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시.사 레터 11회 (2021.06.30.)

안녕하세요. 시 쓰는 주민현입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네요. 창문으로 환한 빛이 가득 쏟아져들어오는 계절입니다
요즘 같은 때엔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그늘을 골라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런 날엔 밀린 청소를 해도 좋고 음악을 듣거나 노란 꽃을 사다가 화병에 꽂아두어도 좋겠지만요. 낯선 시의 세계로 한 발짝 들어가보아도 좋겠지요. 그 속엔 잘 아는 말도, 모르는 말도 있을 거예요.

얼마간은 몸을 가볍게 만들고 따라가보아도 좋겠군요
요즘 제가 푹 빠져서 읽은 두 권의 시집을 여러분과 함께 읽어보고 싶어요.
💜주민현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홍대 앞에서 안네의 시간을 사세요(김향지, 『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
 
 
시급을 받은 히치하이커는 어디를
 
길거리 악사의 연둣빛 향이 풍기는 환락과
불안이 따뜻하게 익어가는 냄새
팔에서 떨어져나온 우리의 헛손질은
어디에서
 
초록 벤치 밑
작은 고양이가 마주한 밤의 눈알은
어디로부터
 
천 개의 모래시계를 삼킨 안네,
안네와 함께
 
             *
 
우리는 안으로, 안으로, 밖으로
어딘가로 들어가려 해
 
구름의 흰자위가 축축하게 흘러내릴 때
기분이 물고기 눈물만큼 시리기도 해서
 
쓸쓸한 단어들이
밀도 있게 들어찬 분홍 간판의 카페와
유언집행인이 하얀 기침을 쿨럭이는 식탁
둘레로
 
           *
 
갈기 찢어진 골목들을 지나
안네는 자전거를 타네
 
무릎까지 올라온 타이츠를 신고
시들어버린 모자를 쓴 야윈 신사,
그는 호황업계 대표
주머니에서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지폐가 나온 적이 없지
 
면도날처럼 얇은 그의 눈을 볼 때
안네, 안네여 너의 시간은
살색 빵의 질감으로 더욱 부푼다
 
르르르 르르르
안네는 타네 자전거를
 
             *
 
두꺼운 털옷 속에 잠든 꿈을 이용하세요
질문을 이용하세요
코끼리 코만큼 절박한 심정을 가집니다
라고 허공의 펄럭이는 슬로건을 향해
 
점프,
 
           그리고 점프,
 
                         그리고 종아리가 끊어지네
 
황량한 기후의 뒤뜰을
밤새
흥겹게 배회하는 외다리들
 
            *
 
찢어진 운동화 속에 혼란 40%, 일상 40%, 후회 19%
그러니까 하루를 계속 걸어가기
 
           *
 
느릿느릿 생에 침범하는 그늘은 왜 그토록 우리를 품으려는 걸까
 
목을 감싼 붉은 목도리에서 왜 겨울의 서늘한 입김이 먼저 피어나나
 
컵에 길게 떨어지는 우유처럼 의문이 조용히 이어질 때
 
휘몰아치는 슬픔이 잠든 저녁을 침 고인 채 씹을 때
 
춤에 대한 미친 사랑
 
이방인들의 도피처
 
안네 안네여,
 
설익은 사과 위로
비가 내린다
시인의 감상💡  
올해 4월에 출간된 김향지 시인의 시집 『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의 노란빛 표지를 펼치면 동화 같고 미로 같은 재밌는 감각의 말들이 펼쳐집니다. “불안이 따뜻하게 익어가는 냄새란 어떤 걸까요. 잘은 모르지만 왠지 보드랍고 폭신하게 구워지는 빵 냄새를 상상하며 시인이 펼쳐 보이는 길을 따라가봅니다. 홍대 앞이라는 현실의 거리에서 느닷없이 안네의 시간이 펼쳐집니다. 시인의 손에 이끌려 르르르 르르르안네의 자전거를 타고 길거리 악사를 지나, 불안을 지나, 카페와 식탁을 지나 점프, 점프 하면서 지나오면 겨울의 서늘한 입김이나 휘몰아치는 슬픔을 만나기도 하지요. 그 거리에서 조금은 어둡고 서늘한 이방인의 마음도 있습니다. “혼란 40%, 일상 40%, 후회 19%”의 하루를 살아가는,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서 있는 이의 마음을 매만져보면서요. 여러분의 일상은 어떤 것들로 배합되어 있으신가요. 저의 오늘은 피로 15%, 안정감 49%, 유쾌함 34%” 정도일 것 같네요.
이런 시집 속엔 대개 비밀이 가득하고 오래전 갖고 놀았던 장난감이나 키득키득 웃음 가득한 교환일기장이 숨겨져 있는 비밀 다락방이 펼쳐지기도 하지요. “소명은 있어도 긍지는 없”(「고집」)다는 담담하고 묵묵한 글쓰기를 따라가면 달리자/ 파트라슈! 네로가 달린다”(「파트라슈 달리다」)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동화 속 인물들이 새롭게 펼쳐지기도 하고 모든 끝은 너덜해집니다/ 그것이 아침의 형태”(「메리 아침」)와 같이 일상의 새로운 느낌과 감각이 만져지기도 해요.
💘 막간 우.시.사 소식: 
경축! 2021 세종도서 상반기 교양 부분 선정
2021년 세종도서 상반기 교양부문에 
이병률 시인의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가 선정되었습니다! 👏👏👏
 
