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고 광활한 X축 끝까지

지금 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입니다. 물론 건강이나 가족 같은 건 빼고요. 그래서 자꾸 일 자체에 대해 생각하곤 해요. 일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까? 이 레터도 결국엔 일을 더 오래, 잘하기 위해 시작한 셈이고요.

저는 2014년 1월 2일에 첫 출근을 했습니다. 이전에도 북카페, 파리바게트, 옷가게, 과외, 전단지나 푸드코트 등 단기 알바를 비롯해 많은 일을 했었지만 정식으로 회사에 취직한 건 저 때가 처음이에요. 슬랙스에 셔츠, 니트와 코트를 입고 로퍼를 신고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지옥 같은 9호선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그때가 새삼스럽게 생생합니다. 가양역 근처에 있던 그 회사 지금은 없어졌대요.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지금이 2023년이니 올해로 딱 10년차 직장인인 셈입니다. 저는 지금 네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고, 첫 연봉이었던 2,180만원에 비하면 많은 액수의 돈을 벌고 있어요. 후드티에 10년 입은 청바지, 낡은 어그부츠에 패딩을 껴입고 가끔 가방도 없이 비척비척 걸어서 출근하는 저를 보면 10년 전 저는 뭐라고 할까요? 지하철 안 타도 돼서 부럽다고 하겠죠 뭐.


요즘에야 처음부터 탄탄한 브랜딩 위에서 시작하는 멋진 브랜드들이 많고 많지만 대부분의 브랜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헉 우리도 브랜딩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브랜드의 탄생을 직장인 개인에 비유하자면 누군가 한 사람의 일꾼으로 시장에 나오는 첫 취업, 그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따지면 저라는 브랜드는 2014년 1월 2일 세상에 태어난 셈입니다. 물론 요즘엔 촌스럽게 꼭 ‘취직’을 하지 않아도 멋진 일들을 많이 해볼 수 있다지만 저는 이런 측면에서 제법 보수적인 옛날 사람입니다…

이렇게 무리한 비유로 시작하는 이유는 주말에 읽은 브랜딩 책을 어떻게든 엮어 넣어보고 싶어서였는데 이미 망한 것 같으니 그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어쨌든 모든 브랜딩은 다른 브랜드와의 차별점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고 해요. 아무래도 10년째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서야 일꾼으로서 저의 차별점 혹은 강점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일 생각 많이 했다고 해놓고 정작 이런 생각은 왜 안 했냐 싶지만, 좋게 말하면 어디서 뭘 하든 잘 할 자신이 있었던 거고 나쁘게 말하면 닥치는 대로 마구 일했던 탓입니다. 이제라도 생각해보는 게 어디인가요?


[간단한 이력]


  • 첫 번째 회사: 아동/청소년 전문 출판사 (재직 기간 9개월). 여기는 애초에 가지 말아야 했고 갔다면 바로 나와야 했던 회사인데 어리석은 사회 초년생이라 이른 탈출에 실패.

  • 두 번째 회사: 단행본을 내는 종합 출판사 (재직 기간 4년). 사수가 좋고 일이 재미있어서 오래 다녀버린 회사. 출판계를 떠날 생각을 안 했다면 아직 여기 다니고 있을지도 모름.

  • 세 번째 회사: 부동산 스타트업 (재직 기간 3년 10개월). 마케팅팀 > 콘텐츠팀 > 커뮤니티&콘텐츠팀 > 디지털서비스팀 > 신사업팀(?)을 거침. 학교 다닐 때 전학 안 다녀봐서 여기서 몰아서 함 .

  • 네 번째 회사: 콘텐츠 스타트업 (8개월째 재직 중). 콘텐츠 본부 안에서 신규 서비스 기획/운영 준비 중이며, 전학 전문가 아니랄까봐 벌써 팀 한 번 옮김.


