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준비청년과 좋은 어른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연결합니다.

느리게 느리게 다가오고 있는 소.연

소연을 처음 봤을 때, 말이 걸기 어려운 친구,

말을 걸어도 더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친구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어떤 부분은 변함이 없고요.

그런 친구가 허들링 커뮤니티에 4년 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무척 가까워지지는 않고, 아는 사이처럼 말이죠.

소이프에서 하는 캠페인 활동가, 디자인 아카데미도 참여하면서

느리게 느리게 가까워지고 있는 소연은 알고보면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물어보지 않는 것은 먼저 말하지 않지만,

물어보는 것은 최선을 다해 말해주는 소연에게는

만날 때마다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Q1. 소연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이제 엄마, 아빠, 동생이랑 함께 살았어요. 두분의 불화로 초등학교 2학년 때 이혼하게 되셨어요.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엄마랑 살았어요. 그런데 아빠가 양육비도 주지 않았고, 동생이랑 저를 혼자 키우고, 일까지 하려니 엄마가 너무 힘들었나 봐요. 어느날 “아빠한테 갈래?” 물어보시더라고요. 엄마가 힘든 게 저한테도 느껴지니까, 아빠한테 가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엄마는 아빠가 애들이랑 살려면 집도 규모가 있어야 되고, 양육비를 못 보내줄 거 같으니까 살던 집 보증금을 빼서 아빠에게 돈을 보내셨어요. 아빠는 그 돈을 동업 사기 당했대요. 그래서 한동안 아빠 아는 사람 집에 얹혀 살았어요. 그러다 집을 얻어서 나왔는데 아빠가 집에 거의 안 들어왔어요.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동생이 기억하기로는 저희가 시설에 들어가기 전 세 달 정도 집에 안 들어오셨대요. 아빠가 연락해둔 주변 식당에서 가끔 밥을 먹고 그랬어요.


동생이 2살 어렸는데 저는 중학생이 되었고 동생은 초등학생이었을 땐데요. 등교는 제가 더 빨리 하게 되잖아요. 학교에 가면서 동생을 깨우면 잘 못 일어나는 거예요. 우선 학교에 가라고 깨우고 학교에 갔는데, 아침에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한동안 동생이 학교를 안 갔나봐요. 오랫동안 학교를 안 나오니 선생님께서 가정 방문을 온 거예요. 아빠도 저희가 버겁다고 생각을 했는지 교회 전도사님이랑 논의를 해서 아동양육시설을 알아보고 보내신 거죠.  


당시에 엄마는 우리가 시설로 들어간지 몰랐대요. 아빠가 보낼 때 엄마에게 말을 안 한 거예요. 엄마가 나중에 알고 헐레벌떡 쫓아와서 가자고 했는데 싫다고 했어요. 저는 시설이 되게 괜찮았어요. 일단 삼시세끼가 잘 나왔으니까. 지금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면 마음 아픈 일인데, 그땐 그랬어요. 생활 공간도 넓고, 이제는 내가 동생을 안 돌봐도 된다는 해방감도 있었고요. 내가 고민하거나 노력할 필요 없이 삼시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던 거 같아요. 또 본능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엄마랑 다시 가도 엄마의 힘든 모습도 보다가 또 힘들어서 아빠한테 다시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이후로 한 달에 한 번인가 외출해서 엄마랑 만나고, 외박도 몇 번 다녀왔어요. 고등학생이 됐을 때쯤 엄마가 나오는 건 어떠냐고 다시 물어봤는데, 시설에 있는 게 대학 진학에 굉장히 유리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럴 마음도 없고 시설에서 대학에 가겠다고 했죠.

Q2. 그럼 퇴소 후에 집을 구해서 독립을 시작했던 건가요?

바로 집을 구하진 않았고, 자립생활관에 살았어요. 시설에서 퇴소할 나이가 되고, 2013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바로 자립생활관으로 갔어요. 2014년도쯤 엄마가 같이 살아가보자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니가 결혼하게 될 텐데 이때가 아니면 언제 살아보겠냐고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같이 살게 됐는데. 원가정에 복귀한 걸로 되서 수급자 자격이 영원히 박탈되어 버렸어요. 하하.