 '국내 저자의 창작의욕 고취를 위한 도서, 교양도서로서의 가치가 높고 국민 독서문화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도서' 등의 기준으로 선정되었다는 으쓱한 사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는 앞으로 공공도서관 등 2800여 곳에 더 많은 독자와 만나게 될 예정이라고 해요. 감사합니다.  🙇
💜 주민현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당신은 사랑을 하는군요(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저녁이 찾아온다면
 
매일 환하겠지 매일 불타는 흰 밤이겠지
 
그러나
 
다락방에도 없고 계단 밑에도 없네
 
다락방이 없네
 
신발장 위 냉장고 위에도 없네
 
귀퉁이가 해진 담요 아래
 
의자 밑에도 책상 위에도
 
내가 사랑을 배우려고 한다면 네가 있다는 것을 배우느라
 
사랑이 무엇인지 알 틈도 없겠지
 
불 꺼진 방에 하루 이상이 잠들어 있다고
 
이불을 걷어보네
 
구름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네
 
비가 들이치겠지
머리 위 어깨 위 무릎 위에도
 
창문을 열어두었네
 
너를 알게 된다면 대낮이 끝나지 않는 시간이라면
 
문을 열어두겠네
 
다녀올게
다녀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지나가는 말이
 
냄새가 나기 시작했네
 
갈 곳이 없어서 자꾸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시인의 감상💡
지난해 출간된 김복희 시인의 『희망은 사랑을 한다』에서는 어쩐지 쓸쓸함이나 슬픔의 정서가 드문드문 만져집니다. “우리가 섬기는 기쁨이 우리를 기뻐할까”(「보면」), “병에 걸리면 병에 걸린 게 혼자가 아니라 좋았다”(「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와 같은 문장에서 따뜻한 슬픔을 느낍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소설이나 시에서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한데 의외로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을 찾기란 매우 힘듭니다. 사랑인 줄 알았다가도 금세 마음이 돌아서거나, 굳게 닫힌 마음 앞에서 좌절을 맛보기도 하지요. 잘 알겠다가도 모르겠고, 고독하다가도 마음이 충만해지고, 속절없이 가슴 아프다가도 금세 기뻐지기도 하는 것. 잘 아는 사람 같지만 끝내 모르는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연인이 아니라도 내가 사랑하는 동물이나 가족, 친구에게 느끼는 감각이기도 할 거예요. 이렇게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는 타인과의 만남이란, 그리하여 타인을 향한 환대란 어떻게 가능할까요. 끝내 속을 알 수 없고 끝내 완전한 편이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다녀올게/ 다녀와그렇게 무심한 듯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누군가의 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잠시 사랑이라고 불러보아도 좋을까요.
다락방에도, 계단 밑에도, 신발장이나 냉장고 위에도 없는 사랑의 마음은, “내가 사랑을 배우려고 한다면 네가 있다는 것을 배우느라/ 사랑이 무엇인지 알 틈도 없겠지”. 오로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열렬히 탐구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야 우리는 뒤늦게 사랑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반추하며 깨우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음주 시믈리에를 소개합니다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교보문고 마케터 박정남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바로 박정남 교보문고 마케터입니다. 
교보문고 마케터가 사랑해서 여러분께 영업할 시는 무엇일지 기대해주세요. 
그럼 모두,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오늘의 레터는 어떠셨나요?
오늘의 레터는 어땠는지, 어떻게 보완되면 좋겠는지,
여러분의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세요!
문학동네
lovepoem@munhak.com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10   TEL. 031-955-1926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