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구독자 님께,

님은 연말이 되면 하는 특별한 의식 같은 것이 있나요? 다음 해 다이어리나 달력을 산다거나, 지난해를 되돌아보며 결산을 해본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에요. 저는 연말 분위기를 즐기는 걸 좋아해서 11월부터 일찌감치 연말을 준비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번 연말은 뜻하지 않게 무척이나 경견해져버려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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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를 그리는 수도승의 마음으로
해마다 11월이 되면 비장한 자세로 캐럴 앨범을 찾아 듣는다. 지금부터 열심히 들어야 겨우 두 달을 들을 수 있다며. 좋은 음악은 언제 들어도 좋지만 캐럴을 한여름에 듣는 건 탄산이 다 빠져버린 미지근한 사이다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김 빠지고 미적지근한 일이라 때를 맞추어 열심히 듣는다. 올해는 노라 존스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여러 번 들었다. 재즈 싱어가 캐럴 앨범을 내는 건 으레 한 번은 거치는 관문처럼 보였는데 그녀는 데뷔한 지 20년이 다 되어서야 캐럴 앨범을 선보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의 목소리는 편안하고 아름다웠고 그녀의 노래를 연말에 집중해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캐럴을 듣는 것으로 연말 맞이의 서막을 올리고 나면 트리플 J형인 나는 치밀하게 연말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고 연말 분위기가 나는 그림으로 컴퓨터 바탕화면을 바꾸고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예약하고 연말에 보면 좋을 공연이나 전시회를 알아보는 정도다. 생각만 가득하고 연락은 미루어왔던 지인에게 안부를 붇고 만날 약속을 잡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맘때면 괜찮을 줄 알았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직도 위세를 맹렬히 떨치는 중이라 이번 연말도 모임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협소한 인간관계가 더욱 쪼그라들어 걱정이다.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기독교 명절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색모래로 만다라를 그리는 티베트 승려를 떠올리다니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집안을 꾸미는 것으로 연말 맞이는 얼추 마무리된다.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주인공 루시(산드라 블록 분)가 했던 것처럼 진짜 전나무를 가져다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어서 이런저런 대안을 찾았다. 알전구를 트리 모양으로 배열하거나 벽 트리로 한쪽 벽면을 장식하는 식이다. 이번 연말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림으로 그렸다. 가지고 있는 종이 중 가장 큰 종이에 가득 차도록 그렸는데 이제 겨우 반정도 완성했다. 이 속도면 올해 안에 완성을 보지 못할 게 분명하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열심히 크리스마스 트리를 채색하고 있어야할 판이다.

시작은 소소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소소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은 좀체 소소하지 않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잔잔한 오너먼트를 일일이 그리고 색을 칠하는 데는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동이 들었다. 주말 오전 내내 채색을 했는데 고작 전체 그림의 십 분의 일 정도만이 색으로 채워졌다. 수채화는 수정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심하느라 더 시간이 오래 걸렸다. 1호짜리 붓을 들고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오너먼트를 알알이 채색하고 있자니 흡사 만다라를 그리는 수도승이 된 기분이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색모래로 만다라를 그리고 완성된 만다라를 바람에 날려 버리면서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상기하고 삼라만상의 번뇌를 흘려보낸다는데, 이 마음을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기독교 명절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헤아리다니 좀 우습고 멋쩍다.
만다라를 그리는 수도승의 마음으로 그림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조금 나은 어른이 되어 있을까.
몇 년 전 이탈리아 교환학생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을 떼는 날을 배웠다. 늘 새해가 되면 언제쯤 저 장식을 떼야 하나 알 수 없어 뭉그적거리기 일수였는데 날짜가 정해져 있다니 명쾌해서 좋았다. 날짜는 16. 에피파니(Epiphany), 우리말로는 주현절로 불리는데 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는 날로, 그날이 되면 12월 내내 있었던 집안의 장식을 정리하고 산뜻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고 했다. 또 전날 밤 침대맡에 양말을 걸어 놓고 잠을 자는데, 밤사이 마녀가 찾아와 착한 아이에게는 사탕을 나쁜 아이에게는 석탄을 준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 마녀의 이름이 베파나(Befana)라는 건 나중에 알베르토 몬디의 글을 보고 알았다.

베파나가 석탄을 배달하기 전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완성해야겠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려 석탄조차 받을 수 없는 건 아니겠지. 삿된 마음을 비우고, 만다라를 그리는 수도승의 마음으로 그림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조금 나은 어른이 되어 있을까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완성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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