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17일 월요일
님,

경제학자·철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회고록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기사보기)에서 자신이 고대 인도의 문학과 사상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돌이켜 봅니다. 이 가운데 센 자신이 <정의의 아이디어>(2009) 첫머리에서 제시하기도 했던, 정의(justice)에 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에 대한 이야기가 사뭇 흥미롭습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정의’를 뜻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단어가 있는데, ‘니티’(niti)와 ‘니야야’(nyaya)라 합니다. 니티는 “잘 규정된 규칙과 체계적인 재산권을 따르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법질서적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잘못 했으면 처벌 받는’ 식의 정의의 뜻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와 달리 니야야는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될 실제 결과들을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곧 ‘실현된 정의’의 종합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해 니티가 사람들이 제도와 규칙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정의라면, 니야야는 그것을 넘어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세상 자체를 결과적으로 더 낫게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정의입니다.

 고대 인도의 법률가들은 ‘맛시야니야야’(matsya nyaya), 곧 ‘물고기 세계의 정의’를 경멸하고 이것이 인간 세계에 침입하는 것을 막는 것을 정의의 본질로 추구했다 합니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마음대로 잡아먹는 것이 물고기 세계의 정의입니다. 센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적합한 조직이 구성되어 있어도, 또 아무리 적합한 규칙이 마련되어 있어도, 큰 물고기가 여전히 작은 물고기를 임의로 잡아먹을 수 있다면 니야야의 개념상으로는 명백히 정의를 위반한 것”이라고요.
“과학의 중심에는 실험이 있다.” 영국 출신 과학 저술가 필립 볼의 새 책 <아름다운 실험>의 첫 문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과학에서 실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험은 가설을 검증하고 기존 이론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새로운 발견을 제시해 과학 발전을 추동합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실험을 빼놓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아름다운 실험>은 천체물리학, 고전 물리학, 화학, 고전 광학과 양자론, 생명체, 동물 등 여섯 분야로 나누어 모두 60개의 실험을 시간 순으로 소개합니다. 기원전 3세기 그림자의 길이와 방향 등을 계산해 지구의 크기를 추정한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부터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턴, 라부아지에, 파스퇴르, 멘델, 마리 퀴리 등 과학사를 수놓은 거장들의 실험 이야기가 흥미진진합니다.

 원하는 실험 장비를 시중에서 구할 수 없어 과학자들이 직접 재료를 사다가 제 손으로 기기를 제작하는 모습, 현미경에 꽂힌 포목상이 자신의 정자 운동을 확인해서 영국 왕립학회에 보고한 사연, 실험실 사고로 뜻밖의 발견을 하게 된 과학자 등 실험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풍부한 도판과 주요 인물들의 약전, 실험을 둘러싼 논란과 뒷이야기 등을 모아 놓은 ‘쉬어가는 페이지’ 등의 편집이 가독성을 높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로버트 P. 크리즈가 자신이 과학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물리학 실험 10가지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아름다운 실험>처럼 과학 실험에 'beautiful'이란 말을 쓴 것이 흥미롭네요. 영국의 유명 과학 작가 존 그리빈이 메리 그리빈과 함께 쓴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실험 100>(예문아카이브)이란 책도 비슷한 컨셉트라 하겠습니다.

🐟필립 볼이 쓴 책으로, 원소 발견의 역사 3000년을 재밌게 구성한 <원소>도 함께 소개합니다. <모양> <흐름> <가지> 세 가지로 이뤄진 '형태학 3부작'은 그의 대표 저작입니다.
🔗원소 118종에 담긴 그보다 많은 이야기들
'지식의 최전선'이란 말에는 어쩐지 지식이 그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의 자신만만함과 자부심이 함께 들어있는 듯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앤서니 그레일링의 <지식의 최전선>에 대해서도 어쩌면 그 제목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목을 통해 지은이는 그와는 반대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바로 "우리의 지식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무지도 늘어간다"는 역설을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지식이 늘어나면, 그것을 자랑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무지가 생깁니다. "나는 오직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 소크라테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라 한 공자 등 성현들의 말씀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지은이는 과학, 역사, 두뇌와 마음 세 분야에서 인류가 쌓아올린 지식의 성취를 더듬어봅니다. '어떻게'를 넘어 '무엇'에 관한 지식을 탐구하면서 탄생한 과학은 인류에게 관측과 이성에 의존하는 방법을 성장시켰으나, 여전히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아는 건 '몇 퍼센트'로도 정의할 수 없이 미미하다고 합니다. 역사의 실체에 대해서도, 자신의 두뇌와 마음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오늘날 지식의 축적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두루 살피는 한편 우리가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성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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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시선집의 틈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시집 두 권을 이번 주 만났습니다. 1990년대생, 2020년대 등단했다는 이력, 각기 첫 시집이란 점, 그 시집을 지배하는 기후까지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차이도 극명했고요. 자신들의 처지가 시가 되어, 그 처지가 낯선 이들에겐 일상의 무딘 말조차 시 안에서 비의적이고 불온해집니다. 시인 김수영의 말마따나 죽음의 리듬이 있는 시들이지요. ‘시로 버틴 삶’의 고백이 이처럼 진솔하니, 결핍과 죽음의 서정시로 불러 봤습니다. 2022년 등단한 시인 조성래(32)의 <천국어 사전>과 2020년 등단한 시인 차도하의 <미래의 손>입니다.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을 것처럼/ 흰 것들은/ 희구나// 언제부턴가/ 착한 사람을 만나면/ 미안할 일이 닥쳐올 것만 같은// 하얀 구름/ 하얀 파도// 아무런 악의도 미움도 없었는데/ 심지어 사랑도 없었는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시신을 끌고/ 해안선을 따라가네”
 조성래의 ‘무인도’입니다. 자신이 자신만 “미워하”여 소외되는 삶, 꿈도 사랑도 겨를 없어 “가족”마저 “적”이 되는 그 삶을 스스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 간구하는 한 인간이 보입니다. ‘일어날 불행은 일어난다’를 정언명령 삼는 시인의 후기와 맞닿는데, 그 내막이 뭘까요.
 조성래의 처지가 드러난다면 차도하는 캐냅니다. 처지를 들추고, 처지가 처지를 낳으며, 처지를 밀어붙여 진실에 다가가려는 것 같습니다. “여름이 죽었다. (…) 끝나간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죽을 줄이야. 하긴 누군가 신도 죽었다고 했고 재작년 이맘때쯤 김희자도 죽었는데 계절이라고 못 죽을 거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시작하는 시 ‘부고’를 포함해 죽음의 기색은 도처에서 짙습니다. 그 연유는 또 뭘까요. 차도하 시인 경우 지난해 10월 지인들을 통해 실제 부고로 자신의 처지를 알려왔습니다. 남은 시인들이 62편을 엮었으니, 첫 시집이 유고집이 됐습니다. 1999~2023.
이졸데 카림(65)은 <나와 타자들>이라는 저서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의 여성 철학자입니다. 철학 저술과 언론 활동을 병행하는 카림은 오스트리아의 극우화에 맞서 정치적 저항운동을 벌이는 실천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2022)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분석하는 카림의 철학적 사유가 번득이는 저작입니다. 이 책에서 카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개인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통해 작동함을 밝혀 보입니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과거의 자본주의 질서와 극명하게 다른 점은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 환원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선 인간마저 ‘인적 자본’이 됩니다. 주체는 자신을 자본으로 삼아 자신을 경영하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독려받습니다.


