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극락왕생 #고사리작가

[주말에 뭐 읽지]  2021-06-24 #62

책, 책방, 사람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주말의 책꽂이



운명에 맞설 때 신이 필요하다
고사리박사 지음/문학동네 펴냄

불교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판타지 웹툰 〈극락왕생〉이 책으로도 나왔다. 작품을 읽으면서 고3 수험생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 바로 옆에 큰 절이 있었다. 밤늦게까지 남아 야간자율학습을 하다 보면 입시제도에 대한 분노와 내 보잘것없는 성적에 대한 좌절이 섞여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곤 했다. 그럴 때면 몰래 담을 타고 절로 넘어가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불상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번뇌의 크기만큼 가장 치열하게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모색했던 시기다.

〈극락왕생〉은 오픈 플랫폼 ‘딜리헙’에 연재되었다. 상업성을 고려하기보다는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을 연재하고 싶은 작가들이 선택하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극락왕생〉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형 플랫폼에 연재되는 작품들과 비교하면 화당 가격이 높았고 기다렸다가 무료로 볼 수 있는 작품도 아니었지만 많은 독자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귀신이다. 당산역에 출몰하며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노래 ‘낭만고양이’를 부르라고 시키는 귀신. 지옥계에서 지장보살을 모시는 호법신인 ‘도명 존자’는 그 귀신을 잡기 위해 인간계로 나가지만 관할구역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세음보살에게 불려가 혼난다. 관세음보살은 도명에게 미션을 준다. 귀신이 인간이었던 시절로 돌아가 1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그가 선업을 쌓도록 도와 극락왕생하게 만들 것. 그렇게 귀신은 열아홉 살 고3 수험생(!) ‘박자언’으로 돌아가 도명과 함께 다시 한번 삶을 살아가는 모험을 시작한다. 사소한 다툼과 오해로 마음의 문을 닫은 친구·가족들과 화해하기도 하고, 한때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방황하는 귀신들이 악행을 하지 못하게 돕기도 한다. 좌충우돌하면서도 선한 의지를 잃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많은 독자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단순한 힐링물은 아니다. 박자언 또한 그저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되살아나게 된 데에는 보살들의 꿍꿍이가 있다고 여기며 이들이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에도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을 겪는 중이고, 자신의 운명을 그저 앉아서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뿐이다. “싸우는 사람에게는 순수가 필요하다. 굴종하지 않을 무결한 용기는 응당 고갈되어서는 아니 될 고결한 기질이다. 순수를 채우기 위해 신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신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이 작품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여성이다.〈극락왕생〉은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박해성(만화가)
*<2020 행복한 책꽂이>에 실린 글입니다.

책 자세히 보기 >>

시사IN 기자들이 주목한 책
왜 차별금지법인가
이주민 지음, 스리체어스 펴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얄팍한 이해는 악의를 가진 완전한 몰이해보다 나를 더 지치게 한다.”

여덟 번 발의됐지만 번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법이 있다. 차별금지법이다. 정치권은 차별을 없애자는 ‘안전한’ 주장은 하지만, 정작 ‘법적 책임’을 만드는 일에는 소극적이다. “사회적 합의 부족”은 늘 반복되는 명분이다. 인권변호사인 저자는 차별이 왜 정치와 법의 문제인지 질문하며 차별금지법에 대한 오해를 논박한다. 예를 들면 차별금지법 입법으로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것이라는 주장이나, 역차별이 생길 것이라는 예측이다. 차별금지법은 혐오 표현을 규제하거나 특정 약자 집단만을 위하려는 법이 아니다. 5월24일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이 시작되면서 다시 한번 정치의 시간이 열렸다. 차별금지법이 왜 “절박한 현안”인지 국내외 사례로 설명하는 이 책이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


봄을 기다리는 날들
안재구 지음, 안소영 엮음, 
창비 펴냄

“아버지,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1976년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던 수학자 안재구가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교단을 떠나야 했다. 3년 뒤 그는 결국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섰던 ‘남민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 책은 그의 둘째 딸인 안소영 작가가 1979년 10월부터 1988년 12월까지 아버지와 가족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엮은 책이다. 1988년 5월8일 아버지는 편지를 통해 4남매에게 당부했다. “출세해서 권좌에 올라선 너희들의 미래는 내 머릿속에는 없다. 크건 작건 권좌 아래에 하루하루의 삶을 의지하는, 속물적이고 비천하게 사는 너희들의 미래는 더더구나 없다.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의 뜻대로, 스스로의 책임으로, 작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너희들의 모습만이 내 마음속에 가득하다.”
 

가만히, 걷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외 지음, 신유진 옮김, 
봄날의책 펴냄

“나는 이 편지를 쓴 여성의 딸이다.”

