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에피소드를 정독한 이라면 나의 여행 취향이 도시보다 자연 쪽에 치중되어 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나는 이따금씩 사심을 담아 아웃도어 주제의 취재 기획을 짜냈고, 운 좋게도 몇몇은 살아남았다. 여행 잡지 에디터는 보통 사진가와 짝을 이뤄 취재를 가는데, 그렇기에 사진가와의 합이 은근히 중요하다.
여러 사진가들과 동행 취재를 다니면서 사진가 O를 알게 됐다. 그와의 첫 출장지는 고군산군도. 지금은 새만금방조제에서 다리가 뚫려 가는 길이 수월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이틀간 고군산군도를 부단히 쏘다니며 자전거를 타고 캠핑을 하고 배낚시와 산행까지 하는 (내가 짜낸 기획이니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 아웃도어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나도 나름 체력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촬영 장비를 이고 지고 이리저리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O의 강철 체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뭔가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출장이 잡히면 나는 0순위로 O에게 연락을 했다. 아웃도어 매거진에서 다년간 일한 경력이 있는 O는 내가 아는 사진가 중 아웃도어에 가장 진심인 사람이었다. 그는 일과 별개로 시간을 내 전국 각지로 백패킹을 다니는 것은 물론, 어떤 때는 취재 장소를 하루 먼저 찾아 나홀로 캠핑을 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러닝과 등산, 자전거로 체력을 기르는 건 기본. 이러니 전국의 글램핑장을 샅샅이 돌아보는 특집 기사와 덴마크 교외 지역을 3일간 꼬박 걷는 트레킹 대회 취재를 앞두고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외에도 몽골 하이킹, 캘리포니아 왕복 1,800km 로드 트립(앞선 에피소드를 정독한 이라면 다사다난했던 그 출장을 기억할 것이다) 등 뭔가 난이도가 높아 보이는 출장은 늘 사진가 O와 동행했다.
O와 취재를 다니면서 나 역시 백패킹에 차츰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추천을 받아 장비를 알음알음 모으다가 어느덧 경량 텐트를 하나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텐트의 개시를 위한 백패핑은 당연하게도 O와 떠나기로 했다. 청평의 호명산을 등산하고 산 아래 잣나무숲 캠핑장에서 하룻밤 머무는 여정. 취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뜰하게 일정을 세워 통보했다.
청평역에서 호명산 정상을 찍고 호명호수를 거쳐 상천역 방면으로 하산하는 코스는 꼬박 8시간이 걸렸다. 산 아래 캠핑장에 도착하니 제법 노곤함이 밀려왔다. 사전에 그는 캠핑장에서 저녁은 간단하게 먹자고 일러줬다. 사실 캠핑의 꽃은 요리 아니던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배낭에 먹을거리와 취사 장비를 잔뜩 욱여넣었더라면 텐트 칠 힘조차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찾은 캠핑장은 실제 주차장과도 거리가 제법 떨어진 곳이라 대체로 간소한 장비를 들고 조용히 머무는 백패커들이 주를 이뤘다.
간소하게 저녁을 먹고, 사진가 O는 숲에서 솔방울과 잔가지를 모아 휴대용 화로에 불을 지폈다. 그러고는 배낭에서 작은 술 1병을 꺼냈다. 200ml짜리 제임슨. 유럽이나 미국의 펍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이리시 위스키의 대명사 말이다. 느긋하게 불멍을 즐기며 캠핑용 시에라 컵에 따른 제임슨을 한 모금 홀짝이니 노곤해진 몸이 사르륵 풀렸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서 자작자작 점멸하는 모닥불을 응시하며 마시는 위스키라니. 대화나 음악이 없어도 그 어느 바에서 마시는 위스키보다 맛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캠핑과 위스키의 조합을 생각해 낸 O의 혜안에 감탄하며 그간 내가 캠핑장에서 보낸 밤을 떠올려 봤다. 고기를 양껏 굽고 맥주와 소주를 퍼마시며 다음 날 라면으로 해장을 하는 레퍼토리. 장소만 캠핑장일 뿐, 사실상 대학생 시절 MT로 다져진 술판과 다름없었다.
그날 우리가 마신 제임슨은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위스키다. 사실 아일랜드는 위스키를 최초로 탄생시킨 종주국이지만, 스코틀랜드의 위세에 밀려 쇠락을 거듭했고, 2,000개에 가깝던 증류소는 단 3개로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위스키 지형도에 여전히 명함을 들이밀 수 있게 된 계기는 일종의 합종연횡 작전 덕분이다. 얼마 남지 않은 증류소들끼리 과감히 합병을 해서 증류기를 공유하는 방책을 택한 것. 제임슨, 부시밀즈, 레드브레스트 등 유서 깊은 위스키가 선택과 집중을 하니 한층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해졌고, 스카치 위스키에 비해 가격 경쟁력도 갖추게 됐다. 제임슨이 놀라운 가성비를 앞세워 아일랜드뿐 아니라 유럽과 미주 각지의 바에 빠르게 자리를 잡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임슨을 비롯한 아이리시 위스키는 3회씩 증류를 한다. 보통 2회 증류에 그치는 스카치 위스키보다 한결 부드럽고 깔끔한 맛을 내 입문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캠핑장에서 제임슨을 맛본 이후 백패킹 혹은 캠핑을 떠날 기회가 생기면 위스키부터 골랐다. 오토 캠핑이라면 병째로 챙겼고, 백패킹이면 플라스크에 옮겨 담아 가기도 했다. MZ세대를 주축으로 위스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휴대성 좋은 200ml 사이즈의 위스키도 제법 다양하게 출시됐다. 제임슨처럼 부드러운 풍미의 아이리시 위스키도 좋고, 불멍을 길게 즐길 때면 훈연향이 짙게 밴 아드벡 같은 피트 위스키도 잘 어울렸다. 나에게 백패킹의 매력을 전수한 사진가 O와의 인연 역시 한층 깊어갔다.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 불러도 좋을 원대한 모험을 떠나게 됐으니. 고생길이 훤하고, 위스키 캠핑도 원 없이 즐긴 스코틀랜드 여행. 그 이야기는 뒤에 좀 더 소상하게 풀 계획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