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영본색 14
2021-11-07 입동

안녕하세요 이하오입니다

  중영본색 14호에서는 화려한 제작진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는 허안화 감독의 신작 <사랑 뒤의 사랑>, 007 시리즈를 패러디한 1994년 작품 <007 북경특급>을 소개합니다.
1. 할리우드 작품△ 중국 작품▽
  중국 내 코로나19 재확산의 영향으로 중국 극장가는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코로나 확진세가 가팔라지면서 일부 지역의 영화관은 잠정 상영중단에 들어갔습니다. 10월 중국 극장가를 들썩이게 했던 선전영화가 지나간 자리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작품들이 들어섰습니다. 최근 국내 극장가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작품 <007 노 타임 투 다이> <> 10월 말 중국에서 개봉하며 많은 관객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와 <듄>의 중국 포스터 © 더우반
  007 시리즈의 스물다섯 번째 작품인 <007 노 타임 투 다이>007의 오랜 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전설적인 SF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沙丘(모래언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원작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무섭게 번지는 코로나 확산세에도 꾸준히 흥행 성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스케일이 크고 볼거리가 풍부해 영화관을 찾게 되는 영화입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은 대부분 IMAX, 3D로 상영되며 영화표 가격은 중국 국내작에 비해 비싼 편입니다. 반면 기대를 모았던 허안화 감독의 <사랑 뒤의 사랑 第一炉香>, 황헌(黄轩) 주연의 로맨스 작품 <오해 乌海> 등 중국 국내 작품은 매우 저조한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2. 역대급 제작진으로 죽 쑨 <사랑 뒤의 사랑>
  허안화(许鞍华) 감독 연출, 마사순(马思纯) 펑위옌(彭于晏) 배우 주연의 영화 <사랑 뒤의 사랑 第一炉香>이 지난 1022일 중국에서 개봉했습니다. <사랑 뒤의 사랑> 1920~40년대 상해를 상징하는 중국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 장아이링(张爱玲)의 데뷔작 <첫 번째 향로>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상해와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장아이링의 작품들은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꾸준히 재해석되었습니다. 장아이링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이안(李安) 감독의 <색계 色,戒>가 있습니다.

<사랑 뒤의 사랑> 포스터 © 더우반
  홍콩 영화계의 대모라고 불리는 허안화 감독은 1984<경성지련 倾城之恋>1997<반생연 半生缘>에 이어 <사랑 뒤의 사랑>까지 총 세 편에 걸쳐 장아이링의 작품을 각색하였습니다. <사랑 뒤의 사랑>에는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미장센을 만든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과 일본의 피아니스트이자 영화 음악 감독인 사카모토 류이치가 참여했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적인 미술 감독, 의상 감독이 제작진으로 참여하여 예고편부터 뛰어난 영상미로 큰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세계적인 영화제들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보기 좋게 망했습니다. 흥행 성적은 처참하고 관객들의 후기에는 혹평이 가득합니다.

<사랑 뒤의 사랑> 웨이롱(주인공)과 리앙(고모)   © 더우반
  1920년대 홍콩, 가족들이 모두 상해로 떠나고 혼자 남은 웨이롱(마사순 역)은 홍콩에서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아버지와 의절한 고모 리앙(유비홍 역)을 찾아갑니다. 홍콩 사교계의 여왕으로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하는 리앙은 조카 웨이롱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지만 남편의 마음에 든 웨이롱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촌스럽고 순진했던 웨이롱은 고모의 집에서 지내면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지고 고모의 연하 애인인 홍콩 사교계의 탕아 조지(펑위옌 역)에 매혹당합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웨이롱은 상류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사업가인 고모부의 번역가 겸 젊은 애인을 자처합니다. 웨이롱은 조지의 애정을 갈구한 끝에 결혼에 성공하지만, 난봉꾼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조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떠납니다. 껍데기뿐인 결혼생활과 가식적인 사교계의 늪에 빠진 웨이롱은 공허감에 휩싸이고 끝내 고모와 남편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합니다.

