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 - 봄에 우리는 🌱🚶‍♀️🙏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 


“추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하루 사이에 “낮에는 더울까?” 고민하며 옷을 고르려니 머쓱하지만, 기분은 좋은 봄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계신 곳에 따라 ‘아직’ 봄을 맞이하지 못한 분도 계실 테고,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 거주하시는 분도 계실 테지만, 마음에 저마다의 봄을 품고 사셨으면 해요. 오브 2호에는 계절에 맞는 편지를 담아봤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편지를 보내온 박정은 수녀는 슬픈 풍경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임혜진과 오수경 에디터는 봄에 어울리는 책과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

 박정은의 계절 ㅡ 아름다운 분노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저는 인도네시아의 한 섬에 사는 청년들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자카르타에 도착해 이틀을 쉬고, 다시 국내선을 세 번 갈아타고서야 플로레스 섬 한가운데 바자와(Bajawa)에 닿았습니다. 청년들은 자기들의 말만 하고, 나는 영어만 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수업을 잊고 그대로 흐름에 맡겨 보기로 했습니다. 옆에서 영어가 되는 청년이 해주는 듬성듬성한 통역을 들으면서요.

 

그런데 땅 이야기가 나오자, 온순하던 청년들이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빼앗긴 부족의 땅을 되찾으며,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문학과 글쓰기, 예술을 가르치는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춤을 추고, 빼앗긴 땅을 폭행당하는 여성으로 표현하며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문득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현장 학습 때, 내 옆에 앉아 구글 번역기를 돌리며 대화를 나누던 예쁘장한 어린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자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적었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민감한 이야기를 번역기에 대고 무어라 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이 계속되는 수탈의 시대에 인도네시아는 어떤 곳인가, 그리고 이곳의 여성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길에 신들의 섬이라는 발리에 들러 이틀을 지냈습니다. 신이, 자연이, 그리고 사람이 계속 식민화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지상낙원이라는 발리가 너무 낯설고 슬퍼서, 발리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부유한 휴양촌 동네에 오니 번지르르한 비슈누 상과 가루다(비슈누를 실어 나르는 충실한 새) 외에, 유명한 호텔 사이로 멋진 '퍼시피카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건물은 식민지 시대에 동인도 제도의 여성이 타자화된 공간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벌거벗은 여성의 얼굴, 몸, 치부까지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타자의 시선에 갇혀버린 이곳 여성들의 몸이 느껴져 불편해졌습니다. 그곳에는 고갱의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었고, 팔루스를 상징하는 나무 기둥에 그리스도를 새겨 넣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긴 식민의 역사를 지나온 지금의 발리는 여전히 하루 종일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유순합니다. 나 같은 외국인은 싼 값에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지상의 낙원으로 불리는 걸까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 깊이 동의하는 나는, 타자성이 만들어낸 짜증나는 아름다움과 인스타그램이 만들어낸 유사물(resemblance) — 그럴듯해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 에 지쳐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대신 한 주를 함께 보낸 젊은 여성들의 눈빛과 음성을 기억하며 걷는데, 묵고 있는 숙소 옆 골목길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어요. 동남아시아의 골목길은 언제나 시와 같지요. 고요하고, 평화롭고, 배타적이지 않은 위엄이 있어요. 만나는 사람들은 기꺼이 집을 보여주는데, 자연스럽고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잘 가꾼 조그만 마당에는 신을 모신 신당이 있고, 푸르른 숲과 목조 주택, 그리고 기와가 아름다웠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섬들은,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내게 타자성에 대해 친절하게 들려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타자입니다. 이 타자성 속에서 우리는 관계 맺고 살아갑니다. 인종이나 경제력, 성별이 타자성을 만들어가는 요소이며, 거기에 어떤 이미지로 구성된 상상계가 작동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최상의 아름다움이고, 그 아름다움만이 우리의 무너진 인간성을 구원하리라는 조그만 확신을 배우고 갑니다.


그러면서 앞에 언급한 내가 만난 원주민 활동가 여성들의 분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싶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본 화가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들이 보고 싶어졌어요. 그는 화난 여자아이들을 계속해서 그리는데, 현실에 불만한 여성의 얼굴들을 저는 참 좋아해요.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원할 것이고, 그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것은 여성의 분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더 깊은 생각을 위한 질문]

〈제물을 바치는 세 명의 발리 소녀들〉, Theo Meier (파시피카 미술관)

〈쌀 창고〉, Miguel Covarrubias (파시피카 미술관)

  • 화려한 색채에 비해 여성들의 표정은 거의 없습니다. 가슴을 드러낸 채 서 있는 발리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 화가의 시선 — 그것은 피지배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시선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고유한 나의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통제하는 시스템 — 가부장제, 자본주의, 상업주의가 부추기는 이미지 — 을 통해 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Puffy〉, YOSHITOMO NARA 이미지 출처

