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출근을 합니다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파주입니다.

출퇴근길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진 걸 보니 확실히 가을이 시작됐나 봅니다.

그간 잘 지내셨지요?


저는 요즘 출퇴근길에 동물 다큐를 봅니다.

사자는 매복하고, 치타는 질주하고, 거미는 그물을 짜고...


각기 다른 생명체가 저마다 다른 사냥 방식을 가진 걸 보면서

그들이나 인간이나 참으로 다양한 생존 방식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님은 어떤 사냥 방식으로 오늘의 밥벌이를 하고 계신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오늘도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직장인의 본능>


퇴근길에 자연스럽게 동물 다큐 영상을 켠다. 본능에 충실한 그들의 모습이 위로 비슷한 것을 주기 때문이다. 몇 미터짜리 비단뱀은 먹잇감 옆에 몸을 나란히 뻗어보며 소화 가능한 크기인지를 가늠하고 펠리컨은 냅다 주둥이를 가져다 대며 가늠과 식사를 동시에 시도한다. 제각기 다른 동물들의 습성은, 너무나도 본능적으로 보여 웃기기까지 하다.

펠리컨도 아니면서 나도 비슷한 짓을 행한다. 타인의 일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를 재보는 거다. 오픈키친에서 웍을 휘두르는 셰프를 보며 ‘나는 땀이 많으니 어렵겠다’ 싶고, 메뉴와 페어링하는 와인 설명을 술술 늘어놓는 서버를 보면서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 쉽지 않겠다’ 싶다. 하필 말도 느린데 낯까지 가리니까 손님이 올 때마다 절절거릴 게 분명하다. 뭐 이런 식으로 댄서, 래퍼, 인플루언서… 최근 한 달 사이에 포기한 꿈이 10대 내내 꿈꿨던 직업보다 많다.

더군다나 신체적인 한계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올해 건강검진에서 몸 안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발견됐다. 용종 같은 걸 떼어낸 뒤엔 위장에 자리잡은 균을 없애준다는 약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커피를 줄이면서 세 잔이 아닌 한 잔으로도 직장인이 평일을 버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처방받은 무수한 약을 삼키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몸 안에 나를 갉아먹는 무언가를 없애겠다고, 나 역시 매일 뭔가를 몸속으로 밀어 넣고 있구나. 약사 선생님의 말처럼 속이 불편하고 가끔씩 위가 있겠구나 싶은 위치를 무언가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생기기도 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면서 하루 두 번 정해진 시간이면 꼬박꼬박 입을 벌렸다. 이제는 맥주도 신경 써가며 마셔야 하는 나이가 됐다니. 한계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이다.

철없는 시절엔 다른 일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일 뿐, 시도만 하면 능히 해낼 수 있으리란 착각에 빠져있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렇게 믿었다. 요즘엔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의 직업과 하는 일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나면, 나는 절대 못한다는 확신을 쉽게 한다. 한계를 직면한 나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도 이런 질문을 하루 세 번씩 한다.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할까. 그보다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곤 퇴근길에 나섰다. 무의식적으로 켠 동물 다큐엔 방금 사냥에 실패한 표범이 다시 몸을 일으켜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다. 실패 같은 것에 여운 따윈 없다는 듯, 발걸음에도 망설임이 없다. 

다음 컷에 등장하는 그물무늬비단뱀도 마찬가지다. 다 자라지 못한 아성체 비단뱀이 냅다 삼킨 먹잇감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곤 도로 게워낸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틀어 다시 삼킬 거리를 찾아 나선다. 가늠을 잘못했다고, 사냥에 실패했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동물은 없다. 실패 뒤엔 다음 시도만 있을 뿐이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지독했지. 밥벌이를 하러 비장하게 나서지만 상처만 입는 날들이 많았다.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또 했던 말은 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촉새. 협업 관계를 갑을 관계로 착각하며 으름장만 놓는 오만한 하이에나. 상대해야 하는 인간군상도 가지각색이었다. 여름은 끝났지만 밥벌이는 여전히 지난하다.

오늘도 사냥을 나선 뒤에 어김없이 작은 절망에 빠졌다.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할지, 애초에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지만. 직장인의 본능을 따라서 내일도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내던진다.


야망백수 :  직장인이라는 동물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업종 탓인지, 아니면 나날이 유능해지는 AI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유한성과 첫인사를 나누게 되는 삼십 대 중반이란 신체 나이 때문인지. 저는 요즘 부쩍 우리가 멸종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을 자꾸만 듭니다. 싸지는 노동의 값어치와 비싸지는 자산 사이에서 희망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올해 내내 이 질문에 매달렸는데, 아직 뾰족한 답을 찾진 못했습니다. 명확한 해결책이 없으니 느는 건 요령이더라고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요.

‘이제 진짜 한계인 것 같다’란 생각이 들면 ‘한계’라는 단어를 그보다는 덜 절망적인 ‘경계’로 슬쩍 바꿔보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내 경계야.’ 어때요? 한계보단 좀 낫죠. 경계든 한계든 여전히 ‘넘어가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별로라면 ‘챕터’나 ‘다음 장’처럼 술술 잘 넘어가는 표현도 한번 써 보고요. ‘아, 이제 인생의 다음 챕터가 다가오는구나.’ 이렇게 언어를 최대한 가벼운 것들로 갈아 끼워 주면서, 마음을 자주자주 환기시켜 주다 보면 또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월급이 들어오더군요. 직장인이란 역시 희망이 좀 없어도 환기만 잘 되면 끈덕지게 살아남는 동물인가 봅니다.
지난 호에 보내주신 답장에
다시 짧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풀칠러 A : 안녕하세요~ 아매오님의 글은 이제 볼 수 없는걸까요..?? 장사하느라 바뿌신걸까요오
파주 : '식스 투 나인 주6일제. 열심히 풀칠 중...'이라는 근황을 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매오는 언젠가 돌아옵니다. (2교대는 너무 힘들어서)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쓰고 보니 꼭 마블 영화의 쿠키 영상 속 멘트 같네요.
이제야 살 맛 나는 날씨가 찾아왔네요.

지난주 야망백수님의 예고처럼 산뜻한 이야기로 찾아오진 못했지만요.
저의 하소연이 출퇴근길 속에 짧은 심적 요기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9월엔 풀칠러님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며, 2주 뒤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p.s 여름의 끝자락. 서늘한 홑이불 덮고 듣기 좋은 연주곡 하나를 동봉합니다. 제목부터 <fading summer>입니다.
credit
에세이 | 파주
코멘트 |  야백
풀칠러스케치 | 야백
편집 | 야백, 파주

Published by
풀칠 | 밥벌이 미학 연구회
먹고 사는 게 다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