살이 되던 겨울이었어. 여느 때와 같이 친구와 한바탕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우리의 대화를 곱씹다가 그게 '우리의 대화'가 아니라 '나의 연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친구들에게 나와 대화할 때 어떤지 물었어. 나는 내 발화량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고.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고 해주었어. 그런가? 그저 단순히 말하기 좋아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된 걸까? 조금 찜찜했지만 넘어가려던 찰나, 다른 한 가지 생각이 들었어. 생일선물에 대한 생각이야. 


친구들이 신기했어. 말도 안 했는데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 아니면 나도 몰랐지만 내게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주는 게. 반면 나는 조금 고민하다 잘 모르겠어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사주곤 했어. 돌아보니 그게 부끄럽게 느껴졌어. 그리고 생일 선물뿐 아니라, 내가 친구들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인터뷰놀이할래?"

대뜸 친구에게 인터뷰놀이를 하자고 했어. 나는 질문만 할 거고, 너는 네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친구들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기꺼이 나랑 놀아줬어.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만 쓰던 마음의 방향을 조금은 바꿀 수 있었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말했듯 병적인 나르시시즘의 핵심인 '나쁜 나'와 '좋은 나'의 모순을 받아들일 힘이 생기진 않았지. 그걸 풀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흡수하는 일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어. 질투, 자격지심, 열등감 같은 감정을 자주 느꼈지. 그리고 나아지고 있다고 믿던 때, 특정 관계에서 내가 너무나 병적인 자기애를 분출하며 관계를 망치는 걸 보고는 허탈했어. 그래서 나는,


"불완전 무결"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 모든 마음은 불완전 무결하다**는 문장을 주문처럼 되뇌며, 나의 나쁘고 좋은 마음을 쓰고, 돌아오는 답장에 담긴 마음을 읽었어. 


나는 여전히 나쁜 나와 좋은 나 사이에 흐르는 강을 가지고 있지만, 그곳에 조금씩 징검다리 같은 게 놓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아질 일만 남았다고 믿고 있어. 


*


결, 혹시 너에게도 변하고 싶은 모습이 있니?


*


미세먼지가 심한 요즘이야.

(언젠가부터 편지 끝인사를 늘 염려 담긴 말들로 채우고 있는 것 같은데(웃음) 오늘도 다르지가 않네:)

물 자주 마시고, 마스크도 잘 챙기길 바라.



2023.01.08. 민경



추신.

*황성훈 저자의 <자기애성 성격 성향자들의 자기구조 특성: 외현형 및 내현형 자기애의 하위분류에 따른 접근(2010)> 글에서 본 문장이야.

**단 어떤 마음은, 행동으로 표현될 때에는 무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해.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41-2. 지난주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이 편지가 네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어.
"어떤 대답을 하여도 상관없음으로"

나에게 이 편지가 어떤 의미, 또는 도구일지 궁금하다고 했지? 너에게는 시간을 감각하고 또 구분하는 장치라면 나에게는 생각 장치야. 보태어 설명하자면 생각을 쥐어 짜낼 대로 짜낸 후 생각을 비우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지.

문득, 이전 화면으로 돌아가 몇 번째 편지인지 확인해 보니# 40-1, 이라고 적혀있네. 사십 주 동안이나 편지가 이어오고 있었구나! 내가 적어도 40번 정도는 특정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 해 보았다는 말이잖아.

내가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 여기고는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사색이라기 보다는 잡생각, 걱정, 근심 등으로 마음의 쉼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런데 레터를 시작하고 나서 부터는 한 주에 한 가지 주제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해 보았던 것 같아. 질문 자체를 이해 못해서 질문을 곱씹어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질문 자체가 문학 작품 같아서 감상을 한 적도 있었지. 나의 대답에 내가 감탄을 한 적도 있었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깜짝 놀라기도 했지. 어찌 하였거나 사색의 바탕이 될 토양이 갖춰지지 않았던 나는 기름 짤 때 깨을 쥐어 짜듯이 생각을 한도껏 짜내었지.

네가 늘 강조하듯이 '불' 완전 무결이라니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으므로, 어떤 대답을 하여도 상관없음으로 자유롭게 마구 쥐어 짜 내었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마감 전에 가시화 하여야 했기에 결론을 내리고 답장을 보내고 나면 희안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어. 한마디로 일단 비운거야. 신기하지? 그런데 그러한 작업이었다는 것을 지금 답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도 참 신기해! 앞으로도 네가 편지를 보내오는 동안은 계속 쥐어 짜 내어 볼 거야. 올 한해도 잘 지내보자.
*
맞아, 벌써 마흔개 넘는 질문을 주고받았다니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 그 시간 동안 질문을 통해 사색할 동기를 얻었고, 그게 만족스러웠다니 나도 기뻐. 그리고 마감은 참 소중한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웃음) 어찌되었든 머리를 팽팽 돌아가게 해주고 무언갈 남겨주니까. 올해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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