  • 소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선택일까요, 누군가 말을 못 하게 막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눈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소녀 시절. 몸이 커지고, 여성이 되어가던 그 시절 —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세상 속을 활보했나요? 혹은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부자유했나요? 이 소녀의 불만스러운 얼굴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나요?
 임혜진의 계절 ㅡ 같이 읽는 기쁨 

최정은 작가의 《집을 나선 여자들》(옐로브릭 펴냄)을 출간하고, 지난 겨울에는 저자와 함께 하는 ‘찾아가는 북토크’를 통해 만난 작은 서점들의 이야기도 듣고, 그림책의 문장들을 온기 삼아 지냈습니다. 선생님은 동지부터 춘분까지, 석 달 동안 모두 16회, 매주 1-2회 독자들을 만나 그림책을 읽어주셨습니다. 


저도 편집자로 두 곳의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림책 덕후’ 독자들이 최정은 작가를 기다리는 이유가 뭘까요? 최정은 작가는 우리 내면에 파문을 던지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그림책들, 그리고 유독 잘 안 알려진 걸작 그림책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푸근한 중저음 목소리로 행간의 의미를 깨닫도록 부드럽게 이끌어주시지요. 요즘 다양한 북클럽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어 반가운데, 좋은 독서모임을 위한 조건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봄을 맞이하며 제 마음에 어떤 실마리를 던져 준 두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북유럽의 셀키 설화를 모티브로 한 바다표범 엄마를 둔 소년의 이야기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 그림, 풀빛 펴냄), 미하엘 엔데의 영혼에 대한 아름다운 우화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미하엘 엔데 지음, 프리드리히 헤헬만 그림, 비룡소 펴냄)입니다.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기, 상처와 상실, 외로움을 기꺼이 받아안고 길들이며 끝까지 나아가는 삶에 대해, 한 편의 시와도 같은 이 이야기들을 같이 읽고 독자님은 어떻게 읽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오수경의 계절 ㅡ 몽글몽글한가요? 

알레르기 체질이라 봄은 간질간질하게 찾아옵니다. 얼굴이 당기고, 여기저기 가려움증이 돋고, 급성 콧물과 재채기가 쏟아지면 '아, 봄이구나.' 합니다. 봄은 또 몽글몽글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버석했던 마음이 봄빛으로 물들며 연애를 탐구하던 시기이기도 했죠. (과거형입니다…) 간질간질하고 몽글몽글한 이 봄에, 조금 특별한 연애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내 마음이 몽글몽글 — 몽글상담소〉(SBS)는 연애를 원하지만 기회가 없었던 성인 발달장애 청년들의 연애 프로그램입니다. 다운증후군, 지적장애,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이 연애의 주인공이죠. 이효리·이상순 부부가 몽글몽글 상담소장을 맡아 정지원·오지현·유지훈 세 청년의 소개팅과 데이트를 돕습니다. 프로그램은 이들이 겪어온 어려움에 비중을 두기보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아직은 서툰 청년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해외에는 넷플릭스의 〈러브 온 더 스펙트럼〉이나 〈다운 포 러브〉처럼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요. 〈몽글상담소〉는 그 흐름 안에서 한국 사회에 처음 건네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연애 리얼리티를 수없이 봐왔지만, 그 안의 설렘과 서투름은 늘 비장애인의 몫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것은, 연애라는 감정이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지현 씨가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보며 외모를 체크하고, 해맑게 웃으며 걸어가는 장면이랑 지원 씨가 투스텝으로 소개팅 장소로 향하는 장면이 특히 좋더라고요. 봄을 찾아가는 발걸음 같았달까요. 

독자님의 봄은 어떤 느낌인가요? 몽글몽글함을 느끼고 싶은 분께 추천합니다.

《오브》에 두 번째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 <사려 깊은 수다> + <여성 영성 연구>를 아주 뜻깊게 읽었던 청년여성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오브의 첫 문을 박정은 수녀님이 열어주셔서 참 반가웠습니다. 책을 통해 받은 영감과 기운으로 지금도 청년여성들과 깊은 만남을 이어오고 있거든요. 멀리 부산에서도 오브의 발걸음에 마음 기울이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새겨 읽을게요. 고맙습니다. → 부산에서 온 마음이 짙게 느껴졌어요. 뜻깊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브》2호 어떻게 읽으셨나요? 답장을 남겨주신다면 소중하게 읽겠습니다. 📮

  • 발행 : 출판사 옐로브릭
  • 에디터 : 오수경·임혜진
  • 지난 편지 다시 보기 & 구독하기 (클릭)
  • 구독료는 무료입니다. 후원을 원하시는 분은 자율적으로 구독료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신한 110-411-407135 (옐로브릭 임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