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갖고 싶었던 물건에 대해 떠올려본다. 딱 하나밖에 생각이 안 난다. 엠피쓰리. 중학교 2학년 때 아이리버도 아니고 소니도 아닌 COWON(거원) 엠피쓰리가 너무 갖고 싶었다. 당시 돈으로 20만 원 정도 했던 거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네. 뭔가 갖고 싶다고, 사달라고 떼를 써본 적이 없어서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다. 엄마 요즘 엠피쓰리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노래를 담아서 들을 수 있대. 엄마는 씨디피가 있는데 엠피쓰리가 왜 또 필요한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엠피쓰리를 사줬다! 솔직히 나같아도 사줌^^ㅎㅎ...
아무튼 오래 고민한 보람도 없이 나는 생각보다 쉽게 엠피쓰리를 갖게 되었다. 그 엠피쓰리는 지금도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만큼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주 세련된 메탈 재질에 깔끔한 은색과 검은색이었고, 화면은 4줄까지 표시됐다. 나는 그 엠피쓰리를 어디에나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BGM을 즐기는 데 푹 빠졌다. 하나의 물건으로 그렇게 크고 오랜 만족감을 느끼는 게 앞으로 가능할까 싶을 만큼. 물론 언젠가 내 집을 사게 된다면... (더 보기)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소비를 잘 안 한다. 아이쇼핑은 누가 가자고 하면 따라나서지만, 보면 예쁘고 좋지만, '예쁘다'에서 '갖고 싶다'로 넘어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10년 넘게 입은 옷이 수두룩하고 보상판매로 만 원을 받을 수 있는 맥북에어 2010년형이랑 아이패드 에어 1세대가 있다. 진짜 뭔가 필요할 때도 귀찮아서 안 사고 버티다보면 아 이거 필요 없었네, 싶은 것들이 많다. 그럼 또 몇 년을 버틴다...
이걸 진짜 싫어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다. 대학생 때 입던 옷 입고 엄마 집에 놀러가면 악귀를 본 사람처럼 옷 좀 사입으라고 한다. 낡지도 않았는 걸요 아무도 모른다구요... 엄마 마음이 뭔진 안다. 엠피쓰리를 사달라고 했을 때 덥석 사준 마음이다. 평소 뭐 갖고 싶다고 안 하는 '애비 닮아 지독한' 딸이라서 남의 자식들처럼 옷 쇼핑도 하고 뭐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엄마 친구 ## 이모네 딸은 차 사달라고 했다는데 그럼 차 사주실건가요...) 이랬으면 좋겠는 마음 뭔지 알겠어!
위에 적은 맥북에어도 엄마가 사준 거다. 대학 때 친구랑 술 이빠이 먹었는데 친구가 너무 취해서 옆구리에 낀 맥북에어를 꼭 잃어버릴 것만 같은 거다. 집 가까운 내가 맡아놨다 내일 준다고 집에 가지고 들어갔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엄마가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그걸 보고 있었다. 너 친구들은 이렇게 예쁜 노트북 쓰는데 넌 왜 이런 거 사달라고 안 하냐고. 어~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게 뭐 꼭 필요할까??? 근데 엄마가 바로 나를 백화점으로 끌고 가서 당시 완전 최신형이었던 2011년형 맥북에어를 당장 사줬다. 난 숙취 쩔어서 이게 뭐지 하지만 감사... 하고 있었고.
그 맥북에어는 중앙도서관 6층에서 도둑 맞았고(이 새끼 그때 내가 너무 저주를 퍼부어서 3년 정도 고통스럽게 병마와 싸우다가 10년쯤 전에 죽었을 듯), 나는 아직도 엄마한테 그 얘기를 못했다. 당근마켓이 없던 그 시절 무려 중고나라에서 2010년형 맥북에어 현금박치기 65만원으로 냅다 사서 그거인 척했지. 여러분 그거 아세요? 2011년형 맥북에어는 키보드 백라이트가 있는데 2010년형에는 없답니다! 엄마 앞에서 컴퓨터 하고 있는데 엄마가 왜 키보드에서 불빛 안 나냐고 해서 식은땀 주르륵 났던 추억^^...
엄마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뭘 살 때 고민을 별로 안 한다. 뚜벅뚜벅 걸어가서 이거 주세요! 드르륵 일시불 긁어버리기. 사실 이게 그렇게 문제인가 싶지만 주변 사람들이 정색 질색 경악하는 걸 보고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나 무지성 구매 하네... 하지만 나는 뭔가를 고르는 일이 정말 귀찮고, 맘에 드는 게 나타났다 싶으면 더 둘러보기가 싫다.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묵히기? 한번도 해본 적 없는 행위... 심지어 처음으로 독립을 하게 됐을 때 부동산 아저씨가 집 4개를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2개 보고 '여기로 할게요' 했다. 이 이야기하면 놀라는 사람들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드는 걸.
이 물건이 별로면 어쩌지? 더 좋은 물건이 있으면 어쩌지? 더 저렴한 판매처가 있으면 어쩌지? 이런 고민들을 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광활한 옥수수밭을 걸으며 가장 큰 옥수수를 딱 한 개만 따오라고, 하지만 한번 앞으로 나아가면 다시 뒤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나라면 조금 걷다가 '아 이놈이다~~' 싶은 걸로 냅다 꺾어들고 그 뒤로는 산책이나 할 것이다. 지금까진 음 후회를 별로 안 하는 아주 편리한 성격이구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스스로를 너무 과신해서일지도...
별 고민 없이 사버려서 그런지 물건에 애착을 갖지도 않는다. 남들이 보면 매정하다 할 만큼 냅다 우르르 뭔가를 잘 버린다. 물건이 뭐라고. 나중에 필요해지면 다시 사면 되지. (그리고 10년이 흘러갑니다) 사람도 그렇다. 알게 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잘 챙기면서 이어가고, 친구랑 '쌩깐' 적도 없고, 연애도 오래 가는데, 그치만 갑자기 우르르 갖다 버리기도 하고... 앗 이건 연애에만 한정된 이야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해야겠죠.
지금은 이런 성향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지구에) 좋아 정신으로 돌파 중이다. 하지만 이게 조금 싫었던 때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뭔가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하고, 쇼핑도 많이 하고, 갖고 싶은 뭔가를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아… 인생에 그런 작은 목표들이 있다는 거, 그리고 그 작은 목표들을 달성했을 때 예쁜 물건을 껴안고 행복해할 수 있다는 거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이니까.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태도가 크게 바뀔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예쁜 물건을 사고 기뻐하고 또 뭔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도 술값과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왓챠, 그외 어쩌구저쩌구 유료 콘텐츠 구독, 문화생활 비용으로 남부럽지 않을 만큼 돈을 써대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한 소리 다 헛소리지 뭐. 다음엔 뭐가 필요해질까? 또 뭘 사게 될까? 이걸로도 충분히 인생의 작은 이벤트들이 생겨서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