그것도 그거지만 엄마랑 너무 안 맞는 거죠. 엄마가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부터 시작해서 생활습관도 많이 달랐고요. 사실은 성인이 돼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또 다른 룸메이트가 생기는 건데. 맞지 않는 룸메이트랑 사는 기분이었어요. 전 육식주의 거든요. 멸치와 김치만 먹고 살 수가 없는데 부탁해도 엄마는 고기 반찬을 안 해주고. 엄마가 늦지 말라고 잔소리해도 밤 12시쯤이나 돼야 집에 들어가서 잔소리 듣고. 뭐 서로 남의 말을 안 듣는 거죠. 계속 같이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홀로서기를 할 준비를 했어요. 2017년도부터 LH주거 지원을 알아보기 시작해서 2018년부터 혼자 학교 근처에 살았어요. 엄마랑은 연락만 가끔하고.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 가족 모임에서 만나요.

Q3. 갓 자립했을 때는 모르는 것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어디서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았나요.
자립 정보는 선생님들이 올려주신 걸 보고 관심 갖고 도전하다 보니까 다양한 지원사업을 해볼 수 있게 됐고요. 2019년도에 아름다운재단을 시작으로 지원사업을 시작했는데, 대학을 재입학했던 2018년부터 알았으면 신입생 때 지원받을 수 있는 것들 다 해봤을 텐데 늦게 알아서 아쉬운 점도 있어요. 2013학번으로 처음 대학에 갔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죠. 닥치는대로 살았어요. 학점이 망했던 학기에는 국가장학금이 안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현금서비스도 받고 그랬어요.
Q4. 2020년에도부터 허들링 커뮤니티에 참여했는데요. 어떻게 알게 되어 가입했나요? 4년 동안 꾸준히 참여했는데 어떤 점 때문에 지속적으로 활동했는지도 알고 싶어요.
퇴소한 친구들과 시설 선생님과 소통하는 밴드가 있어요. 시설 선생님이 지원사업이나 자립에 필요한 정보를 밴드에 올려주시는데요. 당시에 허들링 가입 정보를 봤어요. 이런 모임이 있으니 한 번 활동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가입을 한 거죠. 그때는 대학생이었거든요

맨처음 자립준비청년 자조모임에 참여한 건 2019년에 아름다운재단에서 진행하던 사업이었어요. 10명씩 팀으로 활동했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별 거리낌 없이 허들링을 신청한 것 같아요. 와보니 허들링은 활동하는 당사자가 30명쯤 되더라고요. 인원이 많아서 조금 버겁기는 했는데, 종종 소모임도 있어서 괜찮았던 것 같아요. 4년이나 활동했군요. 그냥 매주 오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2021년도에는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소이프에서 매달 장학금도 받아서 허들링에 잘 참여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생겼어요.


나중에 깨닫게 된 건데 저는 모임에 사람이 많으면 어울리는 게 별로 안 내키는 사람이더라고요. 조용히 있고 싶고요. 소규모로 모이면 이야기를 잘 하고요. 처음엔 제가 그런 성향인 걸 잘 모르고 혼자 조용히만 있었어요. 친해진 사람도 없었고요. 친한 사람 없이 진짜 오래 참여했죠. 일정이 공지 되면 갈 수 있으면 가고, 안 맞으면 안 가고. 친한 사람이 없다고 모임에 나오는 게 힘들거나 그러진 않았거요. 친한 사람이 있으면 더 편하긴 하겠다고 생각했죠.


자조모임의 좋은 점은 알고 있으니까 참여의 의의를 두는 거 같아요. 서로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고, 제가 알려줄 수도 있고요. 그럴 땐 좀 뿌듯하기도 하고요. 제가 자립한지 꽤 됐고, 대학생이 받을 수 있는 장학금도 잘 알고 있으니까 활동하는 친구들에게 알려주기도 하고. 제가 어떤 부분 참여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2023 허들링 커뮤니티 제주도 캠프에서>
Q5. 허들링에 참여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나요? 어떤 점이 좋았나요?

아쉬운 점은 잘 모르겠고요. 소규모로 활동하는 게 친해지기는 더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자조 모임 사업에 참여했었는데 거기선 맨 처음에 서약서를 썼어요. 그래도 저희가 성인인데 의아했던 게 술을 먹지 말아라, 이성과 관계된 성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같은 게 적혀 있었거든요. 그건 개인 사생활 영역이고, 서약을 한다는 건 강요이고 제 생활이 그럴 거라는 의심을 전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불쾌했어요.