 이 신자유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주체가 바로 나르시시즘적 주체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경쟁으로 바꾸어놓고 주체들에게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극한으로 발휘해 그 경쟁에서 최고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개성의 극한적 발휘야말로 자아이상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죠. 신자유주의 체제는 개인들의 자아이상을 연료로 삼아 작동합니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이 자아이상에 자발적으로 복종해 이 이상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은 고통이 됩니다.

🐟이졸데 카림의 대표 저작 <나와 타자들>은 '다원화'의 의미를 개인주의와 정체성의 변화 차원에서 분석하고, 이를 통해 근본주의와 포퓰리즘 등 유럽의 정치사회 상황을 성찰합니다. 
“쪼이고! 쪼이고!” 지난달 말 서울 덕수궁 돌담길 앞에서 열린 ‘서울시 시민건강 출생 장려 국민댄조(댄스+체조) 한마당'에서 김용호 국민의힘 서울시의원은 “‘케겔운동’(항문 조이는 운동)을 이용해 저출생을 극복하자”고 말해 많은 여성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죠.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이 ‘여성의 1년 조기입학’을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언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성들은 또다시 절망했습니다. 이런 대책과 이런 말들을 부끄러움 없이 공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심리 밑바닥엔 여성을 ‘아이 낳는 존재’ ‘아이를 낳는 재생산의 도구’로만 보는 관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페기 오도널 헤핑턴이 쓴 <엄마 아닌 여자들>은 이렇게 여성이란 존재를 자녀 유무를 기준으로 ‘자녀 있는 여성’과 ‘자녀 없는 여성’으로 나누고 아이를 낳는 도구로 간주하는 ‘납작한’ 생각을 깨뜨려보려는 책입니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여성이 자녀를 가진 세월만큼이나 오랜 세월 많은 여성이 자녀를 갖지 않았음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자녀 없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확인할 수 있고, 주로 여성에게 책임지워지는 양육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하면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싶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더 고민해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녀 없는 삶을 택한 여성들을 우리 사회가 입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블루오션이라 욕심 냈던, 실록 조선사
만화가 박시백
만화가 박시백은 한겨레신문에서 만평 담당자 공모에 선발되어 본격적으로 만화가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어떤 정보나 지식을 만화로 옮기는 일이 자신에게 맞다고, 또 좀 더 호흡이 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만난 것이 <조선왕조실록> 국역판 CD 판매 광고였답니다. 장장 10년여에 걸쳐 20권의 대작으로 태어날 그의 첫 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실록에 기반한 역사 만화'라는 블루오션을 혹시나 다른 이가 선점할까 조바심이 나서 얼른 회사에 사표부터 내고 봤는 얘기가 재밌습니다.
박시백 작가가 그밖에 자신의 책들을 꼽아봤습니다. 왼쪽부터 일제강점사를 통사로 다룬 <35년>(전7권, 비아북), 친일파 이야기만 따로 엮어낸 <친일파 열전>(비아북), 또 하나의 실록 대작인 <박시백의 고려사>(휴머니스트), IMF 시대를 담은 <사노라면: 그 시절, IMF의 추억>(휴머니스트)입니다.
책방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책과아이들

🏠부산광역시 연제구 교대로16번길 20(거제동)

🔗instagram.com/booknkid


"책방이 하나의 책이 되고 프로그램이 또 하나의 책이 되는 그런 경험을 합니다.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지요. 책방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진 공간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펼쳐집니다. 그 행사에 시민들이 참여하게 되니 문화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하는 행사는 책과 관련이 있어요. 책 속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풀어내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어떻게 반응을 일으켜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경험해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책과아이들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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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울었다



홀로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는 밤
병원은 멀다
 
14일이라서
수요일이라서
알 수 없는 수의 날들이라서
 
이마는 일어서지 않는다
손은 구겨진 공책을 더듬더듬 찾고
유일한 길인 듯 무얼 쓰다가
공책이 지도인 듯 파헤치다가
 
서성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서성인다 수요일에



📖박연준 시집,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문학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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