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만쥬입니다. 벌써 흠터레터의 마감일이 다가왔네요. 처음 시작할 때는 2주에 한 번도 너무 뜨문뜨문인 거 아닌가 싶었는데 저를 과신했었나 봐요. 그중에서도 아이템 선정이 제일 어려운 건 초반에 기준을 너무 높게 선정했기 때문이겠죠. 그때 당시 입덕 진행 중이었던 콘텐츠에 대해 썼으니 이후에 뭘 써도 ‘그만큼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못 쓸 거 같아서 나름대로 기준을 정했습니다. 지난 2주간으로 기간을 정해서 그동안 보았던 것 중에 재밌었거나 맛있었거나, 하여간 좋았던 걸 고르면 훨씬 쉬울 거라고요. 다른 크루들은 어떤 기준으로 콘텐츠를 고르는지 궁금한데요, 기회가 되면 또 다른 편지로 전하겠습니다.
오늘의 흠터레터는?
죠리퐁의 출근송 /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OST
전사빠의 바다 건너 최애 / 봐선 안될 걸 보았다
박만쥬의 자랑합니다, 제가 한 건 아니지만. / 삼각창의 밖은 밤
윤만세의 완전진짜너무진심 / Made in heart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OST
투니버스 키드로서 제가 처음 외운 팝송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Baby One More Time>입니다. 애니메이션 영상에 가요나 팝을 씌워 만든 ‘투니버스 애니뮤직’란 코너에서 익혔어요. 전 세계를 강타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데뷔곡 틴팝과 울면서 복도를 달리거나 손을 잡고 얼굴을 붉히는 미형 커플의 합작에 한 초등학생은 매료됐습니다. 즐겨봤던 어린이 대상 애니메이션과는 주인공들의 연령대부터 달랐습니다. 본격적으로 고등학생의 연애를 다룬 것부터 제겐 신비로웠어요. 이 짧은 MV를 보기 위해 투니버스를 매번 틀어놨고 노래를 달달 외웠어요. 네, 오늘의 출근송은 투니버스(방영 명 : <그 남자 그 여자>)와 KBS(방영 명 : <비밀 일기>)에서 방영됐던, 애니메이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의 OST입니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은 완벽한 우등생을 연기하는 미야자와 유키노와 트라우마를 지닌 모범생 아리마 소이치로의 연애담이자 주변 인물들의 고민과 성장을 다룬 학원물입니다. 몇 년 전 카페에서 원작 만화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 읽으니 학교 안에서 시간과 관계의 흐름은 바깥과 다른 주파수인 게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몇 번의 시험과 방학으로 분기되는 학교의 시간은 단조로울 만치 매년 비슷합니다. 그에 비해 그 안에서 터지는 사건과 감정, 관계의 파고들은 얼마나 다채로운지요. 누군가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관계의 색채가 뒤바뀔 때면 숨이 차도록 모든 게 빨랐어요. 그 모든 게 고작 몇 주, 시험과 방학 사이라는 짧은 텀 안에서 벌어졌죠. 학기 초 친구와 학기 말 친구가 달랐던 경험, 여러분도 있으시죠? 만화책을 덮고 나서야 청소년기의 호르몬과 0교시부터 야자까지 부대끼느라 넘치게 주고받던 감정과 고민이 오랜만에 기억났습니다.
빠듯한 제작 예산 탓과 감독의 도전정신 덕에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에는 신선한 면모가 많았습니다. 두 주인공이 해가 질 무렵 같이 하교하는 장면을 볼까요. 대화 중 서로의 얼굴을 흘깃 훔쳐볼 때면 움직이는 동화 대신 만화책의 한 컷에 경음악이나 성우의 목소리가 깔립니다. 사랑에 빠진 인물의 렌즈로 들여다본 것처럼 그 장면이 무척 아름다웠어요. 신호등이 바뀌거나 철길의 건널목 경고등과 차단기 등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두 사람의 진전을 보여주는 섬세한 연출도 빼놓을 수 없죠. 두 사람의 관계가 안정되고 나선 초점을 주변으로 돌려 친구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조명했습니다. 가족, 우정, 진로, 고독, 자신다움 등. 지금의 제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네요. 사춘기란 말이 멀게만 느껴지면서 나이론 제가 사춘기란 게 낯설었던 그때.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으로 저는 문자 너머의 사춘기를 배웠습니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에선 작곡가 사기스 시로가 참여한 OST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한국 방송에서도 자주 틀어줘서 익숙하신 곡도 있을 거예요. 한 에피소드 안에서 러브 코미디와 심리극을 넘나들 수 있는 건 음악의 힘이 컸습니다. 투니버스에서 봤던 장면들은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연주곡이 소환하는 섬세한 감정선은 아릿하게 남아있습니다. 한때의 투니버스 키드들에게 이 음악을 부칩니다.
(사기스 시로는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시리즈에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의 OST 여러 곡을 재편곡해 삽입했습니다. 저작권 표시가 된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시리즈의 음원으로 대체합니다.)
봐선 안될 걸 보았다

