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먼저 시행된, 태아산재법
2023년 1월부터 이른바 ‘태아산재법’이 시행되었습니다. '태아산재법'이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제3장의3 <건강손상자녀에 대한 보험급여의 특례>가 신설된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태아의 건강이 업무상 재해로 인해 손상을 받더라도 근로자 당사자가 아닌 태아는 청구권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산재법상 보험급여 청구자는 수급자와 동일해야 하는데, 근로자 뱃속의 태아는 근로자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강손상자녀”라는 개념을 만들어, 법령 제 91조 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 인정기준)을 신설하였습니다.
제91조의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제37조제1항제1호ㆍ제3호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노출로 인하여,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이 경우 그 출산한 자녀(이하 “건강손상자녀”라 한다)는 제5조제2호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적용할 때 해당 업무상 재해의 사유가 발생한 당시 임신한 근로자가 속한 사업의 근로자로 본다.
해당 법 조항을 근거로 2023년 1월부터 뱃속의 태아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9년 제주의료원 사건에서 시작된 태아산재법
“태아산재법”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2009년 제주의료원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주의료원에서 임신상태로 일하던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유산, 4명이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하였습니다. 이후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역학조사를 실시하였고, 역학조사 결과 의약품 등 화학물질 노출, 환자 폭언·성희롱으로 인한 스트레스, 인력 부족·교대근무로 인한 육체적 부담 등이 임부 간호사들에게 유해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당사자들은 근로복지공단 제주지사에 요양급여를 청구했지만 청구권 인정 문제로 불승인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긴 법정 다툼 끝에 지난 2020년 4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태아산재가 인정받았습니다.
“출산으로 모체와 태아의 인격이 분리된다는 사정만으로 그전까지 업무상 재해였던 것이 이제는 업무상 재해가 아닌 것으로 변모한다고는 볼 수는 없다”고 판시한 것입니다(대법원 2016두41071 판결, 2020.04.29. 선고).
태아산재법, 큰 진전이지만 더 나아가야 할 목표
사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별표 18제1호나목에서는 발암성, 생식세포변이원성, 생식독성 물질(Carcinogenic, Mutagenic or Reproductive toxicagents, CMR)을 특별관리물질로 제시하고, 근로자건강관리를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생식세포변이원성, 생식독성 물질들에 업무상으로 노출되면 어떤 영향이 있는지 알고 있지만, 정작 노출되어 피해가 발생했을 때 보상받지 못했다는 건 다소 기괴한 일이었습니다.
현재 ‘태아산재법’에서 제시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해인자’는 시행령 별표 11의 4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건강손상자녀 관련 유해인자(제83조의4 관련)(2022년 12월 30일 신설)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화학적 유해인자
가. 납(CAS 7439-92-1)
나. 니켈(CAS 7440-02-0)
다. 벤젠(CAS 71-43-2)
라. 사염화탄소(CAS 56-23-5)
마. 수은(CAS 7439-97-6)
바. 스토다드 솔벤트(CAS 8052-41-3)
사. 스티렌(CAS 100-42-5)
아. 에틸렌글리콜모노메틸에테르(CAS 109-86-4)
자. 유기수은(CAS 115-09-3)
차. 이산화황(CAS 7446-09-5)
카. 이황화탄소(CAS 75-15-0)
타. 일산화탄소(CAS 630-08-0)
파. 카드뮴(CAS 7440-43-9)
하. 크실렌(CAS 1330-20-7)
거. 테트라브로모비스페놀A(CAS 79-94-7)
너. 톨루엔(CAS 108-88-3)
더. 폴리염화비페닐(PCB)(CAS 11096-82-5, CAS 12672-29-6)
2. 약물적 유해인자: 메토트렉사트, 와파린, 이소트레티노인 등 「약사법」 제23조의2제1항제2호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고시한 임부금기(妊婦禁忌) 성분
3. 물리적 유해인자
가. 고열: 「산업안전보건법」 제39조제1항제2호에 따른 고온에 의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보건조치가 필요한 고열. 이 경우 용광로 등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고열작업을 하는 장소에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유해인자로 인정된다.
나. 방사선: 「산업안전보건법」 제39조제1항제2호에 따른 방사선에 의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보건조치가 필요한 방사선. 이 경우 엑스선 장치의 제조ㆍ사용 또는 엑스선이 발생하는 장치의 검사업무 등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방사선 업무를 하는 사람에 대하여 유해인자로 인정된다.
4. 생물학적 유해인자: 「산업안전보건법」 제39조제1항제1호에 따른 병원체에 의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보건조치가 필요한 다음 각 목의 유해인자. 이 경우 혈액의 검사 작업 등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유해인자로 인정된다.
가. B형 간염 바이러스
나. 거대세포바이러스
다. 단순포진바이러스
라. 매독
마. 수두대상포진바이러스
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
사. 톡소포자충증
아. 파보바이러스 B-19
자. 풍진바이러스
5. 제1호에서 제4호까지에서 규정되지 않은 유해인자의 경우에도 임신 중인 근로자의 업무수행 과정에서 그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유해인자에의 노출이 건강손상자녀와 인과관계가 있음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법」에 따른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또는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기관의 자문을 통해 시간적ㆍ의학적으로 증명되는 경우에는 유해인자로 본다.