프로젝트를 하는 지원사업도 했었는데 성과물로 내놓기 좋은 것 중심으로 방향을 설정하는 것들도 있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하는 것도 있는데요. 허들링 커뮤니티는 자율적이고 성장과 변화를 기다려주는 과정이 있어서 좋아요. 소이프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의 성격이 있는 단체인 거 같아서 좋은 거 같아요. 

Q6. 소연은 낯을 가리는 것도 같고, 거리를 두는 것도 같아요. 누군가와 친해지는 게 싫고 그런 건 아니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게 부담이 되나요?

친해지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많이 가까워지는 건 조금 부담돼요. 많이 가까워지면 신경 쓸 게 많아지니까, 제가 모른척하게 된 것도 있어요. 저는 상대방에게 다 맞춰주려는 그런 성향이 있었어요. 내가 사람들에게 맞춰야지. 그런데 사람은 다 다르니까 상대방에게 맞추려면 한도 끝도 없잖아요. 이게 피곤하니까 눈치나 뉘앙스는 다 제거해버리고, 말 그대로만 해석해야지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직접 말하는 게 아니면 의미를 두지 않고요. 상대방의 말만 해석하기 시작한 거예요. 말하는 그대로만 생각하자.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생각하지 말자. 그때의 말과 그때의 행동만 생각하자.

Q7. 어릴 때 친구를 사귀는 건 어렵지 않았나요?  
중학교 2학년 때인데 저는 제가 시설에 산다는 게 딱히 부끄럽지는 않았거든요. 저 포함 같이 다니는 친구가 3명이었는데, 친구 둘한테 시설에 산다고 말했어요. 시설에도 초대해서 친구들이 놀러왔고요. 시설을 다녀간 후로 걔네들이 자기들끼리만 다니는 거예요. 2때 친구들이랑은 그렇게 멀어지고, 3학년 때는 다른 애랑 친해졌어요. 그 친구는 제가 시설에서 사는 걸 알고도 저랑 계속 친하게 지냈어요. 근데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많이 못 만났고, 졸업하고 나서 2년에 한 번씩은 만나요.

고등학교 때는 친구가 없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헤어져서 좀 우울한 시기였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니까 한 반에 30명 정도 있더라고요. 사람이 많았어요.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기분도 좋지 않을 때고 제가 먼저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고 그냥 혼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친구가 안 생기죠. 누가 말을 걸면, 단답형으로 ‘그래’, ‘아니’ 대답하고 계속 잤어요.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는데, 사람이 달라지지도 않으니까 새로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교 초반을 왜 망쳐서 3년 동안 친구 없이 살았나 생각해요. 웃기죠. 사실 이렇게 친구 없이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다른 애들이 많이 친해진 후라서 다가가기도 어려웠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상담실에 가서 친구가 없는 걸 상담했더니 저희 담임 선생님께 그 말을 전한 거예요. 담임 선생님이 반 아이들한테 또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소연이한테 좀 잘해주라고. 타인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친구 없다는 걸 인정해버리게 된 거예요. 그때 약간 상담에 대한 불신이 싹터서 상담을 뒤늦게 받게 된 거 같아요. 지금은 매주 상담 받고, 오늘도 상담하러 가요.

  
  
Q8.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한 상담선생님 때문에 대한 불신이 있었는데, 다시 상담을 받아야 겠다고 마음을 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졸업한 대학교가 심리상담 분야가 유명해요. 학교 다닐 때 선배들이 학교에서 본전 뽑으려면 심리상담도 받고, 풀베터리 검사(종합심리검사)도 다 받으라고 말해줬어요. 저는 전공을 바꾸고 난 후인 2020년부터 받기 시작했는데요. 집단 상담도 받고, 개인 상담도 받았어요. 의생명과학을 전공하면서 공부도 어렵고 성적이 잘 안 나오니까 나는 왜 또 다른 전공을 시작해서 성적이 이따위일까’, ‘더 이상 안 될 거 같다, 왜 또 새로운 걸 해서, 또 왜 이런 거냐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졸업을 하고 나니 상담을 받으려면 돈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못하고 있다가 국가에서 하는 청년마음건강지원사업도 지원해서 상담 받고, 다른 재단에서 지원하는 사업도 신청해서 하고요.