  • 했던 일: 출판사에서는 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편집/교정교열, 취재, 유럽 가서 자료사진 찍어오기(솔직히 개꿀), 저자 섭외, 인터뷰 녹취, 원고 작성, 기획과 구성에 참여함. 부동산 스타트업에서는 행사 세팅과 진행, PR 아주 조금, SNS 광고 크리에이티브 기획과 온드미디어 게시글 제작, 편집, 일정 관리, 팀원 매니징, 면접 및 인력 채용 등을 해봄. 갑자기 서비스 기획도 1년 조금 넘게 해봄. 해봤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인 업무들도 있지만 안 해본 건 아니니 일단 다 해봤다고 적음.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사업 기획을 하고 있는데 곧 ‘아무거나 다 해요’ 될 예정…


  • 10년 동안 배운 것

    • 나는 이런 일을 잘하고 이런 일은 잘 안 맞는구나! (X)

    • 역시 사람은 필요하면 아무거나 다 할 수 있게 되는구나! (O)


사실 강점 말고 잘하는 일은 아주 명확합니다. 저는 복잡한 내용 간단히 정리하기와 글쓰기를 잘해요. 이 둘은 거의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구조화하고 살을 붙여 정리하고, 사업 실행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나열합니다. 그러면 허공을 떠돌던 말들과 꿈과 희망… 들이 실행 가능한 것으로 변해 있죠. 그렇더라고요.

잘하는 일 말고 강점은 찾아내기는 아주 어려웠지만 결국 존버를 잘한다는 게 제 강점이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1. 남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2. 스트레스 상황이 지속되어도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잘 버틴다.

  3. 참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강해지면 그 정도를 낮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좋은 걸까요? 출판사에 다니던 5년차까지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랄맞은 저자가 난리를 치면 야마도 돌았다가 또 금방 괜찮아졌다가 일단 저 놈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고 일이나 열심히 하자 했다가 음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는 나, 이상한가요? 고민도 했다가 또 까먹고... 를 반복하다 보니 이 성격이 나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억울함마저 생겼어요. 멍청하게 버티면서 괜히 시간 낭비만 하기 딱 좋은 성격이 아닐까? 그러니까 좀 멍청하고 곰 같은 짓은 아닐까? 예민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때마침 나를 아껴주자, 나를 가장 사랑해주자, 일단 떡볶이 먹자, 너무 애쓰지 말자 따위의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왔고 저는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성질이 더러워서 곰돌이 푸나 보노보노가 그려진 책은 절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일만 하면서 살기도 힘든데 성격까지 바꿔야 하냐? 는 짜증이 혼란보다 컸기 때문에, 저는 기회가 왔을 때 휙 이직을 했습니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다른 업계를 경험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출판계는 돈을 너무 적게 줬어요.


한번 시작한 존버는 웬만한 천재지변이나 일신상 큰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멈추지 않습니다. 마찰과 중력이 0인 환경에서 한번 구르기 시작한 쇠구슬이 멈추지 않듯이.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한 출판사에서는 딱히 일을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정교열과 글쓰기는 이미 잘하는 일이었어요. 입사 첫날 주어진 교정지에 초교를 보고 편집장에게 가져갔을 때, 원고를 넘겨본 편집장이 칭찬을 퍼부었던 일이 그 증거가 될 수 있겠죠. 제작이나 보도자료 작성 등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음 출판사에서 꼼꼼하게 일을 배울 수 있는 상사들을 많이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고요.

하지만 스타트업이라는 곳으로 이직을 하자 갑자기 커브, 마찰, 중력이 생긴 기분이었습니다. 우선 파티션 없는 커다란 사무실에 직원 50명 정도가 뿌려진 채 일해야 한다는 게 제일 큰 충격이었고요. 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조사를 뺀 모든 단어가 생전 처음 듣는 영어이거나 알파벳 약자여서 메모장에 받아적으면서 들어야 했습니다. (물론 출판사에서도 일본말 많이 들었죠…) FYI? ROI? 온드미디어?

