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라는 말도, 새롭다는 말도 왠지 다 싫습니다.

𓅪
일월의 독자님들께,

진부한 끝과 새로운 시작에 매달려 글을 씁니다. 우리의 일상을 가로지르는 숫자가 하나둘 바뀝니다. 나는 이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시끄럽습니다. 올해 연말은 유독 북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렵지만 다들 모이고, 가려졌지만 다들 웃고, 망할 것 같지만 더 나아질 내년을 기약하면서 오늘을 축복하는 듯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무엇을 거두고 거두지 못했나를 재어보고, 정산하고 보고하며, 숫자들을 정리하고 결과를 나열합니다. 내가 보는 화면의 모두가 그 일을 하느라 골몰하는 것처럼 바쁩니다. 그리고 다들 정말 멋집니다. 기이할 정도로 모두가 다른 일들을 이마만큼이나 해냈고, 결과도 목표도 뚜렷합니다. 와중에 멋진 일상을 보내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과 축하하고 위로하고 독려하며 나아가는 듯합니다.

내게도 물론 그런 순간이 있었겠고, 더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재고 따져보며 언제 무엇을 했는지 정리하지도 않았고, 유난히 하루를 더 챙기거나 살뜰히 살지도 않았습니다. 팽팽히 조여오던 시간의 끈이 탁-하고 풀린 듯 ... 탁-하고... 탁... 탁... 탁...

그렇게 풀린 채로 몇 날 며칠을 지새웠습니다. 엄마 숙희는 나를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걱정이었겠지만 왜인지 눈물이 났습니다. 밥을 먹기도, 책을 읽기도, 글을 쓰기도 싫은 날들이 내 마지막을 채웁니다. 안타깝고 기이하면서 걱정이 됐습니다. 왜냐면 아직 편지를 쓰지 못했는데, 써야 하는데, 이런 낡은 마음으로 어떤 새로움을 말할 수 있겠어요. 거짓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은 마음으로 빈 화면을 바라본 채 몇 시간이 지납니다.

2021년 12월 31일 23시 01분, 
시간의 끝을 붙잡고 양해를 구합니다. 남들 다 하는 잘난 척 괜찮은 척 바쁜 척 못 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어디 맨날 좋나요, 이런 날도 수두룩하고 당신들께 내비치는 것은 오로지 작은 파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파편을 죄다 모아 붙여도 내 일부보다 작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이제는 정말 써야 하는데, 나를 써야 하는데, 진짜 나는 파편보다도 못한데, 당신들께 어떻게 오독될지 몰라서, 아니 읽히지 않을지도 몰라서 두렵습니다. 써야 하는 글이 무진장 많은데도 가만히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렇게 겁이 많은 내가 앞뒤 재지 않고 어찌저찌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의 처음과 중간과 지금까지 - 모두 지켜봐 주고 각자의 모양새로 함께해준 덕분임을 절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위로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은 말을 모두 달아나게 합니다. 제 연약함이 새로운 토닥임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쓰는 일만큼 읽는 일 역시 엄청난 노동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간과 마음과 몸과 돈이 모두 들어가는 일이니까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아무리 아쉽다고 지금을 축하하고 과거를 돌이키며 붙잡으려고 해도 시간은 바뀌고 새로운 숫자가 와버리니까요. 그런 시간이라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읽는 마음, 기꺼이 제게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축의 필수 전제는 파괴입니다. 땅을 갈고, 건물을 헐어야만 새로운 건축을 할 수 있으니까요. 토지의 운명이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게 늘 잔인하고 우습게 여겨집니다. 무언가가 토막 났기에 지어질 수 있던 우리들의 집도 언젠간 부서질 테고, 그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운명들이 들어서겠지요. 그것을 슬퍼하거나 아쉬워만 한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분갈이를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흙은 3년이면 생명이 다하기 때문에 꼭 흙을 갈아줘야 식물이 훌륭하게 자라날 수 있다고 합니다. 3년 전 제게 들어온 양분의 흙이 제 몫을 다한 것 같습니다. 연약하고 차분하게, 분갈이를 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합니다. 당신들이 키워낸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온갖 날씨가 되어주세요. 비가 오는 날도 참 좋지 않던가요.

이 편지는 우리가 같은 시간 속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도록 간직하겠습니다.

나의 증인,
건강하세요.


2021년 12월 31일 
당신의 나무, 
참새 드림


(c)Duan Michaels, This photograph is my proof, 1974
"이 사진은 나의 증거다. 어느 날 오후였고, 우리 사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좋았다. 그녀가 나를 껴안았고, 우리는 행복했다. 이건 있었던 일이다. 그녀는 날 사랑했다. 이 사진을 보라."
사진은 영원한 과거입니다. 순간의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니었던 게 될 수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지우고 싶은 얼굴을 떠올리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

/음성의 일부를 공유하실 때는 출처를 밝혀주시거나, 인스타그램 계정 @bakchamase 태그해주세요.

박참새
bakchamsae@gmail.com
후원계좌 : 하나은행 82491020651107 박상미 (모이 moi)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