상담을 받을수록 더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상담을 하면서 제가 가진 것들 중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있는데 관점을 바꿔서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시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에게 사회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기질이 원래 그렇구나, 난 원래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이었구나 이런 식으로 관점을 좀 바꿔서 생각하니 또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꿀 수도 있더라고요. 

Q9.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어쩌다가 하게 된 건가요?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자조모임을 할 때 보면 자립준비청년들은 약간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야 되나. 어떤 상황에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행동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부모님이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부모님에게 배우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되는 것들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경험이 많지 않다보니까 잘 모르는 게 많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심리 검사를 하면서 최근에 기질 검사를 받았는데요. ‘사회적 민감성’을 측정하는 게 있거든요. 그게 1.4점 나왔어요. 100점 만점이 1.4점. 이 정도 점수면 남의 말 안 듣는 거래요. 기질이라는 게 유전이잖아요. 유전의 경향이 강한 게 기질이잖아요. 제 부모님도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그런 학습을 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나마 시설에서 자라면서 학습한 게 아닐까. 기질은 이렇지만 조금씩 사회화가 된 게 아닐까요.

Q10. 소연이 진로를 정할 때 영향을 받은 건 무엇인가요?

예전에 오은영 박사님이 진행하던 TV 프로그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고 영향을 받았어요. 저는 특성화고에 진핵해서 유아교육을 공부했거든요. 아동보육시설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는 뭔가 부조리하고, 부당한 지점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 문제 의식도 생겼고요. 그렇다면 내가 관련된 공부를 하고, 관련된 일도 해보면서 그 지점을 바꿔봐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첫 번째 전공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결국 나중에는 저랑 안 맞다는 걸 알고 포기했지만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하셨던 오은영 박사님은 의사잖아요. 의사도 아이들에게 변화를 주는 일을 할 수 있는데, 의사는 어떨까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죠. 정말 하고 싶은 마음보다 의사가 되면 신분 상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중학교 때부터 대학에 가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했어요.


처음했던 전공은 ‘아동가족학’이었어요. 2013학번으로 3학년 2학기까지 공부했어요. 뒤늦게 나랑 안 맞다는 걸 안 거죠. 성적도 뚝뚝 떨어지고. 특성화고를 다닐 때 유아교육을 전공했으니, 전공을 살려서 대학에 갔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수업을 듣는데 한 번쯤 다 들어봤던 거고,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알았던 것들이 들리면 그냥 넘겨버리고, 시험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 반복이 계속되다가 3학년 때는 결국 ‘F’ 학점을 받은 거예요. 이래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아동복지’를 해보고 싶어서 특성화고에 진학하고 유아교육을 선택했는데, 실습을 몇 번 해보고 ‘나는 애들이랑 안 맞다’를 안 거죠. 제가 정말 쌉 T형 인간이라서 그런지 교감이 전혀 안 되는 거예요. 학교에서 가베라는 교구로 지도하는 자격증을 취득하고 동아리로 실제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했어요. 아이들이 개구리를 만들었다고 저한테 가져오면, 이게 왜 개구리냐고 할 수 없으니까. 영혼 없이 “그렇구나”라고 대답하고. 이게 서로한테 정말 고통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어렵겠다 싶어서 ‘아동 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그래서 ‘아동가족학’을 선택한 건데 재미도 없고, 성적도 잘 안 나오고 했지만 3학년까지 버틴 게 좀 아깝긴 해서 그만두는 건 고민이 좀 되긴 했죠.


일단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인터넷 강의도 하고, 실제 강의도 하고 영재고 입시 관련 사업을 하는 교육 스타트업 회사였어요. 강사 월급도 보내고, 세무처리도 돕고, 비품도 구매하고, 택배 발생도 하고, 교재 제작 의뢰도 하고 온갖 잡다한 일을 해냈는데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계속 생각했어요. 길게 보면 100세 인생인데 아직 나는 젊다. 남은 80년 인생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일을 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낸 거죠.

<태국 여행에서>
Q11. 그럼 다음 진로인 의생명학과는 어떻게 결정하게 되었나요? 새로운 전공은 잘 맞았나요?  
'아동가족학'을 포기하고, 일단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해야 된다. 가능성 있는 것만 생각하지 말자라고 결론을 내렸죠. 가능성 있는 거라면 전공을 살려서 아동 심리아동에 관련 교구를 기획하거나 디자인하는 것이었을 거예요. 공부한 전공을 살리려면, 제일 빠른 걸로 가자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인생이 80년이나 남았는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자.

