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관리의사 시범사업의 종료
근로복지공단에서 2024. 1. 3 일자로 아래와 같은 “산재관리의사 시범사업 운영 종료‘ 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왔습니다.
1. 평소 산재보험 업무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2. 산재근로자의 급성기 또는 재활치료 등 의료기관 기능에 맞는 산재전문의사를 임명하여 요양 초기부터 조기 재활치료 활성화와 원활한 직업복귀까지 체계적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18년부터 산재관리의사 제도를 시범사업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3. 시범사업 결과 산재관리의사의 차별화된 역할과 재활서비스 연계 등 주도적 역할에 따른 운영 효과성 미흡 및 효율적인 산재보험 의료전달 체계 마련 등을 위하여 산재관리의사 시범사업 종료 (24.1.31.까지 운영)를 알려드립니다.
4. 그동안 산재관리의사 관련 업무에 적극 협조해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리며, 향후에도 우리 공단에서 운영하는 사업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끝.
산재관리의사제도의 도입 배경
산재관리의사(Doctor of Work-related accident, DW) 제도는 독일에서 1921년부터 운영하는 산재보험 전문의(Durchgangs arzt; D-Arzt)를 우리 현실에 맞도록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2019년 1월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대강당에서 39명의 산재관리의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했으며, 그 이후 산재관리의사를 227명까지 늘렸었습니다.
이 제도의 도입 취지는 산업재해 이후 조기 진단 및 재활치료 지연으로 적기에 치료와 재활이 이루어지지 않아 의료기관에서 선제적인 대응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지정받은 의료기관의 산재관리의사가 조기 재활 활성화하고, 장해를 최소화하여 원활한 직업 복귀를 촉진하고자 했습니다.
[기사] 산재 환자 늘어나는 미래에 주목할 새로운 비전, 산재관리의사. 2019
독일의 산재의사
원래 독일의 산재의사는 산재발생사실의 미보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2015년 기준으로 약 4,100명의 산재의사가 연간 300만명 정도의 산재환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정 산재가 발생했을 경우, 피재자는 반드시 산재의사의 진단과 요양을 받아야 합니다. 재해가 경미하여 일반의사에게 치료받는 경우에도 일반의사는 재해자의 치유경과를 산재의사에게 확인받도록 합니다. 산재의사는 산재보험 관장기관과 맺은 계약에 따라 이 과업을 수행하며, 일정한 자격을 갖춘 정형외과 및 사고외과의 전문의가 산재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산재의사는 피재자를 초진하여 산재여부 및 요양절차를 명시한 '산재의사 보고서(Durchgangsarztbericht)'를 산재보험 관장기관에 제출합니다. 산재여부와 요양의 실시여부는 이 '산재의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산재보험관장기관이 '직권'으로 결정합니다.
[보고서] '독일 산재의사 신고제도 도입 필요성'에 대한 연구. 2016
우리나라에서 산재관리의사의 역할
독일의 산재의사 제도를 벤치마킹하여, 산재관리의사는 산재보험 의료기관에 전입한 산재환자에 대해 초기 치료 단계부터 상담, 요양 신청 안내, 치료 및 집중재활에 대한 상담, 재활인증 의료기관으로의 전원과 같이 직업 복귀에 이르는 전 과정을 관리하고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지원책은 행위수가의 20%를 추가 가산하여 진료비를 받을 수 있고, 진료계획서, 요양신청 소견서 등 발급 시 별도로 가산된 수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산재관리의사제도는 왜 실패하였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제도가 어떻게 운용되었기에 시범사업을 종료하게 되었을까요? 독일의 제도를 우리나라 현실에 맞도록 벤치마킹하였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 제도는 원래 ‘산재환자에 대해 초기 치료 단계부터 상담 및 요양 신청 등 안내’하도록 제도를 설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운영할 때는 산재요양이 승인된 이후부터 산재관리의사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 가장 중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지금 근골격계질환의 경우 요양 신청에서 승인까지 4~6개월이 소요됩니다. 사고로 인한 손상도 치료 시작부터 요양 신청과 승인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 일주일 이상의 행정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경우 의료기관에서는 급성기 치료가 끝나고 재활치료 과정에 있으므로 산재관리의사가 개입해야 할 시기는 대부분 지나버립니다.
산재의사는 왜 산재요양 승인 이후에만 역할을 하도록 하였을까?
이 제도의 시행 초기에 저는 산재요양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산재관리의사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수용될 여지가 없었는데, 현행 산재보상법에 규정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답변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산재관리의사’ 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제도를 만들었지만, 막상 실행하려고 보니 현행법의 절차와 어긋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는 지정한 ‘산재관리의사’ 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계는 의사가 자의적으로 업무관련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요양기간을 축소한다고 의심합니다. 경영계는 노동계 주장과는 정반대로 비판합니다. 정부는 요양 승인이나 요양 과정 중에 의료기관의 비리나 도덕적 해이의 가능성을 염려합니다. 그 결과 노사정 모두 새로 도입한 ‘산재관리의사의 판단과 조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맡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권한과 기회'를 부여하여 경험을 쌓아야 산재관리의사의 신뢰성이 향상될 텐데, 신뢰할 수 없으니 권한과 기회를 줄 수 없다면, 그것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와 같은 순환적 인과관계의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이 제도가 실패한 원인에 대한 설명이 없어 유감
이 제도가 시행된 후에 근로복지공단에서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공단이 이 제도의 성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으며,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고 싶어 연구 결과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 연구결과를 비공개로 하기로 하였는지, 아니면 아예 연구용역을 하지 않은 것인지도 알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제도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나 검토없이 산재관리의사제도를 폐지하기로 하였다니 산재관리의사 중 한 명으로서 참으로 유감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실패한 제도를 다시 도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산재관리의사 시범사업 종료 이후의 논의를 시작해야
산재관리의사가 종료된다고 하여 현재 산재보험이 직면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산재요양자 수와 비용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데도 요양 신청과 승인까지 기간은 매우 길어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매우 높고, 경영계는 정부가 요양 관리를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산재관리의사를 도입한 취지대로 운영하였다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그 역할을 다하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만약 존치하려고 하였다면 그 역할을 대폭 수정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노사정의 협의로 어렵게 만들어진 기구이므로, 이의 기능을 변경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됩니다만, 우리는 판정까지 수 개월씩 걸리는 위원회를 대신할 사회적 해결책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아야 합니다. 산재관리의사를 폐지하기로 하였다니 새로운 대안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노사정 및 전문가가 함께 논의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글쓴이: 이철갑 (조선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