그러던 입사 두 달 만에 새로 온 팀장은 엄청난 마이크로매니징을 했는데, 마이크로매니징 자체가 싫었던 건 아니고 해야 할 일이 정말 정말 많았던 게 문제였습니다. 팀장과 저를 포함 4명인 팀에서 저는 매일 그날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채 GG를 치고 귀가하는 팀원이었어요. 그게 매번 밤 11시를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팀장이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회사 바로 앞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에밀리의 마음으로 살아갔던 지난 세월
그 뒤로 많은 일이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갑자기 팀장이 되어 최소 2명 최대 10명에 육박했던 팀원들과 함께 팀을 운영해야 했습니다. 또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주부터 개발팀으로 출근해서 서비스 기획자가 되세요’를 마주했네요. 안 해본 일 한다고 나름대로 공부도 많이 하고 했는데요, 그때 참 쉽지 않은 동료를 만났었는데 속으로 계속 ‘나는 에밀리다… 나는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출연 중이다…’를 되새겼더니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런 변화의 기로에 설 때마다 저에게는 변화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습니다. 계속 출판사에 다녀도 괜찮았고, 팀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개발팀이나 신사업팀에 가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인에게는 언제든 퇴사와 이직이라는 선택지가 있고요. 하지만 저는 계속 구르는 쇠구슬이고 싶었습니다. 마찰을 0으로 가정하는 상상 속 구슬이 아니라 실재하는 길 위를 멈추지 않고 구르는 구슬… 이라기 보다는 돌에 가까울까요? 아무튼 굴러가고 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집중해서 버티지 않으면 아무것도 쌓을 수 없습니다. 아무 곳으로도 굴러갈 수 없고요. 이렇게 시장 상황이든 조직이든 업무든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환경에서는 한 자리에서 집중한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죠.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남들이 성장하는 사이 나만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대부분의 일은 그리 엄청난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급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산업과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하는 사례도 참 많아요. 개인의 선택에 대해 뭐라 말하겠어요? 그냥 어떤 직무든 잘하는 놈이 잘한다는 말 밖에는…  
저는 스트레스를 견디며, 도저히 안 될 것 같을 때는 적절한 도움을 요청하며 버텼습니다. 다행히도 언제나 도움을 요청할 고마운 사람들이 옆에 있었어요.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정말 많이 배웠어요. 열 명의 팀원과 매달 1:1 미팅을 하면서, 하루에 한 편씩 회사 블로그에 기계처럼 글을 올리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한 인터뷰 50개를 쌓아 한 권으로 묶어내면서, 사람 사이의 불화를 조율하면서(솔직히 이건 지금 생각해도 스트레스 받고 이런 성장 원치 않음), 끝도 없이 계획을 짜고 고치고 짜고 뒤집히면서, 갑자기 파리 한복판에 떨어진 에밀리의 심정이 되어보기도 하면서(근데 나는 프랑스어 한 마디도 못 하고 3일 동안 간단 회화책 읽고 온 게 다임). 

많은 사람들은 'J커브'를 그리며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런 ‘인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방법들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X축이 어느 정도 범위는 되어야 이놈이 그리는 커브가 J인지 살짝 우상향하는 ‘ㅡ’인지 좀 올라가다 툭 꺾여버린 ‘ㅅ’인지 알 수 있다는 거요. 그리고 저는 언제든 광활한 X축의 오른편 저 끝까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10년차 직장인으로서 저의 가장 큰 강점이겠네요. 
앞으로는 지금까지 그랬듯 계속 구르면서, 거기에 더해 도움이 필요한 동료들을 도울 수도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 정도 짬은 됐잖아요^^
<생존! 프랑스어 간단 회화>가 되어줬던 고마운 책, 추천합니다. 

월요일 출근 전에 잠깐 일 좀 하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일하는 이야기만 잔뜩 했네요. 벌써 2월이에요. 이번 주도 같이 힘내요! =)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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