아동가족학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것들을 제쳐두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면서 ‘내가 무엇에 흥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동가족학을 전공하면서 ‘아동’이랑 ‘심리’ 관련 과목을 들었는데요. 심리학 개론을 공부할 때 ‘뇌’ 공부를 했던 걸 떠올렸어요. ‘뇌’와 관련된 것을 찾아봤더니 그때 막 뜨고 있는 분야라는 거예요. 막 뜨고 있는 거면 진입 장벽이 낮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명과학’에 도달했어요. ‘의생명과학과’로 전과를 하려고 했는데 3학년 1학기까지만 가능하더라고요. 저는 3학년 2학기까지 공부를 했기 때문에, 리셋을 해야했어요. 그래서 2013학번은 그대로 유지하고, 2018학년도에 다시 1학년부터 시작한 거예요.


의생명학과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아닌 부분도 있었는데 사실 이과 쪽이라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이과는 다들 기초 과목은 실험을 하고 매주 레포트를 내야돼요. 실험에 대한 내용을 쓰고, ‘이 실험 결과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같은 내용을 고찰해 써서 내야 돼요. 뭔가 저는 좀 완벽하고 싶었다고 해야 되나. 맨 처음에 조교님이 이런 고찰이 잘 쓴 거라고 알려주셨는데 그런 식으로 쓰고 싶은 거예요. 근데 저는 전공이 완전히 달랐고 이과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하나도 없으니까 실험을 해도 책을 일일이 찾아서 해야 되는 거예요. 사실 출처를 다 밝힐 필요는 없는데, 다 참고 문헌을 참고해서 쓰려고 하니까 매주 해내기는 무리가 있었던 거죠. 일주일에 3과목이나 이렇게 해야했거든요. 일주일에 3개를 그런 식으로 레포트를 쓰려니까. 쉽지 않았죠. 어느 순간 던져버리게 되었는데 그래도 F학점이 나오진 않았어요.


하하. 그나마 재미는 있었던 것 같아요. 제일 성적이 잘 나왔던 게 ‘종양생물학’이었거든요. 근데 또 이게 4학년 1학기인가에 수강한 과목이거든요. 그때가 되서야 공부하는 법을 알았던 거예요. 이해를 하고 나야 그 다음에 질문이 생기는 거니까, 그런 과정을 거쳐야 공부가 잘 되는 건데 4학년 때 깨닫게 된 거예요. 그전까지는 다 그냥 하라는 대로만 했고요. 겨우 B학점, C학점 나오다가 4학년 때 성적이 잘 나오니 재미있었죠.

Q12. 성적이 소연에게는 굉장이 중요한 거였나봐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성적도 어쨌든 정량적이고, 저평가를 받은 거잖아요. ‘나는 왜 안 되는 걸까’ 계속 생각한 거죠.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어요. 처음부터 이과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고, 대충이라도 과제를 해서 제출하면 됐는데, 그랬다면 성적이 엉망진창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스스로가 설득이 돼야 과제를 낼 수 있었던 사람인 거죠. 대충 내도 된다는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이니까.


교양 과목도 그랬거든요. 철학과목이었는데요. 마감 날까지 붙잡고 했는데. 정해진 마감일의 23시 59분까지는 과제를 제출했어야 하는데, 시간을 넘기고 0시 10분에 교수님께 과제 제출 메일을 보냈어요. 교수님께서 “시간을 넘겨 제출하지 말아라. 앞으로는 시간을 맞춰서 내라. 늦으면 강점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앞으로 과제를 낼 때는 70%만 마무리 돼도 마감 날짜에 맞춰서 내면 된다고 생각하라고 하셨는데도 제 행동이 안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수님 말도 안 듣는 거죠. 계속 그러다가 교수님께서 넌 늦게 제출했으니까 안 받는다고 하면 성적이 0이잖아요. 졸업할 때까지 그래놓고, 졸업할 때 대학원 가고 싶다고 했던 거예요.  

Q13. 특별히 의생명과학에서도 특히 뇌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요?
심리학개론을 들었는데 부분이 있어요. 행동이나 감정 이런 건 추상적인 것 같은데 뇌라는 건 약간 좀 유물론적인 거니까, 정확한 거니까 관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흐리멍텅하거나 추상적으로 얘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심리학은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건 줄 알았는데 유물론적으로 접근하자면 약이라든지 물리적으로 뇌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거니까 그게 되게 신기해서 관심이 생겼었어요.

