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너의 수수께끼

안녕하세요. ‘우리는 시를 사랑해독자 여러분. 시인 백은선입니다. 봄과 여름 사이 요상한 계절 다들 무탈히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가끔 겨울을 생각하면 지금의 녹음이 믿기지 않고, 이상하다 생각할 때가 많아요. 세계의 풍경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요. 우리 마음의 풍경도 계절처럼 때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시를 읽고 있는 순간에는 가끔 그런 변화를 겪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은 시 두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부디 기쁜 마음으로 혹은 슬픈 마음으로 함께 읽어주세요. 건강하고 평안한 한 주 보내세요.

💗백은선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관찰자로서(박세미, 내가 나일 확률)
 
마주앉은 사람이 내게 끝없이 질문을 합니다 대답을 하면 할수록 내가 지워지는 줄도 모르고
뒤에 있는 사람이 내게 끝없이 용기를 줍니다 주먹을 쥘 때마다 내 두 눈이 감기는 줄도 모르고
 
몰려드는 구경꾼들
그들 한가운데 나는 속이 비치는
동물
그들은 각자 스케치북을 꺼내어 드로잉을 시작합니다
 
이제 나는 관찰 대상입니다
해안가로 떠밀려온 돌고래로서
죽은 새끼를 안은 채 영영 잠이 든 침팬지로서
가끔 사람 행세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나를 그린다면서 자신들을 그려놓았습니다 나는 잠시, 내가 선택한 것이 죽음은 아니었는지 생각합니다
 
벽과 종이와 액자로서
태어납니다 서로에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시인의 감상💡

박세미의 관찰자로서는 질문과 대답의 함의를 뒤집으며 시작한다. 대답을 하면 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는세계다.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일 텐데 왜 점점 사라져버리게 되는 걸까. 나는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는 자꾸 고정되고 정의내려져 납작해진다. 내가 갖고 있던 풍부한 것들, 번져나가고 흔들리는 것들은 이제 단정한 울타리 속으로 들어간다. 용기 또한 마찬가지다. 받을수록 사라지는 힘. ‘힘을 내라는 말은 얼마나 쉽고 단순한지. 꽉 쥔 주먹 안에서 풍경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꾸만 앞으로 사람을 돌려세우는 일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나를 보는 수많은 눈이 내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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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부러진 부리(박세미, 내가 나일 확률)
 
똑같은 수첩을 매일 훔쳐도
여자애는 입술이 말랐다
 
집밖에 방이 있다
 
내 뱃속엔 축축한 깃털을 가진 새가 살고 있어.
물건을 훔칠 때, 입 밖으로 쑥 빠져나가.
 
장롱 가장 안쪽으로 손을 뻗어
휘휘 저으면 날개가 생기는 것 같고
 
집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발이 비쩍 마르는 것 같고
 
침대 밑 숨겨둔 보물들은
불을 끈 방안에서도 반짝거렸다
 
낮에 꾸는 꿈속에서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어. 그것은 팔을 두를 만큼 크고, 도끼 같고, 방을 쪼갤 수 있지. 그러다 그것이 부러지면 나는 해냈다고 생각해.
 
깊게 벌어진 나무 사이로 박힌 부리가 있다
 
가방을 살짝 열어두고
말랑한 입술로 막대사탕을 쪽쪽 빨면서
오늘도 시도한다
💡시인의 감상💡

부러진 부리는 과거를 환기시키는 시다. 좋은 시란 뭘까. 고민해볼 수 있다. 내일은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만 오늘밤 내게 좋은 시란 나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고 일깨워주는 시라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그 감각이 나를 관통해갔으며 그 시를 전유함으로 인해 읽기 이전의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면 좋은 시가 아닐까. 어젯밤에는 아이와 함께 누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가게에서 본 것이 너무 갖고 싶어 훔칠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괜찮아,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어, 나쁜 마음이 들 때가. 그게 나쁜 마음인 걸 알고 네가 행하지 않았으니 괜찮아. 사람에게는 좋은 마음만 있지 않아서 나쁜 마음을 잘 단속하며 사는 것도 네 숙제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 박세미의 시집을 다시 읽으며 부러진 부리를 발견한 우연이 신기했다. “똑같은 수첩을 매일 훔쳐도/ 여자애는 입술이 말랐다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다 그것이 부러지면 나는 해냈다고 생각해.이 문장은 내게 깊게 들어왔다. 슈퍼 앞 좌판에서 신호등 사탕을 집어 골목길을 부리나케 달려가던 날이 떠올랐다(물론 슈퍼 할머니에게 잡혀 집까지 같이 가 부모님께 얻어맞았다). 집밖에 방이 있다고 느꼈던 어린 내가.
💖 다음주 시믈리에를 소개합니다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박연준 시인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바로 박연준 시인입니다. 
그럼 모두,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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