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내버려 두듯이



"가는 꽃두고

멈춰버린 두 다리

어쩌지 못해"



3월은 불편하다. 꽃 피는 계절을 시작부터 폄훼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시작'의 지점을 어려워하는 나 같은 이들에게 3월은 다소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새 학기, 새 교실, 새 반, 새 선생님, 새 아이들... 그 모든 새것에 대한 거부감은 대학까지도, 심지어 일을 할 때도 이어졌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변화가 적은 일을 해야겠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를 대강 아는 사람들 역시 나를 '공무원'이나 그에 준하는 안정적인(출퇴근이 명확하고 근속이 길 수밖에 없는) 그런 직업을 가질 거라 생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면,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은 주로 "쟤가 커서 밥이나 벌어먹을 수 있을까?"라며 정반대의 의견을 내곤 했다. 억울한 면이 없진 않지만 그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있는 편도 아니었고, 사회생활(?)이라 불리는 능력도 좋게 쳐줘봐야 중하위권이었다. 게다가 지루함을 견디는 내성도 낮은 편이라 같은 일을 오래 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변화를 싫어하는 주제에 반복을 지겨워하는 성격이라니... 듣기만 해도 부모 입장에서는 머리가 지끈거렸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학을 나온 뒤 했던 몇몇의 일은 "어쩔 수 없어서."라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자아실현이나 미래를 위한 준비 같은 거창한 의미의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할 수 있는 일, 견딜 수 있는 일, 조금이나마 관심 가질 만한 일을 찾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덧붙이니까 이유가 될 법한.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온갖 의미와 대의명분으로 중무장해야 겨우 출발점에서 발을 뗄 수 있는 세상에,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세상에...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굴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음"이라는 석유로 엔진을 움직이고 바퀴를 굴리고 주차장에서 주차장까지. 옮겨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수동적인 것은 아닌가? 싶지만 우리 모두는 시작부터가 수동적이었다. 태어나고 어느 정도 자라고, 그만큼 더 자랄 때까지도.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수동적 동력'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동적'이라는 말의 부정적 의미가 마음에 걸린다면 나의 방법론을 사용하길 권해본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저는 지독한 운명론자거든요."


실제로 나는 지독한 운명론자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심지어 최선을 다한 일의 결과까지도. 나는 운명이라 믿어 버리는 성격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대로, 나쁜 일이 있으면 그것대로. 모든 것은 운명에 쓰여 있다. 아니, 새겨져 있다. 어쩌면 바위 같은 것에 새겨져 있어서 수정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위를 깨부술 정도의 능동적 태도가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만큼의 의지나 힘은 주어지지 않는다. 겨우 주어지는 것은 '붓' 정도일까? 그래서 바위 빈 구석에 적당히 꽃도 그리고 별도 그리고, 바다도 그리며 정해진 운명을 꾸미는 것이 전부다. 다행히 나는 그 정도의 자유도가 좋다. 게임도 그런 것들이 있다. 이른바 멀티 엔딩 시스템이라 불리는 게임들. 어떤 분기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엔딩이 나오는 식이다. 보통 이런 게임의 경우 게이머들은 엔딩을 수집하곤 한다. 한 번 클리어를 한 뒤, 다른 엔딩을 보기 위해 같은 게임을 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엔딩을 한 번 보면 아무리 다른 엔딩이 궁금하더라도 다시 플레이하지 않는다. 그저 같은 게임을 반복하는 게 지루해서일 수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어쩐지 치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데 '치사'까지 나올 일인가 싶지만... 사실이 그렇다. 게임 역시 하나의 세계라고 생각한다면 무수한 반복으로 인한 멀티 엔딩을 보는 것은 어쩐지 치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른 엔딩을 볼 기회가 또 주어진다는 것을 알면 어쩐지 '열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그라들곤 했다. 그래서 아무리 안타까워도 보지 못하는 엔딩은 보지 못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편을 택했다. <옛 사랑>의 가사처럼 말이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이문세의 <옛 사랑>에 나오는 가사. 이 두 줄의 가사를 보면 그저 멈춰 서 버린 화자의 모습에 아무런 동력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내버려 두는 것, 받아들이는 것, 품에 안고 속에 쌓는 것. 그것은 다시 사랑한다 말하는 것보다 큰 동력이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운명에 대항하는 것만큼이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힘들 때가 있는 듯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은 대부분 후자를 강요하곤 한다.


그렇다면 운명론자가 되는 것.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바꾸어 내는 것. 그래서 안간힘이라도 내는 것. 그 방법을 배우는 것은 어쩌면 필수과목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거리에 흔히 놓여 있으니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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