뇌과학의 다른 분야들로는 브로카 영역, 베르니케 영역 등 특정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한다든지에 대해서도 연구하고요. 감각 처리라든지 학습하는 것 같은 일반적인 것들이나 정신질환과 같은 임상 분야에서도 뇌과학을 다루기도 해요. 제가 관심 있었던 분야는 사회심리학이었는데 사회적인 상황에서 뭔가 결정을 할 때 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가 된다거나 이런 걸 연구하는 분야였어요. 사회심리학을 보면 사회심리랑 뇌를 접목해서 분석하는 게 있는데, 그런 게 재미있어요. 예를 들어 게임 이론을 보면 어떤 게임에서 협력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결정을 할 때 어떤 영역이 활성화된다 이런 것들이요.

<한국콜마에서 지원한 디자인아카데미를 수료한 소연, 소이프 고대현 대표님과 함께>
Q14. 소연은 작년에 소이프와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여성자립준비청년 <마음둘꽃> 캠페인에 활동가로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캠페인 막바지에 보호청소년들 자립 교육을 했잖아요. 처음 만난 고등학생들한테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마음둘꽃 캠페이너를 하게 된 건 자조모임이 좋다는 것까지 알았는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자립하는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고, 애들이 상담을 받으러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상담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 많다는 걸 느껴서 캠페인에서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제가 생각하던 거랑은 많이 달라졌었는데 나쁘진 않았어요.


청소년들 교육을 하러갔을 때는 노력을 많이 했죠. 청소년들이었으니까요. 저도 엄청 마음을 막 열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쉽진 않았죠. 어쨌든 저는 가르쳐주겠다고 온 입장이었잖아요. 입장 차이와 역할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허들링에서는 전 참여자니까 조용히 있다가 가야지 이런 생각이었고, 보호청소년을 교육하러 간 현장에서는 제가 직접 알려줘야 되니까. 더 친해져야 잘 알려줄 수가 있으니까, 이 청소년들이 내 말을 듣게 하려면 공감대 형성을 해야 된다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Q15. 한국콜마에서 지원한 디자인 아카데미에도 참여했는데요. 디자인을 해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나요? 처음 제작해봤다는 이모티콘도 소연이랑 닮아서 재미있더라고요. 과정은 어땠나요?
원래는 대학원을 준비했었는데 작년에 영어 성적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포기하게 되면서, 작년에는 특히 다양한 경험을 해야겠다 생각했는데요. 카이스트 행정직 근무에 원서도 넣고, 팻시터 교육도 받고, 알바도 하고, 굿즈를 제작하는 소모임 같은 것도 했었어요.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서 키링이랑 스티커랑 만들었었는데 나쁘지 않더고요. 디자인 아카데미에 관해서는 간단한 걸 만들어서 티셔츠에 와펜을 달아본다거나 기존에 있던 상품에 내 디자인을 조금 넣어보는 걸로 이해했었거든요. 그런데 참여한 다른 친구들이 신기한 무언가를 하겠다고 가져오는 거예요. 그때 살짝 멘탈이 나가면서 이것저것 아이디에이션은 했는데, 다 안 되는 것들이어서 빵 터져버렸어요. 제가 남 앞에서 울 줄 몰랐는데 갑자기 울어버렸어요.

답답한 마음이 계속됐는데, 다른 아이디어들도 자꾸 거절되고.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다가, 캐릭터를 일단 한 번 짜고 그 다음에 뭐 할지를 생각해 보자라고 방향을 틀었어요. 캐릭터를 고민하는 게 더 쉬우니까 그래서 만든 게 부엉이 캐릭터였어요. 재밌었어요. 생각도 못 했는데 저랑 비슷하게 생겼다는 거예요. 맨 처음엔 낙서로 시작한 거거든요. 또 저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니까 뭐 나름 생각보다는 제가 귀엽게 생겼구나 하기도 했죠.