지난겨울 크리스마스, 한 가정집 안에서 젊은 부부와 아기가 창문 옆 트리에 둘러앉아 마치 엽서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보다 그걸 알아챈 그들의 시선에 황급히 자리를 뜬 적 있습니다. 아, 연출했다는 표현이 다분히 관찰자 중심적이었네요. 관찰자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 분명합니다. 내가 관찰되는 상대보다 정보의 우위에 서는 은밀한 쾌감. 그래서 훔쳐본다는 표현이 있는 거겠죠. 분명 우리의 시선은 타인을 침해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가 침해한 것이 이웃의 평화로운 일상이 아닌 무언가 위험한 것, 봐선 안 될 것이었다면? 모르는 게 약이라고 덮어 둘 건가요? 아니면 호기로운 영화 주인공처럼 더 깊게 파고들 건가요?


히치콕의 <이창>은 매우 적극적인 관음의 영화이며, 관음으로 일어날 수 있는 서스펜스를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망원경을 통해 주인공과 시선을 나누고, 대놓고 훔쳐보는 재미를 어필합니다. 다만 살인사건까지 목격하게 돼 버리죠. 히치콕은 이런 미묘한 인간의 두려움이나 원초적 본능을 세심히 캐치해 제대로 표현해 내요.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영감을 주는 것이겠죠.


<우먼 인 윈도> 또한 이창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보는 티브이 속에선 <이창>이 방송되고 있죠. 공포증 때문에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주인공 또한 이웃집 창을 훔쳐보다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다만 주인공의 폐쇄적인 집 안으로 여러 용의자들이 드나듦으로 사적인 공간이 침해당하는, 그럼에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공포도 함께 표현됩니다. <이창>에서 주인공의 다리 깁스 같은 역할을 <우먼 인 윈도>에서는 주인공의 공포증이 대신하고 있죠.


<디스터비아>는 청소년기의 적극적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좀 더 속도 있고 경쾌한 흐름을 가진 영화가 되었습니다. 문제를 일으켜 발목에 감시 장치를 단 채로 가택 연금하고 있는 학생이 주인공으로, 그가 목격한 사건에 두 명의 친구도 합세하게 되죠. 연쇄 살인범과 청소년들의 대치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관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악의적으로 관찰하지도, 관찰되지도 않아야겠죠. 하지만 현재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지 않으므로, 그래서 이 영화들을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이창>은 왓챠, 또는 유튜브 영화, 네이버 시리즈온 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우먼 인 윈도>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디스터비아>는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삼각창의 밖은 밤

여기 브로맨스에 심취한 한 여자가 있습니다. 아, BL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여간 남자 둘이 엮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찍먹이라도 해봐야 마음이 편한 사람, 네. 저 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여성을 후죠시, 동인녀 등으로 불렀는데 요즘에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저라고 해서 매일같이 BL을 보고 있는 건 아닙니다. 토요일 밤에 만화를 몰아보는 정도이고, 영상은 거의 보지 않아요. 그런데 지난주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BL을 너무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가끔 이런 시기가 오는데 가끔이라 천만다행이에요. 매일 그랬다면 제 인생이 얼마나 더 엉망이었을지. 후후후.


그래서 보게 된 것이 <삼각창의 밖은 밤>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만화책이 원작인데요, BL과 헤테로 로맨스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하는 야마시타 토모코님의 작품입니다. 심리와 감정 묘사가 뛰어나서 믿고 보는 작가 중 한 명이지요. 이 작품을 만화책으로 3권까지만 읽은 후 잊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영화까지 제작되었더라고요. 그중에 저는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기로 했습니다. 1화를 눌렀을 때 분명 저녁 8시였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까지 참으며 완결을 보고 나니 12시였습니다. 애니메이션이 20분짜리 12부작이라 천만다행이었죠.