<사랑 뒤의 사랑> 조지  © 더우반
  좋은 원작,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제작진, 인지도 높은 배우들의 조합에도 <사랑 뒤의 사랑>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객들은 크게 두 가지, 각색캐스팅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랑 뒤의 사랑>의 전반부는 소설을 따라가고 후반부에는 허안화 감독이 원작에 없던 웨이롱과 조지의 결혼 후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소설을 그대로 옮겨놓은 전반부는 캐릭터 설명을 위한 장면이 너무 많아 지루하고, 후반부 웨이롱과 조지의 결혼생활은 사족처럼 느껴집니다전쟁의 공포 속에서 쾌락으로 도피한 젊은이들의 시대적 상실감을 드러내기에는 펑위옌과 마사순 배우의 연기가 평면적입니다. 중국 관객들이 지적한 배우들의 조합 문제도 화면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영화를 이끌어야 하는 웨이롱, 리아, 조지의 삼각관계 구도는 비주얼이나 감정선 모두 설득력이 없습니다. 마사순은 순박하다 못해 맹하게 보이고 펑위옌은 시종 기름집니다. 1920년대 화려했던 홍콩의 모습을 재현한 유려한 화면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름다운 선율도 영화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로 잔뜩 치장한 영화는 지루함과 부조화 끝에 매력을 상실합니다. <사랑 뒤의 사랑>은 좋은 재료가 좋은 결과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3. 영국에는 다니엘 크레이그, 중국에는 주성치
  <007 노 타임 투 다이><장진호 长津湖>의 흥행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1029일 개봉 이후 줄곧 일일 관객 점유율 1위를 지키며, 코로나 재확산으로 인한 침체기에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0071962년부터 60년간 총 25편이 제작된 영국의 장편 영화 시리즈입니다. 007 외에도 수많은 첩보물이 있지만 007 시리즈는 영화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제임스 본드를 비롯한 영화 속 음악과 소품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패러디되고 있습니다. 냉전 시기에 제작되어 초기작에는 반공 색채가 있었으나, 시리즈를 거듭하며 오락성이 강한 상업영화로 거듭난 007 시리즈는 중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습니다. 중국의 여러 예능과 드라마에서도 비밀스러운 행동을 개시할 때면 어김없이 007 테마곡이 흘러나옵니다. 이번 편에서는 007의 수많은 패러디 중에서도 전설로 남아있는 1994년 주성치(周星驰)의 영화 <007 북경특급>을 소개합니다.

<007 북경특급> 포스터  © 더우반
  국내에는 <007 북경특급>이라고 소개된 이 작품의 중국 제목은 <国产凌凌漆>*, 제목에서부터 007 시리즈를 중국식으로 리메이크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사라진 국가 보물 공룡 화석을 되찾기 위해 홍콩으로 파견된 첩보원 007(주성치 역)이 이중첩자인 이향금(원영의 역)과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입니다. 오프닝부터 원곡과 미묘하게 다른 007 주제곡과 함께 오성홍기를 펄럭이며 시작하는 <007 북경특급>은 중국식으로 007을 재해석합니다. 제임스 본드와 마티니, 본드걸, 특수 무기를 제작하는 과학자까지 007영화의 중요한 요소들은 우스운 모양새로나마 모두 등장합니다. 앞뒤로 총을 쏠 수 있는 청개구리 총과 전화기로 위장한 면도기, 드라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신발, 본부와 교신할 수 있는 변기 뚜껑 등 <007 북경특급>의 신기술은 기발하고 황당합니다. 제임스 본드는 소림무술을 구사하고 화려한 액션으로 넘겨야 할 위기의 순간은 기행으로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国产凌凌漆>: 凌凌漆의 중국 발음은 링링치, 007의 중국 발음 링링치와 유사함.

<007 북경특급> 속 드라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신발 © 더우반
  그러나 <007 북경특급>은 패러디용 B급 영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초반에는 우습기 짝이 없는 주성치의 007은 후반부로 가면서 감탄을 자아냅니다. 하찮아 보였던 본드의 무술 실력은 누구보다 예리했고 저런 걸 어디 쓰나 싶었던 특수무기도 제 몫을 발휘합니다. 동네 건달 같았던 본드가 의리와 순정을 지키는 장면에서는 원작 못지않은 감동이 있습니다. 공안에 끌려가 사형 위기에 처했던 본드가 공안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나는 장면은 지금은 엄두도 내지 못할 멋진 블랙코미디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은 <007 북경특급>을 명작으로 꼽으며 수없이 돌려보고 있습니다. <007 북경특급>은 한국에서도 TV를 통해 여러 차례 상영된 바 있습니다. 편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를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겨울의 첫 절기인 입동입니다. 가을은 여섯 절기의 절반이 넘게 지나가도록 여름의 열기가 식지 않더니, 입동을 하루 앞둔 11월 6일 북경에는 첫눈이 내렸습니다.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며 겨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마시고 길어진 저녁 시간을 여유롭고 따뜻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발행인 이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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