이모티콘 제출 심사에는 떨어졌어요. 수정이 필요한 디테일들을 많이 놓치고 그대로 제안했어요. 약간 임팩트가 부족했겠죠. 26개인가 만들면서 제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기도 했어요. 이모티콘 내용이 처음엔 “왜?” “뭐야?” “어쩌라는 거야” 대부분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디자인 아카데미에서도 긍정적인 표현을 너무 없으니 넣으면 좋겠다고 평가를 해주셨어요.


각자 만들고 싶은 걸 하는 거니까 피드백도 서로 해주고, 근데 또 열심히 피드백을 해주니까 그 과정들이 참 좋았어요. 그러니까 서로 비교를 하려면 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비교하지 않고 서로 피드백을 해주니까 좀 더 발전할 수 있었어요.

<소연이 디자인아카데미에서 개발한 이모티콘>
Q16. 소연은 요즘 어떤 일상을 보내나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요즘 테니스를 즐겨치고 있고요.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요.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돼서 좋아요. 혼자 코인 노래방 가고요. 스트레스 받으면 그냥 자요. 스트레스 받는 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는데요. 그때 받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함께 하는 일인데 해야 될 일을 안 하는 사람들과 해야 할 때. 대부분 사소한 것들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카카오톡 투표를 안 할 때? 하라고 해도 말 안 듣는 사람들. 그런 걸로 화내는 것도 진짜 되게 쪼잔한 것 같고, ‘아 내가 왜 이런 짜치는 것 갖고 화나서 말도 못하지? 차라리 큰 일이면 진짜 화를 낼 수 있을 텐데.’ 생각했어요.


아름다운재단에서 후배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멘토처럼 활동하는 길잡이도 하고, 서대문구청에서도 후배 자립준비청년들 멘토링을 하기도 하는데요. 사람들과 교류하는 건 좋은 거 같아요. 그래도 또 엄청 친해지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저만의 속도가 있는 거죠. 급진적인 건 불편해요. 모임이나 지원사업에 참여하면 1년에 한 명 정도 친해지는 것 같아요. 갑자기 다가와서 진짜 엄청 막 공감해주려고 하는 거 불편하고, 극단적인 것도 싫어하고요.


손으로 하는 작업도 좋아해요. 생각을 멈출 수 있는 거,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되고 집중해서 할 수 있는 거. 그래서 소이프 제품 포장 아르바이트도 좋아해요. 평화롭고, 말이 필요 없고, 내 할 일만 빨리 하면 되고요.

Q17.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어쨌든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해야 하면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자립체험주택에서 자립 체험을 하는 친구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보호시설 청소년, 자립준비청년이 독립하기 전에 6주부터 3개월까지 생활하면서 혼자사는 생활을 체험해 보는 거예요. 여기 있는 애들도 어쨌든 뭐 편하긴 하지만 편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그런 느낌. 그러니까 편하다고 해서 내버려 두면 그거는 그냥 방임이고, 얘네들을 좀 그래도 관찰을 하고 관심을 가져야 되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는 이제 조금 좀 에너지가 드는 거죠. 근데 그것도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은 딱히 상관없어요. 학교를 안 가거나 집을 안 치우는 이런 애들이면 좀 에너지가 많이 들어요. ‘왜 그럴까’, ‘이 아이의 무의식 속 무엇이, 도대체 어떤 요인이 이렇게 만들었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이런 생각을 계속 하는 게 제게 도움이 안 된 게 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됐는데요.

이런 생각도 뭔가 ‘방어 기제’였던 거예요. 너무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선후 관계를 찾아서 생각하는 게요. 그냥 그걸 느끼고 인정하면 되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슬픈 건 왜일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논리를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접근하는 게 방어 기제 중 하나리고 상담사님이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심리적인 불편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지금 느끼는 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조금씩 노력하고 있죠. 이제는 ‘왜’를 먼저 생각하기보다도 내가 이것 때문에 이렇게 느꼈구나, 이런 일이 있을 이렇게 느꼈구나, 나는 이런 걸 불편해하는구나. 케이스를 계속 쌓아가면서 알아가는 거예요. 나는 이게 싫고, 이게 좋다.