그만큼 푹 빠져들게 하는 스토리였는데요, 맛으로 표현하자면 익숙한 재료를 모아놓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든 요리 같더라고요. 아는 맛이지만 조금씩 튀는 향이 있어서 더 다채롭고 재밌었어요. 캐릭터들도 전부 특색있고 매력적이어서 악역한테까지 애정이 생기더라고요. 박막례 할머니의 명언이 있죠. ‘쓰레기는 쓰레긴디... 아니 또 얘 말을 들어보면 또 그래.’ 이 작품을 보신 분들이라면 와닿지 않으실까 합니다.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 거기다 브로맨스 요소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정말 재밌게 볼 수 있을 거예요. 감상평들을 보면 원작 만화책을 꼭 보라는 말들이 있어서 저는 원작 만화책으로도 한 번 더 감상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애니메이션만 보아도 이 작품의 매력을 듬뿍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삼각창의 밖은 밤>은 라프텔, MBC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Made in heart

지난번 <Radio Ga Ga>의 가사를 소개할 때부터 이번에는 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퀸’이라는 밴드에게 매우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퀸의 라디오 가가에서 이름을 따온 것처럼 저는 퀸의 <Made in heaven>을 듣고 Made in heart를 떠올렸거든요.


Made in heart가 뭔지 설명하기 위해 졸업 전시를 앞두고 있던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저는 사람의 마음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때부터 진심 찾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졸업작품으로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짤막한 글과 함께 이미지를 담은 책을 구상했고, 사전의 형식을 빌리되 단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 대신 저의 생각이 담긴 이야기를 쓰기로 했죠. 제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어서 여기저기 끄적여놓은 메모를 모으고 찍어놓은 사진과 그려놓은 그림을 아무런 기준도 없이 조합하면서도, 솔직히 즐거웠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만 몰입해서 마음대로 작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반 이상 작업이 완성된 시점까지도 적당한 제목만큼은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퀸의 노래를 듣게 됐어요. 지하철은 홍대입구역을 향해 가고 있었고 저는 내리기 위해 문 앞에 기대 서 있었죠. 그때 제가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듣고 있던 것이 라디오였는지 MP3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여하튼 그때 졸업 작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제 머릿속에 Made in heaven을 반복해서 외치는 프레디 머큐리의 힘찬 목소리가 제대로 꽂힌 거예요. 번쩍-하고 이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Made in heart.


이거다! 제가 찾던 완벽한 제목이라 무릎을 탁 치고 홍대입구역 계단을 신나게 뛰어 올라갔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허우적대던 시절이었어요. 메이드 인 하트. 저는 이 책을 사람에 대한 시각적인 사전이라 정의했고, 그것이 저의 졸업 전시였습니다.

몇 년 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하면서 우리나라에 퀸 열풍이 불었잖아요. 저 역시 너무 신나서 영화를 보러 극장에 두 번이나 갔었습니다. 아니, 공연을 보러 갔다는 말이 더 맞겠어요. 영화 마지막 20분간 퀸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이 고스란히 재현되니까요.


말해 뭐 하나요. 프레디 머큐리는 완전 진짜 너무 최고의 퍼포머예요. 무대 위에서 관객과 호흡한다는 게 무엇인지 끝장나게 보여줍니다. 라이브 에이드가 퀸 단독 공연이라고 해도 다들 믿을걸요? 관객들을 지루하게 해선 안 된다며 모두가 알 법한 곡으로만 셋 리스트를 짜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는데요. 실제로도 주어진 20분 동안 가능한 많은 히트곡을 공연하는 것이 퀸의 목표였다고 해요. 퀸을 보러 온 것도 아닌 수만 관중이 하나가 되어 물결을 만드는 모습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소름 돋는 장관입니다.


The whole point of Queen was to be original. 
- Freddie Mercury


“퀸의 모든 중점은 오리지널이 되는 것이었다”고 프레디는 말했어요. 퀸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진정한 퀸이 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외부의 시선보다는 자신들의 음악에 집중하는 것, 그러고 보니 이건 전설로 남은 모든 뮤지션의 공통점인 듯해요. 사람들은 또 기가 막히게 그런 이들을 알아보는 법이죠.


저는 지금도 퀸의 음악을 들으면 지하철에서 made in heart를 떠올린 그 순간이 생각납니다. 이 단어가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관통하는 주제가 될 줄, 그 무렵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를 일찌감치 건져올린 것 같아요. 이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좀 더 완성도 높은 나 자신’이 되고 싶다, 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되는 것에 중점을 둔다는 거, 어쩐지 조금 멋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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