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와 인터뷰를 해볼 수 있을까요?”
다소 무모하고 맹랑한 질문임에 분명했다. 사연인즉 이렇다. 2001년 나는 창간을 준비하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매호 하나의 주제로 여러 인물을 다루는 콘셉트였는데, 첫 호의 주제가 ‘수상한 여행가’로 정해졌다. 여행을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뭔가 유별난 성취를 이룬 인물을 찾던 중 무라카미 하루키가 거론됐다.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군에 빠지지 않고 이름이 오르내리는 세계적 소설가이자, 수많은 하루키스트를 양산해온 동시대의 아이콘. 그는 쉬지 않고 소설을 쓰는 틈틈이 에세이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높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행 에세이에 주목해보기로 했다. 소설가가 아닌 오로지 여행작가로서 하루키와 인터뷰를 시도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이런 순진무구한 발상과 함께 조금 들뜬 마음으로 한국에서 하루키의 작품을 관리하는 에이전시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아마 쉽지는 않을 거에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현지 에이전시에 연락은 해볼게요.”
인터뷰 요청에 에이전시 담당자는 제법 담담하게 답했다. 일단 거절은 아니었으니 일말의 희망을 품게 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잡지 창간호의 마감 일정은 빠듯하게 다가오던 중이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현지 에이전시에 직접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어로 작성한 서면 인터뷰 질문지를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이틀쯤 지나 현지 에이전시로부터 회신이 도착했다. 두근두근.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정해진 스케줄로 인해 당분간 인터뷰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평소 인터뷰를 잘 하지 않기로 유명한 하루키가 (공식적으로 그는 출판사를 제외하면 국내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없다) 이제 막 창간을 준비하는 신생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리라 기대한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예의상 ‘당분간’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기약 없는 단호한 거절임에 분명했다. 대신 하루키의 작품 속 문장과 사진을 인용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답이 왔다. 조금은 김이 샌 기분으로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를 분석하고, 인상적인 문장들을 발췌하고, 하루키의 여행 스타일에 관한 에세이를 수록하는 것으로 잡지 지면을 채워야 했다.
위스키를 주제로 에세이를 쓰기로 한 뒤, 얄궂게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내가 하루키 때문에 위스키에 심취하게 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 수없이 등장한 위스키는 은연중 나의 기억 어딘가에 잔상으로 남았고, 위스키를 알아가면서 하나씩 실체를 드러냈다. 하루키의 소설을 섭렵한 이라면 한 번쯤 커티삭이라는 이름의 위스키에 호기심이 동할 것이다. 초기작 『양을 쫓는 모험』부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 댄스 댄스』 『태엽감는 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까지 무려 6편의 소설에 반복해서 등장하니 말이다. 가장 궁금증을 증폭시킨 대목은 『1Q84』에 나온다.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커티삭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바텐더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게 시바스 리갈이나 까다로운 싱글몰트가 아닌 점은 마음에 들었다. 바에서 필요 이상으로 술의 종류에 집착하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성적으로 덤덤하다는 게 아오마메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1Q84』를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에 갈 일이 생긴 나는 문득 생각난 듯 바텐더에게 커티삭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설과 달리 현실에서 나는 까다로운 손님이 구는 것처럼 메뉴에도 없는 커티삭 하이볼을 주문했다. 처음 맛 본 커티삭 하이볼의 맛은 밍밍했고 어쩌면 좀 평범했다. 위스키 향을 살짝 가미한 탄산수의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도 그럴 것이 커티삭은 애시당초 가볍고 부드러운 맛을 추구하는 미국 시장을 겨냥한 스코틀랜드의 블렌디드 위스키였다. 상징과도 같은 녹색병을 감싼 노란 라벨의 돛단배는 본래 홍차를 싣고 나르던 커티삭이라는 이름의 범선이다. 기존에 독주라는 이미지가 유독 강했던 스카치 위스키는 커티삭과 함께 미국은 물론 영국 본토에서도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며 그야말로 돛 달린 듯이 팔려나갔다.
바에서 경험한 커티삭은 좀 실망스러웠지만, 훗날 진가를 알게 됐다. 일단 커티삭은 바보다 집에서 즐기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니트나 온더록보다 탄산수를 넣어 마시는 하이볼이 확실히 매력적이다. 근래에는 주류 상점뿐 아니라 편의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가격부터가 일단 부담스럽지 않다. 500ml 사이즈는 2만 원 이하로 구입할 수 있다. 평소 한두 병 정도 구비해 두었다가 갈증이 날 때면 하이볼을 만들어 마신다. 나만의 커티삭 하이볼 레시피는 이렇다. 얼음잔에 커티삭을 60ml 정도 따르고 탄산수와 함께 레몬을 듬뿍 짜 넣는다. 평소보다 2배 정도의 위스키에 레몬까지 가미되니 커티삭 특유의 산뜻한 풍미가 한층 도드라진다. 지인들과의 모임에서도 커티삭 하이볼은 꽤 요긴하다. 일단 평소 즐기던 하이볼과 비교해 맛이 진하고, 무엇보다 커티삭이 등장했던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씩 열거하면 왠지 모르게 품격이 상승하는 기분도 든다. 『1Q84』의 그 대목은 늘 그렇듯 아껴뒀다 마지막에 풀어놓는다.
하루키는 장편소설 중 가장 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에 작정이라도 한 듯 수많은 위스키를 출연시켰다. 시바스 리갈과 듀어스 같은 상징적인 블렌디드 위스키는 물론, 라프로익과 주라 같은 싱글몰트 위스키까지 상황에 맞춰 다양한 위스키가 등장한다. 실제 위스키 애호가이기도 한 그는 위스키를 주제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아일라 섬과 아일랜드를 여행하며 위스키 증류소를 탐방한 여정을 엮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현재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으로 개정)을 펴냈다. 나온 지 20년이 훌쩍 지난 이 단출한 여행서는 하루키스트뿐 아니라 위스키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읽어야 할 바이블이 됐다.
그나저나 만일 하루키와의 인터뷰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가끔은 이런 미련에 가까운 상상을 해볼 때가 있다. 여러 후보군이 머릿속을 맴도는데, 세상에 많고 많은 위스키 중 유독 커티삭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1Q84』에서 커티삭을 주문한 남자의 대사가 그 대답에 힌트를 제시하는 듯하다.
“옛날부터 라벨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마셨어요. 돛단배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싱겁지만, 어쩐지 그게 또 하루키답다고 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