건강손상자녀 관련 유해인자의 제한점
<건강손상자녀 관련 유해인자>를 제시한 것은 태아로 산재보상 범위를 확대하여 모성으로서의 여성노동자의 건강을 고려하고 재해당사자로서의 태아를 인정한다는 점은 무척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1) 업무상 스트레스, 교대근무 등이 위험요인으로 지적되었으나, 기타의 고려사항으로도 제시되지 않은 점이 눈에 띕니다. 이를 두고 고용노동부는 “시행령에서 정한 유해요인이 아니더라도 임신 중인 근로자의 업무 수행과정에서 취급이나 노출된 유해인자가 건강손상자녀와의 관련성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포함할 수 있도록 ‘포괄규정’을 두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교대근무, 스트레스, 과로와 같은 요인도 구체적인 인정기준으로 반영된다면, 예방과 보상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모계 노출만 반영하였다는 점도 제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제91조의 12에서 업무수행의 주체를 “임신 중인 근로자”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유해요인 노출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만 반영합니다. 그러나, 일례로 고분자 응집제 제조공정에서 사용하는 아크릴아미드의 경우, 설치류 실험에서 아크릴아미드 부계노출 시 자손에서 유전적 영향을 유발하는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2021년 12월에는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일하던 남성 노동자가 선천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한 바 있습니다. 추후 부계노출에 의한 자녀건강손상에 대한 연구와 추가적인 분석을 통해 기준을 확장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가 필요합니다.
[고용노동부 2022.10] 한겨레(10/19), ‘태아 산재법’ 시행 앞두고 문턱 높인 고용부 기사 관련 설명
[MBC 뉴스데스크 2021.12.02.] '생식 독성물질' 노출됐던 아버지‥'태아 산재' 신청
직업관련 ‘여성에게만 있는 질환’의 보상 현황
유산, 조산, 사산 등 모성관련 질환 이외에 여성에게만 발생하는 질환들의 보상 현황은 어떨까요? 근로복지공단에서 제공받은 자료를 통해 유방암, 난소암, 자궁질탈출, 유산, 조산, 사산, 임신 중 출혈 등 2016년부터 2021년 산재 신청된 ‘여성신체에서만 나타나는 질병’을 조사해 본 결과 6년 간 신청건수는 약 70건이었습니다. 이 중 유방암이 38건 신청에 14건이 승인되었고, 난소암이 5건 신청에 5건이 승인되었습니다. 자궁질탈출과 같이 암이 아닌 ‘여성에게만 있는 질환’의 신청과 승인 역시 극히 소수였습니다. 서울질병판정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산부인과 산재사례가 없어도 너무없다’ 고 매체를 빌려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신체의 질병 건수의 매우 작은 숫자는 여성에게서 직업적 유해인자의 노출이 없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여성의 직업성 질환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일까요?
[시사IN 2020.06.20.] 산부인과 산재 사례 없어도 너무 없다
여성질환의 업무상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유산, 태아 건강이상, 그리고 유방, 생식기 등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신체의 질환들은 업무상재해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관련 연구도 많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여성 질환의 산재 신청 자체가 저조한 상황에서, 여성노동자의 업무상재해에 대한 논의가 그저 현재 신청되는 상병이 더 많이 승인되어야한다는 방향으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성질환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기준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성에게서만 발생하는 질환의 상당부분이 업무관련성 질환일 수 있다는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절한 대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유산, 사산, 조산, 태아영향, 여성생식기계질환과 업무적 위험요인에 대한 인과관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그 책임은 대부분 여성 개인에게 전가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은 위험을 드러내기
산업보건 전문가들이 여성신체의 질병에 대해 얼마나 주목하고, 연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전문가들 조차 인과관계에 대해 잘 모르고, 연구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노동자 개인이 업무상 재해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산재를 신청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캐나다의 여성학자이자 인간공학자인 캐런메싱은 "여성이 처한 위험상황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성이 일터에서 어떤 위험에 노출되었을 경우 ‘여성이 약해서’ 그런 결과가 발생했다고 보며 누구도 조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위험이 드러나지 않는 악순환의 굴레를 겪는다"고 묘사했습니다. 해결을 위한 연구도 잘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점차 심화되어 예방되지 않는다고 덧붙인 바 있습니다. 캐런메싱은 근골격계 질환을 주제로 다룰 때 이러한 개념을 사용했으나 여성 비뇨생식계의 질환에도 적용이 가능한 개념으로 보입니다.
지금처럼 유산과 태아의 건강을 업무상질병의 한 범주로 보고 산재의 영역에서 다루기까지는 많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터에서 여성의 건강을 다룰 때에 ‘여성노동자의 임신·출산 문제’라는 틀 안에서 모성보호 차원으로만 다루는 것은 여러 한계를 지닙니다. 이제는 임신·출산을 준비하는 가임력이 있는 여성노동자를 넘어 여성노동자 전체, 나아가 전체 노동자의 재생산 건강 보장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재생산 건강을 산재예방의 기본 영역으로 두고, 모든 노동자를 위한 안전한 일터, 예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보상제도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글쓴이: 정지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여성노동건강권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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