‘왜’를 생각했던 건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왜 그럴까, 나는 왜 이런 걸 이렇게 느낄까, 나만 이상한 것 같은 생각. 나는 왜 이걸 이해 못할까. 슬픈 감정이 들면 나는 왜 슬플까. 뭐가 슬펐을까, 약간 어떤 포인트인지 잘 모르는 거예요. 나는 왜 이게 불편할까 다른 사람은 괜찮은 거 같은데. 근데 바꿔서 나는 이런 게 불편하구나를 계속 알아가는 게 커다란 돌덩어리를 세부적으로 조각해 나가는 것 같기도 해요. 상담사님이 내가 느끼는 걸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왜 그럴까를 생각하는 게 더 도움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Q18. 그럼 어떤 게 불편하고 어떤 게 편한가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각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이. 친하고 저를 잘 알면 별 말을 안 하고 그냥 각자 할 일 하고 있어도 어떤 불편함도 없어요. 그런데 어색한 사이라면 말을 걸어야 될 것만 같고, 조용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죠. 아무말도 안 하면 난 너한테 관심이 없고 무관심하다, 궁금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걸로 보일 것 같아서 질문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어요. 상담할 때 이 부분도 얘기를 했는데 말을 안 하면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말을 안 하면 제가 공격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었거든요.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한다. 그냥 있어도 된다고 하셔서 그 뒤로부터는 내가 굳이 말 걸려고 안 하는 것 같아요.

Q19. 서른, 소연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미래 계획도 조금씩 세우고 있는데요. 소연은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있나요?

일단 취업을 빨리하면 좋겠어요. 목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예요. 여기에 뇌과학 관련 부서가 있는데 꼭 입사하고 싶어요. ‘과학’ 분야로 찾으면 다른 곳도 많긴 한데요. 카이스트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학구적인 분위기가 좋았어요. 그래서 그런 성격의 기관으로 가고 싶어요. 1차 목표는 취업이고, 그 뒤에는 결혼을 하고 싶어요. 서른 넷 전에는 아이를 낳고 싶어요. 체력이 좀 있을 때. 아이를 낳으면 좋을 거 같아요. 아는 언니 부부의 자식을 보면 진짜 신기한 게 둘을 모두 닮았어요. 한 명만 닮은 것도 아니고 둘 다 닮은 게 신기해요. 그런 점도 좋은 것 같고, 자식을 기른다는 게 어디서 할 수 없는 경험 같기도 해요. 어떤 한 존재를 태어났을 때부터 키워낼 수 있다는 게 좋은 경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채원 치어빌더님과 같은 조가 되어 활동했던 제주도 캠프 >
<치어빌더와 함께한 허들링 랄랄라 운동회>
Q20. 소연에게는 좋은 어른이 있었나요? 좋은 어른이라고 느꼈다면 어떤점 때문이었나요? 불현한 어른은 어떤 어른이었나요? 

처음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한 분은 제가 살던 시설에서 만났던 선생님이요. 지금도 시설에 계신데 이제는 은퇴를 앞두고 계세요. 엄청 다정한 분은 아니신데 츤데레세요. 시설에서 퇴소하고 난 후에 많이 챙겨주시고 신경을 써 주시니까요. 생활지도원은 아니시고 자립전담요원이시거든요. 계속 신경을 써주시는 게 참 대단한 것 같아요. 해가 갈수록 퇴소한 애들은 축적되니까 사람이 계속 많아지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신경을 써주시니까 되게 감사해요. 장학금, 지원사업, 허들링도 그 선생님이 공유해주셨거든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그런 분들이 참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좋은 어른이라고 느껴져요. 자기 살기도 바쁜 시대인데 타인에게 관심 갖고 계속 기억하고 관심 갖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거든요. 제 기준에서는 되에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라. 지속하는 노력들이 존경스러워요.


불편한 어른은 사실 잘 떠오르지 않는데, 그게 불편한 어른을 만나지 못해봐서가 아니라 불편하다 싶으면 안 만나서 그런 것 같아요. ‘불편하다’ 그럼 ‘만나지 말자’가 되는 거죠. 원인을 제거하는 거예요. 어떤 어른이 저를 불편하게 했다고 하면 그 어른한테 그걸 말한다고 바뀔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제 나이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그렇게 살았을 사람이니 자기 행동이나 말을 고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점점 멀어졌던 거 같아요.

Q21. 그럼 소연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

편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제든지 와서 뭔가 물어볼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려면 편안한 어른이 되어야겠죠.

Q22. 소연, 자신을 한단어로 말한다면요?

온건파요. 저는 평화롭고 잔잔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 마음을 떠올리니 온건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이야기 기록한 이. 유랑流浪
이야기 나눠준 이. 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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