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는 님의 고독을 밝혀 읽을 만한 인문서, 소설, 에세이를 다룹니다.

그나마 서사가 보이는 1장에서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폐쇄된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그”와 먼저 요양원에 들어와 있던 “나”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간호사인 “그녀”와의 관계가 “나”의 파편적인 회상으로 드러납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이물인 것처럼 죽음의 증세를 보이는 그에게 나는 너무 깊이, 치명적으로 몰입하고 동화됩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블랑쇼의 앞선 소설 『죽음의 선고(1948)』부터 이어진 문체입니다. 일반적인 ‘의식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사유와 그 사유의 메아리로 흐르는 첨예한 문체가 도드라지는데요. 이는 2장에서 전면화되어 화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나”인지 “너”인지 “우리”인지 모르게끔 반향들과 함께 울려 퍼집니다. 이 목소리는 주체의 경계와 뿌리를 뒤흔들며 1인칭 화자의 자리를 이탈시켜, 더 내밀하고 거대한 대화의 장(場)으로 열어젖힙니다.

“너는 말하고, 너는 대답하지 않는 침묵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모든 질문을 던지는 단 한 명인가? 너는 내가 이미 지나친 오래전의 신중한 생각인가?”(...) 나는 네가 아직 오지 않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이 되기를 거부하며 네가 대항하는 거대한 자아가, 그 속에선 네가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거대한 확실성이 될 것이다.(119쪽)”

특정 개념을 인용하거나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이를 작품에 용해하는 글은 독자에게 신선한 사유와 불가해한 감정을 유발합니다. 나아가 그런 개념과 담론의 뿌리가 되는 작품은 독자에게 탄식과 침묵을 유발합니다. 독자가 들여다보는 바늘구멍으로 들이치는 텍스트의 회오리처럼 말이죠. 그것은 주체의 언어와 의식의 한계를 시험하며 더 낮고 깊이 흐르는 침묵으로 녹아들게 이끕니다. 그러면 주체는 이전과 같은 말 같은 침묵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하며 타인의 심연을 밝히는 당신의 고독은 분명 새로운 공동의 사유를 비추는 빛으로 작용할 겁니다.

피아노 앞에 앉는다는 것은 88개의 하양과 검정으로 그려낸 고독한 초상을 마주한다는 것. 그 음화(音畵)를 통해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거기에 한 없이 다가가는 창백한 손을 떠올리며 전율을 느끼고 위로를 받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엮여 흐르지만 이 흐름이 동시에 전개된다는 것을 일상에서 알아차리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음악을 깊이 좋아하는 사람에게선 취향을 넘어선 고독과 시공간에 대한 어떤 숙달이 보입니다. 고독은 시각을 둔하게 하고 청각을 예민하게 하죠. 시간을 내서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거나 그림을 보는 일. 그것들은 고독과 '촉각'으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나아가 "자기표현"-연주,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을 하기 시작하면 이 촉각적 관계는 나의 고독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고독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고 사유하기 시작하죠.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한 피아니스트의 음악적 탐구와 자기 성찰이 담긴 에세이입니다. 하지만 그 내밀한 표현들은 우리 삶의 굴곡과 고독을 생의 리듬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설득력과 감각까지 갖췄습니다. 또 음악가의 입장에서 음악적 탐구와 연습 그리고 라이브와 레코딩을 대하는 태도를 볼 수 있어 흥미로웠는데요. 특히, 지난 위클리 지관 <질투>편에 소개한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를 재밌게 읽은 분들에게 권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창조성과 고독의 친교가 필요한 분들에게도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대상만이 이런 식의 무모한 몰입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역설이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매혹이라는 감정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으며, 대체로 위험의 요소를 동반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잃는 길이기 때문에 타인과, 아이디어와,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14쪽)

핸드폰과 컴퓨터, 함께 할 친구들이 있는데도 밤늦게까지 홀로 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 일은 다른 일상의 단조로운 차원에 균열을 내고 나를 몰아넣는 경험입니다. 책이 새로울수록 그리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위험하고 잘못된 초대장을 펼쳐든 것처럼 피로와 현기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이야기를 빠르게 즐기거나 소비하기 위함이 아닌, 삶을 더 깊고 풍부하게 감각하며 살아내는 차원,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느껴지는 부드러운 충격일 겁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고독의 친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너를 거칠게 대하고 싶어

죽은 체 하는 걸까

산 체 하는 걸까

나는 그림자와 친해

내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는 나무 한 그루의 그림자와 친해

달빛은 검은 물체를 떨어뜨리지

햇빛은 잘게 부서지지

반짝이지

어젯밤 너의 눈빛은 하염없이 머물렀지

마치 눈먼 자 같은

그런 눈빛

그런 목소리로 너는 인생보다 긴 고백을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