딸을 만나러 오라는 사위의 초대에 어머니는 짧은 편지를 회신한다. 자신의 분홍 선인장이 곧 꽃을 피우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꽃은 4년에 한 번 피는데 “이미 매우 늙은 여자”인 자신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딸은 두렵고 흔들리는 날마다 어머니의 그 편지를 꺼내 읽는다. 지치지 않고 스스로 꽃 피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런 여성의 딸임을 기억하면서. 근현대 프랑스 작가 스물한 명의 산문을 한데 모아 〈가만히, 걷는다〉는 제목으로 묶었다. 〈천천히, 스미는〉(영미 산문선), 〈슬픈 인간〉(일본 산문선)에 이어 세 번째로 나온 세계산문선 시리즈다. 이번에도 번역가가 ‘산문 큐레이터’로 나섰다. 신유진 번역가는 1년 가까이 도서관을 헤매며 책에 실을 산문을 고르고 엮었다.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북하우스 펴냄

“진보의 지도는 승리들이 아니라 작디작은 전진과 변화들로 그려진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베이글, 요거트, 사과 한 알, 작은 치즈 큐브로 하루를 버텼다. 무려 3년 동안 매일 같은 것을 먹었다. 몸무게는 37㎏, 식욕이라는 단어는 불안과 동의어였다. 저자는 거대하고, 모호하고, 압도적인 ‘미래’ 대신 구체적이며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자신의 몸에 집착했다. 거식증은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회적 맥락과 압박 안에서 발생한다. 여성은 너무 많은 ‘금지’ 속에서 사회화된다. “너무 많이 먹지 마. 너무 커지지 마. 너무 멀리 가지 마.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마. 너무 많이 원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여성에게 욕구를 둘러싼 도전은 일생을 걸고 계속 분투해야 할 일이 된다. 그것이 ‘할 만한 도전’임을 유려한 문장으로 설득한다.
 
 책 자세히 보기 >>  
그림의 영토

브레멘은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절망에 빠진 존재들이 꿈에 그릴 만한 목적지였을까. 19세기 초 <브레멘 음악대>의 네 동물은 브레멘에 가지 않았다. 가는 길에 도둑들을 내쫓고 음식과 금화를 차지한 뒤 눌러앉았다. 21세기라면 어땠을까?│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그 네 마리 동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체 글 보기 >>
매일 당산역을 지납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하거든요.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한강을 보게 됩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 그렇지는 못합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딴일에 정신을 파느라 한강을 지나는지조차 잊을 때가 많죠.
 
다만 의식할 때만은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당산역을 지나는 순간 고개를 들어 한강을 가능한 먼 곳까지 바라보려 눈의 초점을 다시 맞추곤 하죠. 언제부터 그랬냐고요? 몇 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한강 사진을 찍고 있다는 어떤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 따르면 한강은 매번 다른 모습이라 하더군요. 계절에 따라 유량이며 유속, 물빛이 모두 미묘하게 다르다고요. 때로는 물살 위에 부서지는 햇빛의 각도만으로도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제 마음속 어느 지점을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추천책을 알게 된 뒤로는 당산역을 지날 때마다 <낭만 고양이>가 떠오를 듯합니다. 이 책에 등장한 ‘당산역 귀신’이 자기를 알아 본 지하철 승객한테 요구하는 게 체리필터의 노래 <낭만 고양이>를 목청껏 불러보라는 거니까요. 평소 웹툰을 즐겨 보지 않는 저는 이 글을 읽고서야 딜리헙도, <극락왕생>도 처음 알게 됐는데요. 알고 보니 이게 참 대단한 웹툰이더군요. 문체부장관상을 받았다거나 드라마 제작이 확정돼서만이 아닙니다. 이 작가가 딜리헙에 이 작품을 올리면서 받았던 구독료가 회당 3,300원이었다고 해요. 웹툰 하면 공짜 내지는 100~200원 내는 데 익숙해져 있던 독자들을 오직 작품 하나로 설득해낸 웹툰이라니, 뭔가 굉장하지 않나요?
 
더위에 유난히 약한 저는 이즈음만 되면 말 그대로 의욕상실. 책 한 줄도 읽기 싫은 지경에 빠지곤 하는데요. 저 같은 분들은 이럴 때 평소 즐기던 것과 조금 다른 장르의 책을 접해 보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자극이 일상을 덜 지치게 만들어줄테니까요.  본격적인 더위의 초입. 다들 건강도, 읽을거리도 미리미리 잘 챙기시길요.  

p.s. 그나저나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귀신이 더 무서울까요, 아니면 낯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더 무서울까요? 😅

"늘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덕분에 요즘 책 읽는 시간이 늘었고 지인들에게도 추천하고 있어요. 
더불어 시사인 구독광고도 자발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호 뉴스레터를 받아본 독자께서 남겨주신 사연입니다💌 
편집자에게 하고 싶은 말, 또는 뉴스레터 구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언제든 아래 버튼을 누르고 의견을 남겨주세요.
<시사IN> 뉴스레터를 아직 구독하기 전이라면 여기

💬 받은 이메일이 스팸으로 가지 않도록 이메일 주소록에 book@sisain.kr 등록해주세요.  
수신거부 원한다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주)참언론
webmaster@sisain.co.kr
카톨릭출판사 빌딩 신관3층 02-3700-32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